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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hrjung Oct 22. 2023

승진이요?

꼭 해야만 하나요?


가장 최근까지 일했던 회사 O는 2021년도 당시 모두가 “엔지니어”라는 직책을 가졌다. 인터뷰 때 리크루터는 회사가 평등한 직급 체계를 고수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게다가 빠르게 성장 중이던 회사는 당장 업무에 투입할 수 있는 시니어 엔지니어만을 고용하고 있었고 모두가 시니어 엔지니어였으니 “시니어”라는 prefix가 필요 없었다. 나는 직급 없는 회사 O의 인사체계가 마음에 들었다.


그 해 9월, 회사는 미국 시장에 주식상장을 했다. 그러고 나서 왜인지 여타 다른 큰 회사들처럼 직급 구조를 만들어 나갔다. Principle engineer, Senior engineer, Mild-level engineer, Junior engineer, Tech lead 등. 누군가는 회사가 마침내 체계를 잡아가는 것 같다며 좋아했지만 나는 또다시 직급이라는 틀 안에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이 유쾌하지 않았다.


그 와중 누군가는 테크리더로 승진을 하고 다른 누군가는 그러지 못했다. 자신 아닌 누군가의 승진이 불만스러웠던 몇몇 이들은 그들을 향해 쑥덕거렸는데, ‘회사에 오래 다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principle engineer가 된 거다’, ‘전에 있던 스타트업 회사에서 tech lead를 해봤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tech lead가 된 거다’ 등 뒤에서 말이 오갔다.


동료들과 기술 회의를 할 때면 사람들은 자연스레 테크리드의 의견을 따랐다. 테크리드는 기술을 리딩하는 사람이고 다른 팀과의 회의도 많다 보니 일반 시니어 엔지니어보다 회사 일 전반에 더 넓은 콘텍스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시니어 엔지니어들은 사이드 프로젝트를 리딩하는 것 외에는 대부분 테크리더의 지휘 아래 자신이 맡은 바 일을 하는 데에만 집중하는 형식이 되어갔다.

그리고 어느 날 ‘테크리더가 결정하겠지, 그 사람들이 더 똑똑하니깐.... ’ 하고 생각하며 일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다른 건 둘째치고 나는 또다시 승진이라는 걸 생각하며 일을 해야 한다는 게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물론 능력이 된다면 자연스레 승진을 할 수 있었겠지만 - 이곳에서는 사내 정치질을 해야 승진할 수 있다는 스트레스는 없었다 - 그러려면 그 능력을 증명해야 했고 증명을 위해서는 더 많은 일을, 더 많은 책임감을 가져야만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게는 더 이상 그런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올해 초에는 Engineering manager가 내게 테크리드를 목표로 일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 물었다. 나는 이미 2023년도에 그만 둘 계획을 하고 있었기에 ‘생각해 볼게 ‘라고 얼렁뚱땅 대답하고 넘겨버렸다. 회사를 그만둔다는 걸 안 리크루터와 면담을 가졌는데, 그녀는 내게 만약 승진을 했더라면 그만두지 않았을 거냐고 물었다. 나는 식겁하며 이미 지금 일도 너무 버거워서 더 높은 직급이 되었을 때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는 건 상상이 가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나도 안다. 승진을 하면 최소 10% 이상의 연봉이 인상이 있었을 거고 조금 더 경제적으로 윤택해졌을 거라고. 하지만 분명 나 자신은 시들어 갔을 거다.

하늘 꼭대기로 승~진!


한 번은 회사에서 내부 meet up을 연 적이 있다. 개발자들은 흥미로운 기술을 공유했고,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업무방식에 대한 발표들과 더불어 career ladder라는 새로운 직급 체계를 발표했다.

career ladder의 목표는, career ladder라는 기준표를 보고 자신이 지금 어느 단계에 있는지 다음 단계로 가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 수 있는 표였다..


이 표에는 기술 능력, 커뮤니케이션 능력, 프로젝트 리딩 능력 등 여러 기준이 나열되어 있고, 각 기준에 해당되는 레벨의 정도에 따라 다음 ladder로 올라가기 위해 어떤 능력이 필요한지 알 수 있었다. 이 표를 만든 다른 개발자 동료들의 노고에 고마운 마음이 들긴 했지만, ‘나를 왜 이 표에 집어넣어야 하지?’,  ‘왜 항상 다음 단계의 계단이라는 목표를 정해야 하는 거지?’라는 반발심이 들었다.


누군가에게는 분명 이 표가 꽤나 유용했을 거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직급이라는 체계가 회사에 생겨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던 데다 개인적으로 어떤 career path를 갖고 살아가야 할지도 모르겠는 이 마당에 이 표가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평소 같았으면 아무 질문도 안 했을 텐데 앞으로의 커리어가 깜깜해 막막했던 나는 발표가 끝나고 질문 하나를 던졌다.


“나는 내가 내 커리어에서 어떤 길로 가야 할지 길을 잃었다. 다음 단계로 올라가는 걸 계획하기보다는 내가 어떤 종류의 엔지니어가 되어야 할지, 아니면 꼭 엔지니어가 아니더라도 내가 어떤 다른 career path를 취해야 할지 그 길을 찾고 싶다.”

.

하마터면 말하다가 눈물을 터뜨릴 뻔했는데 그랬으면 정말 창피할 뻔했다.


나는 몇 년 동안 어떤 직급이 되고야 말겠다는 목표가 없었을 뿐 아니라 일에 전반적인 목표를 상실했다. O 회사에 처음 입사했을 때는 기존 시스템을 하루빨리 이해해야겠다는 일시적 목표가 있었지만 그걸 달성한 이후에는 텅 빈 상태였다.


직업이 있어서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은 언제나 감사했다, 하지만 텅 빈 마음으로 책임감 하나만으로 일해야 하는 매일의 시간은 눈의 빛을 조금씩 앗아갔다.




승진 (昇進). 지위가 오르고 나아가다는 뜻이라는데 나는 지위가 오르고 나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리고 이 마음이 없다고 해서 불행하지 않다. 오히려 편안하고 내게 주어진 것들에 감사함을 느낀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던 다른 팀 개발자 친구 B는 테크리드 승진을 권유받았지만 개발에 더 집중하고 싶고 더 많은 책임감은 갖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제안을 거절했다.


하지만 나는 승진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주위의 기대감과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었다.

‘이 친구는 저 친구보다 더 오래 회사에 다녔는데 아직 승진도 못하고 그대로야?’

‘네가 쟤보다 일한 연차도 적은데 쟤는 벌써 테크리드를 하네? 매니저한테 승진을 시켜달라고 말해보는 게 어때?’


남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마이웨이를 고수할 수 있었더라면. 나는 더 오래 회사를 다닐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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