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왔습니다만
약 2년 6개월 다녔던 베를린의 한 회사는 스포츠 신발 의류 회사였다. 신발 만드는 일을 한 건 아니고 회사 e-commerce 플랫폼을 구축하는 일 중 하나를 했는데, 하필이면 운 나쁘게도 회사가 가장 바쁠 때 입사를 하고 말았다. 입사 후 팀에 도움 하나 안 되는 시니어 엔지니어로 낙인찍힐까 봐 - 나는 자발적 눈치충이다 - 이 일 저 일 도우려 고군분투했던 기억이 있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왜 굳이 스스로를 그렇게도 괴롭혔나 싶다.
한 번도 경험이 없던 e-commerce 분야에서 일을 해보게 된다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이직한 회사 동료들은 내가 만났던 팀원들 중 가장 똑똑하고 겸손하고 젠틀한 멋진 사람들이었다. 이 회사를 선택했던 이유 중 하나도 인터뷰를 함께 했던 사람들이 자상하고 좋아 보여서 - 총 5단계의 인터뷰를 거쳤는데 매 단계마다 만난 사람들 모두가 좋아 보였다 - 다른 회사가 아닌 이 회사를 선택했었다. 지난 10 년간 일하며 얻는 교훈이 있다면 나한테는 하는 일보다 같이 일 하는 사람이 어떠냐가 더 중요하다는 거다.
그렇게 입사를 했고 일을 했다. 처음 몇 달은 새로운 분야에 이전에 다뤄보지 못했던 기술들이 있어서 어떻게든 하루빨리 적응을 하려고 스스로를 몰아세우며 일을 했던 기억이 있다. 이것 하나 모르냐고 무시받기 싫어서 - 그 누구도 그런 지적할 사람들이 아니었지만 -, 이래서 여자 개발자는 안돼 라는 선입견을 사람들에게 심을까 봐 더 열심히 했던 것 같다.
사무실에는 다양한 나라의 개발자들이 있었는데 - 물론 마케터 같은 다른 직종의 사람들도 있다 - 터키, 시리아, 브라질, 우크라이나, 보스니아, 파키스탄, 인도, 인도네시아, 나이지리아, 포르투갈, 아르헨티나 등, 그중에서도 터키와 파키스탄, 인도와 나이지리아 출신 개발자들이 많았던 기억이 있다.
그중 나는 회사에서 단 하나뿐인 한국 개발자였다. 팀에는 하나뿐인 여자 개발자였고 말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입사 당시 독일 지점 개발팀의 여자는 나 하나였던 것 같다. 다행히 지금은 좀 더 많아졌지만, 대부분의 여자 엔지니어는 주니어나 미드레벨 직책이 많고 그나마 조금 있던 시니어 여성 엔지니어들은 그만두거나 개발자가 아닌 다른 직책으로 옮겼다.
한 번은 인사팀에 - 사내에서는 talent team이라고 불렸다 - 두 가지 질문을 한 적이 있다.
Q1. 왜 한국인 개발자는 뽑지 않나요?
인사팀 담당자는 얼버무리며 뽑고 싶은데 지원자가 없다고 했다. 맙소사, 베를린에 한국인 개발자가 얼마나 많은데. 내 생각에 이 회사는 그저 싼 나라에서 개발자들을 relocation 비용을 대주는 대신 저임금으로 고용하려는 전략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 그 나라 개발자들은 독일 물가 및 연봉 실정이 어떤지 모르기 때문에, 저임금으로도 ok 하고 오는 걸지도 모를 일이다 -. 그에 반해 한국인은 급여 수준이 상대적으로 높을 거고 - 부르는 연봉협상 액수가 다를 테니 - 그래서 한국인 개발자는 리크루터들의 타깃이 되지 못했던 것 아닌가 싶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뽑혔냐고? 나는 우선 베를린에 살고 있었고, 그 당시 회사 개발 부서 규모가 많이 크지 않아서 - 리크루터도 많지 않았다 - 별생각 없이 연봉 수준 맞춰주며 뽑아줬던 것 같다. 어쩌면 여자 시니어 개발자라는 게 플러스 요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디서 들었는지는 기억 안 나지만 유럽 내 회사에서는 사내 남녀 성비 균형을 어느 정도 맞춰야 한다고 들었다.
Q2. 여자 시니어 개발자나 테크리드 등을 왜 recurting 하지 않는 거죠?
독일 내에서 경력 있는 여자 개발자, 특히 백앤드 개발자 찾기가 정말 어렵다고 했다 - 왜 어려운 걸까? -. 게다가 다른 나라에서 relocation을 해오려고 하면 시니어 직책의 여자 개발자 대부분은 그 나이대 즈음이면 남편과 아이가 있기 마련인데, 그 때문에 relocation을 거절한다고 한다.
이 회사에서 일하며 여성 시니어 개발자 혹은 principle 엔지니어 혹은 엔지니어링 매니저가 사내에 많지 않았어서 - 혹은 없어서 - 내가 직접적 피해를 입었던 적은 없었다. 만약에 그런 일이 있었다면 당장에 조용히 신고를 하고 회사를 그만두었을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내가 이 질문을 했던 이유는 회의 시간에 대부분 의견을 내놓는 직책은 시니어 이상 레벨의 엔지니어들이다 보니, 남자들이 주도하는 회의가 많은 것들도 불편하고, 회의시간에 대부분 남자들만 말하고 여자들은 듣고 있는 게 왠지 모르게 불편하게 느껴졌다.
2022년에는 회사 직원 누군가가 외부에 공개할 회사 소개 동영상을 찍는다며 내게 출현을 부탁했다. 굳이 다른 개발자들을 두고 나를?
내가 느끼는 그들의 의도야 너무나도 뻔했다. "우리 회사에는 아시아 출신 여자 개발자가 일을 해요. Multi culture를 지향하죠!".
회사가 너무 괘씸해서 거절을 하고 싶었지만 아니요라고 말할 용기가 없었다. 결국 나는 회사 옷을 입고 회사 신발을 신고 가짜로 프로그래밍을 하는 연기를 하며 회사 소개 동영상에 나오게 되었다.
회사 동료들은 내게 슈퍼스타라며 놀리곤 했는데 나는 그럴 때마다 "회사 너무 못되지 않았어? 내가 단지 아시아 출신 여자 개발자라서 그런거잖아!"라고 대답했다 - 동료들의 어쩔 줄 몰라하던 얼굴이 생각난다 -.
그리고 몇 달 전에는 히잡을 쓴 무슬림 여성 개발자가 주니어로 이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는데 (파키스탄에서 relocation 함), 어쩌면 다음 영상에서는 그 엔지니어가 곧 나를 대체할 타깃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이 회사를 더욱이 다녀야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하나씩 찾아가고 있던 걸지도 모른다. 입사하고 일년도 채 되지 않아 이 회사에 염증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우선 바쁜 일로 인해 한 차례 번아웃이 있었고, 개발자들은 값싼 청소부처럼 대하는 몇몇의 다른 부서 사람들이 싫다며 떠난 동료의 말도 계속해서 머리에 맴돌았다 - 일부 사실이기도 했다 -. 다른 팀에서 만든 시스템 업데이트나 버그로 인해 주문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을 때면, 재촉하는 비즈니스 부서 쪽 사람들 때문에 이리저리 시달릴 때도 있었다 - 고용주가 아닌 내 입장에서는 고객이 주문 하나 빨리 받지 않는다고 세상이 멸망하지도 않는데 왜 이렇게 호들갑인가 하고 생각했다 -. 값 비싼 신발과 의류를 팔면서 싼 값으로 개발자들을 데려와 일 시키는 것도 꼴 보기 싫었고, multi culture라고 자신들을 포장하는 것도 불쾌했다.
아니면 나는 그저 불편충이었던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