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에 대하여
- 이번 글은 <미스터 션샤인>의 등장인물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하는 글입니다.
- 작은 스포일러도 원치 않는 분께서는 먼저 작품을 보고 읽어주세요! (26년 2월 14일 기준 넷플릭스에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특별연재 - 악당 열전 1: <미스터 션샤인>의 모리 타카시
<미스터 션샤인>을 본 지도 몇 년이 지난 지금은 인물들의 관계가 희미하리만치 기억에서 멀어져, 여성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고애신의 이야기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고, 구동매도 일본식 복장을 하고 칼을 휘두르는 사연있는 깡패 정도로밖에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유튜브를 보다 보면 가끔씩 이 드라마의 멋진 장면들을 잘라 놓은 클립들을 마주치는데, 매번 '저런 멋있는 장면도 있었지' 하고 놀란다.
그러나 다른 대사와 장면들이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 갈 때도, 모리 타카시(김남희 분)의 대사가 준 강렬함만큼은 잊혀지지 않아, 이제 나에게 있어서는 '모리 타카시의 대사'가 <미스터 션샤인>을 대표하는 특색이 되어버렸다.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는, 그의 어눌한 한국어 발음이 잘 느껴지도록 '능숙하게' 연기한 대사로, "내 식민지, 조선에 올 날을 고대하며."이다. 그가 미국에서 친분을 만든 유진(이병헌 분)과 조선에서 재회하게 된다. 두 사람이 말을 탄 채로 적대적인 인사말을 나눈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에게 모리 타카시는 식민지를 운운하며 한국말을 건넨다.
"내가 왜 용오가 안놀었는지 알아? 난 그때 용오 대신 쵸손 마루룰 배웠거든. 내 싱민지, 쵸손에 오룰나룰 고대하며."
- 내가 왜 영어가 안 늘었는지 알아? 난 그때 영어 대신 조선 말을 배웠거든. 내 식민지, 조선에 올 날을 고대하며.
한국어 모국어 구사자라면 누구나 그의 발음이 어눌하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낮은 음성으로 한국어를 배우게 된 경위와 야욕을 전달하는 그의 말에는 조금의 우스꽝스러움도 없으며, 오히려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발음을 어색하게 여기고 있다는 기색은 조금도 없다. 그는 사실 그런 아쉬움을 전혀 느끼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 나라를 식민지로 착취하려고 찾아온 사람이 기본적 소통 이상의 유창함을 가질 필요까지는 없는 까닭에서다. 우리는 우리말이 유창한 외국인을 반갑고 미더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다른 나라의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려는 노력에는 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려는 노력이 포함됨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해당 대사는 어눌한 발음의 한국어를 구사하면서도 그것에 아무런 아쉬움도 없는 이 침략자의 캐릭터를 이해하는 데 좋은 힌트가 된다.
모리 타카시는 외국인이다. 모리 타카시는 외국인인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한국말 진짜 잘하네요', '한국인 같네요' 같은 칭찬을 들어서 득 될 것도 없다고 생각할 것이고 애초에 칭찬도 아닐 것이다. 모리 타카시에게 있어 조선은 언제까지고 타지이다. 그가 목표로 상상하는 조선의 최종적인 풍경은 '잘 돌아가는 식민지'다. 그런 태도 속에서 그의 대사는 조선이 타지임을, 일본 제국과는 구별되는 땅임을, 그리고 이 바다 건너의 땅을 제국주의적 세계관의 선택받은 수혜자로서 기꺼이 착취할 참임을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는 대사로 잘 들어맞는다. 대사는 조사와 어미를 포함한 모든 단어가 정확한 쓰임으로 꿰어져 있어, 통사적으로 결점이 없는 문장이다. 한국어는 정확하게 구사되어, 모리 타카시의 의도를 전달하려는 목표를 충분히 만족시키고 있다. 문법을 잘 지키는 정도로는 한국어를 잘하지만 발음은 딱히 상관이 없다. 이런 전체적인 인상이 이 한 대사를 통해 단번에 느껴진다.
같은 맥락에서 인상적인 대사를 하나 더 꼽아볼 수 있다. 그가 쿠도 히나라는 호텔 운영자에게 한 대사다.
"쵸소노 오걍이 소낀 일보노군. 모리 타카시 대좌요. 칼끝이 가차옵돈데."
- 조선어 억양이 섞인 일본어군. 모리 타카시 대좌요. 칼끝이 가차없던데.
쿠도 히나는 일본인 손님을 일본어로 상대하는 데도 능숙하고 일본인을 상대로 한 말다툼도 일본어로 해서 지지 않을 만큼 유창함을 뽐낸다. 그러나 모리 타카시는 그녀의 유창한 일본어를 듣고도 가장 먼저 어색한 억양을 지적했다. 그에게 한국어는 한국인에게 말을 전달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쓰임이 다하는 언어인 반면, 일본어는 어떤 억양을 가진 일본어인지에 따라서 분별이 되는 언어인 것이다. 이것이 한국어와 일본어에 대한 모리 대좌의 태도를 보여 주면서 그의 캐릭터를 부각시킨다. 그에게는 일본어는 어엿한 언어다. 그러나 한국어는, 전달해야 할 의도를 전달하는 것만으로 이미 충분한 언어로 전락해, 그의 마음속에 있는 수화물을 밖으로 전달하기 위한 컨베이어 벨트에 불과하게 된 것이다. 연기도 대사도 적재적소로구나 생각하면서 김남희 배우의 카리스마 있는 연기와 매력적인 중저음을 다시 떠올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