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아스 독서에 도전하는 이를 위한 훈수

<<일리아스>> 독서기 1편

by 오윤오

- 이번 글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아카넷 판, 이준석 역)를 읽고 적은 후기입니다.

- 객관적인 기준보다는 개인적 취향과 인상을 토대로 편하게 감상을 남겨보았습니다.

- 내용을 가리지 않고 언급하고 있어 열람에 주의를 요합니다. 고전 작품이라도 스포일러를 원치 않는 분께서는 먼저 작품을 보고 읽어주세요! (26년 2월 22일 기준 밀리의서재에서 천병희 역본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스포일러 방지턱.




들어가며,


최근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가 새로운 번역자를 만나 우리말로 번역되었다. 나는 오래전 천병희 번역의 호메로스를 읽은바 있었는데, 새번역이 나온 김에 다시 한 번 일리아스에 도전해보았다.



새로 산 아카넷 판 <<일리아스>>를 들어올리자 지축이 뒤흔들렸다.

책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양말에 구멍이 나고 거실화가 터져버렸다.

겨우 몸을 추슬러 오래된 책상에 <<일리아스>>를 올려놓자,

굉음이 울림과 함께 책상이 고통스럽게 울부짖으며 폭싹 주저앉으니,

이는 마치 신과 같은 파트로클로스가 탄식하며 쓰러질 때

아킬레우스에게 빌려 입은 무장이 땅에 떨어지며 굉음을 내는 것과 같았다.

집에 새로 책상을 들여와 책을 올려놓을 때마다,

책상은 번번이 굉음을 울리며 무너졌다.

이에 나는 책을 읽기 위해 아테네 신께 기도하고 제물을 바쳤다.

갓 잡아 신선한 소고기를 구워 한접시 바칠 테니

무사히 책을 읽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한 뒤에,

집 앞에 있는 정육점에서 사태가 실하게 붙은 소고기를 구매해

비계로 그것을 칭칭 감아 굽고, 기도대로 제사를 지내고 난 후에야

집안의 가구를 부수지 않고 독서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일리아스>>의 느낌을 한번 흉내내보았다)



아카넷 판을 기준으로, <<일리아스>>의 분량은 해설을 제외하고도 700페이지를 넘는다. 이 책만 있으면 종이비행기를 사백 번 이상 날릴 수 있다. 육안으로만 봐도 인간의 휴대를 거부하는 육중한 무게감이 느껴진다. 혹시라도 이 거대한 책을 몸쪽으로 떨어뜨렸다가는 발등의 무사함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흉악하다. 고전에 걸맞게끔 빳빳하게 양장된 표지가 이 흉기의 위력을 배가시킨다.


<<일리아스>>를 각각 다른 번역으로 두 차례 읽고 나서 나는 거의 영웅적인 보람을 느꼈다. 이 보람을 오래오래 간직할 요량으로, 이 두꺼운 책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었거나, 호메로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된 이들에게 나름의 팁을 전수하는 글을 남기고자 한다. 다만 두 번의 정독만으로 <<일리아스>>에 통달할 수는 없는 일이니, 내 조언들이 틀림없는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다. 내 훈수를 걸러듣는, 혹은 흘려듣는 지혜가 당신에겐 있다. <<오뒷세이아>>의 텔레마코스에게 멘토르가 있었던 것처럼, 나도 이 책에 관심을 갖고 있는 누군가에게 멘토르의 사돈의 팔촌 정도는 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훈수 1. 책과 노트, 커피를 올려둘 수 있는 넉넉한 책상과 편안한 의자를 준비하라. 혹은 전자책을 읽어라


이 책은 길고, 등장인물이 꽤 많다. 또한 등장인물은 호칭이 하나가 아니다. 이야기의 흐름을 놓지지 않고 따라가기 위해서는, 장비빨을 세울 필요가 있다. 책과 메모를 동시에 펼쳐놓을 수 있을 정도의 자리가 있는 게 좋다. 마음에 드는 펜을 꺼내 독서의 자취를 남겨보자. 독서의 여정이 헷갈릴 때마다 남겨둔 자취를 돌아보자. 초반부만 그렇게 해도 큰 도움이 된다. 또한 이 시의 진행에는 현대의 독자에게 불친절할 수 있는 요소가 있다. 예컨대 이 시는 한 인물의 말을 전하는 전령이 그 말을 그대로 반복한다. 패러프레이징이 없다. 이는 살짝 지루함을 유발할 수 있는 요소가 된다. 중요한 전투나 장면에 돌입하기에 앞서, 몇 페이지에 걸쳐 등장인물들을 열거하면서 그들의 간략한 족보와 업적을 일일이 언급하기도 한다. 독자의 참을성을 시험하는 또다른 특징이다. 이같은 순간에 자기가 좋아하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면, 졸음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


훈수 2. 신입생이나 신입사원, 혹은 갓 자대에 배치된 이등병이 되었다고 생각하라


신입생, 신입사원, 이등병의 주요 과제 중 하나는, 자기 주변 사람의 이름을 빨리 외우는 것이다. 주변 사람의 이름을 빨리 외우지 않으면, "윤오야, 이거 철수씨한테 갔다 줘."라는 초보적인 부탁을 받는 것만으로도 크나큰 혼돈을 초래할 수 있다. <<일리아스>>도 사정이 비슷하다. 앞에서 언급했듯 이 시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며 호칭도 때마다 다르다. 이름이 비슷한 이들도 있고, 심지어 동명이인도 있다. 초장에 전부 알아두지 않으면, 누가 누구에게 얘기하는 것인지 갈피를 잡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래서 적어도 초반부정도는 훈수 1에서 말한 것처럼 옆에 노트를 펼쳐놓고 자주 눈에 띄는 이들의 이름을 적어두거나, 본문 내용을 검색할 수 있는 전자책을 활용해 <<일리아스>> 사회에 친숙해질 필요가 있다.


훈수 2의 1. 아버지 이름까지는 외워 둬라

예시 1: 주요 가계도_아킬레우스

시인이 한 영웅을 호명할 때, 그 이름을 그대로 부르는 일보다 'X의 아들'로 부르는 일이 더 많은 것 같다. 심지어 시인은 제우스조차도 '크로노스의 아들', '크로노스의 두루 살피는 아들'등으로 부른다. 따라서 독자는 누가 누구의 아들인지 표시해둔 간략한 가계도를 만들어, 익숙해 질 때까지 옆에 두고 독서하는 것이 좋다.









훈수 2의 2. 가장 먼저 아트레우스와 프리아모스의 가계에 익숙해져라


이 시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름은, 생각건대 아트레우스와 프리아모스다. 그리스군의 총사령관 격인 아가멤논과, 이 전쟁의 원인이 된 헬레네의 원래 남편인 메넬라오스는 모두 '아트레우스의 아들'이라고 불린다. 또한 이 시 속에서 트로이아군측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헥토르, 전쟁의 원인을 제공한 파리스는 '프리아모스의 아들'이라고 불린다. 그래서 다른 인물들은 몰라도 최소한 이 두 이름을 중심으로 먼저 가계를 외우면 독서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예시 2: 주요 가계도_아트레우스 일가와 프리아모스 일가.
예시 3: 주요 가계도_프리아모스 일가


훈수 3. 지나친 외경심은 금물


이 시 속의 주요 인물들은 모두, 신조차도, 인간적인 결점을 가지고 있다. 이 시의 발단이 되는 사건도, 이 시의 배경이 되는 전쟁의 신화적 이야기도, 인물 개인의 결점과 잘못된 선택에서 비롯된다. 이 시를 예컨대 아킬레우스라는 한 인간의 '장엄한 대서사시'로만 받아들여 읽으면, 시를 지나치게 무겁게 떠안는 것이 될 수 있다. 인간 아킬레우스, 필멸자 아킬레우스, '자기 여자를 빼앗겨 노여워하는 아킬레우스'의 모습을 간과하면 이 시는 과하게 무거워질 것이다. 따라서 등장인물을 대할 때 지나친 외경보다는 인간으로서의 적절한 공감이 독서를 한결 수월하고 즐겁게 해줄 수 있다. 인물이 겪는 상황을 자신이 겪은 경험에 비추어보는 것도 좋은 독서 방법이 될 것이다.


훈수 4. 시인이 애용하는 양식에 익숙해져라


시인은 정해진 양식을 곳곳에서 반복적으로 활용한다. 영웅이 무장을 착용하는 장면, 영웅들이 신에게 제물을 바치며 제사를 지내는 장면, 결투를 진행하는 장면 등에서 시인은 같거나 비슷한 표현을 반복적으로 활용한다. 이를 규격화된 양식으로 받아들여 읽으면 독서가 한결 수월해지리라 생각된다. 이중 결투 양식은 5번 훈수에서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훈수 5. 전쟁 방식에 익숙해져라


전쟁터를 향한 이 시의 시선은 영웅들에게로 집중되어 있다. 영웅들은 일대일 결투(속된 말로 일기토, 대장전, 다이다이, 맞짱 등등으로 표현할 수 있다)로 전쟁을 수행한다. 이 시에는 '병사'들의 집단적 싸움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따라서 이 시가 묘사하는 전쟁은 그리스군 영웅과 트로이아군 영웅이 벌이는 일대일 결투의 연쇄로 이해될 수 있다. 뛰어난 영웅이 적 영웅을 차례차례 쓰러뜨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예외적으로 간혹 빗나간 창이 다른 인물을 맞혀 쓰러뜨릴 때도 있다.


전투는 기본적으로 순서가 정해져 있다. (훈수 4에서 말한 결투 양식이다. 마치 야구처럼 공수를 교대해 가며 싸운다.)

1. 먼저 한쪽에서 창을 던짐.

2. 창이 상대를 쓰러뜨리지 못하면, 상대쪽에서 창을 던짐.

3. 그래도 결판이 나지 않으면, 달려들어 근접전을 벌임.


또한 이 시는 결투 장면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영웅들의 최후를 가감없이 드러내는 편이라 할 수 있다. 영웅들은 몸의 갖가지 부위를, 갖가지 방식으로 다쳐서, 갖가지 방식으로 쓰러진다. 한 번의 결투가 있을 때마다 한 장면의 최후가 묘사된다. 시인은 영웅의 최후를 노래하는 데 공을 들였고, 노래가 청자(독자)에게 음미할 만한 것이길 바랐을 것이라고 나는 믿으며, 실제로 음미할 만하다. 그러므로 결투를 노래하는 시로서 <<일리아스>>를 음미할 수 있다면, 이 시에 한결 더 몰입하기 수월할 것이다.


마치며,

도전정신을 발휘해야 하는 책이지만, 새로이 번역된 글을 읽는 것이 나에게는 즐거운 일이었다.

모쪼록 이 글이 <<일리아스>>의 독서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일리아스>> 독서기는 2편으로 이어질 예정입니다.
수,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