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아스>> 독서기 2편 - 1
- 이번 글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아카넷 판, 이준석 역)를 읽고 적은 후기입니다.
- 객관적인 기준보다는 개인적 취향과 인상을 토대로 편하게 감상을 남겨보았습니다.
- 내용을 가리지 않고 언급하고 있어 열람에 주의를 요합니다. 고전 작품이라도 스포일러를 원치 않는 분께서는 먼저 작품을 보고 읽어주세요! (26년 2월 28일 기준 밀리의서재에서 천병희 역본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갈등(葛藤)이라는 표현에 주목하자. 'A와 B가 갈등하다'라는 진술은, 일차적으로 둘 사이의 대립을 지적한다. 그런데 갈등이 葛과 藤의 합성어임을 축자적으로 고려할 때, 'A와 B가 갈등하다'라는 진술은 A와 B가 칡과 등나무처럼 '얽혀 있는' 방식으로 불화하고 있음을 시각적으로 조명한다. 얽혀 있는 채로 불화하여, 한 쪽이 존재하는 방식을 해명함에 있어 다른 한 쪽을 무시할 수 없으므로, 갈등은 불화가 공존의 한 방식으로 유지되고 있음의 역설을 지적하고 있다.
나는 갈등이 문학의 용어로 사용된 경위에 이 역설성에 대한 고려가 있었으리라고 추정한다. 갈등은 불화임이면서 합(合)임이다. 갈과 등은 불화하는데도 서로를 의지해 얽혀 있으며, 이인삼각으로 동행하며, 메기고 받아야 하여 외면이란 있을 수 없으므로, 서로가 서로에게 묵묵부답할 수도 없다. 갈등은 대화임이다.
나는 <<일리아스>>를 갈등시(葛藤詩)라고 부르고자 한다. 이 시가 아킬레우스의 '노여움'으로 시작한다는 사실에서, 나는 갈등의 역설성을 노래하겠다는 시인의 결심을 감지한다. 전쟁시임에도, 시인은 전쟁의 시작을 좋이 노래하지 않았다. 그리스군과 트로이아군의 이분법적 대치로 시의 포문을 여는 대신, 그리스의 두 영웅 사이에서 벌어진 내홍으로 시를 시작했다. 그리스군이 에게 해를 넘어와서 트로이아군과 전투를 벌이기 시작한 뒤다. 승리를 거둔 끝에 영웅들이 전리품이며 사로잡은 여인들을 나눠 가졌다. 그런데 그리스군의 총사령관 아가멤논이 취한 여인은 아폴론을 따르는 신관의 딸이었으니, 신관이 딸을 되찾고자 막대한 몸값을 들고 찾아와 애원했으나 아가멤논은 딸을 돌려주지 않았고, 이것이 결국 아폴론의 심기를 건드려 그리스군에 역병을 일으키게 만든다. 딸을 돌려주고 아폴론을 달래야 한다는 주장이 아킬레우스를 위시해 제기되자, 아가멤논은 이에 마지못해 따르면서도 그 대신으로 아킬레우스가 취한 여자를 빼앗아간다. 이 처사에 노한 아킬레우스가 자기 휘하의 군사들과 함께 파업에 돌입하는 장면으로 시가 시작된다. 일기당천의 영웅이 잠적하기 무섭게 트로이아군의 역공에 속절없이 밀려나는 그리스군의 모습이 이어서 그려진다.
<<일리아스>>는 전쟁시지만, 전쟁의 발단도 결말도 노래하지 않고, 오히려 전쟁불참시로 시작하고 있다. 승리와 패배, 그리스와 트로이아라는 이분법적 대치는 이 노래의 노랫거리가 아니다. 그러면 무엇이 노래할 만한 것이었는가? 대치하는 존재로서의 인간보다는 갈등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시의 복을 받았다.
시는 아킬레우스의 분노 혹은 노여움을 노래하라는 주문을 무사(뮤즈) 여신들에게 비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아카넷 판에서 번역을 "아킬레우스의 분노" 대신에 "아킬레우스의 노여움"으로 새겼음에 주목해 봄 직하다. 분노와 노여움은 일상성의 측면에서 차이가 있다. 분노는 일상의 대화에서 좀체 사용되지 않는 문어적인 표현이지만, 노여움은 웃어른의 감정을 가리키는 말로 일상에서 곧잘 사용될 수 있어 보다 구어적인 표현이다. 분노는 그것이 가리키는 감정의 거룩한 구석을 긍정하는 표현인 성싶다. 분노는 일상으로부터 다소간 격리된 단어로, '진노'와 뉘앙스가 비슷하다. 반면 '노여움'은 일상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말인 까닭에, '화'라는 일상어나 '열받음'이라는 속어로 대치할 여지가 있다. 노여움이라는 역어를 통해, 유능한 영웅이 부당한 대우를 받아 느꼈을 만한 개인적인 감정에 주목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에 비유해 말하자면 아킬레우스는 직장에서 상사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아 열이 오른 직장인의 모습으로 묘사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사로움을 초월한 거룩한 진노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겪게 된 부당한 사건에 의한 노여움으로부터 시가 시작된다. 이 관점에서 보면 동료들이 수도 없이 죽어나가는 전황을 방관하는 아킬레우스의 고집스러운 모습은 아량이 없어 아쉽게 느껴진다. 분노가 아니라 노여움에 의한 것이기에 그의 선택은 '쪼잔하다'라는 비난과 제법 잘 어울린다. 쪼잔한 인간이 되게 만든 일차적 원인은 여자를 빼앗아간 아가멤논에게 있다. 그러나 그리스군의 입장으로만 생각하면, 아킬레우스 없이 전쟁을 이어나가는 동료들은 배 안에 틀어박힌 그를 원망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쪼잔하다는 표현은 아킬레우스가 겪은 억울한 사정을 폄훼하면서, 죽어가는 동료의 목숨을 구하는 게 먼저라는 희생정신의 정당성을 다소간 강요한다(쪼잔하다는 표현은 일단 발음부터가 쪼잔한 이의 쪼잔성을 확성하는 효과가 있다. 쪼잔함이라는 한국말의 교묘함이 흥미롭다). 쪼잔하다는 표현으로써 원인의 원인다움은 폄훼되며, 쪼잔한 처사에 대한 공중의 평가를 상기시킨다. 노여움이라는 표현으로 포착되는 아킬레우스의 감정은, 역설적으로 그가 너무나 뛰어난 전사인 까닭에 쪼잔함이라는 비판에 걸려든다. 절박한 그리스인들은 이 뛰어난 전사가 소박한 감정의 일상 속에서 안주하는 것을 내버려둘 수 없어서다. 결국 그는 그리스 영웅이라는 정체성에 포박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얽힘이다. 갈등이다. 그렇게 시의 도입부는 개인적 감정의 기폭이 집단적 가치와 불화하는 순간을 표현하고 있는 것인데, 그것이 아킬레우스라는 뛰어난 영웅의 이마에서 교차하고 있어서, 갈등의 역설성을 선명하게 밝히고 있다.
본 글은 갈등의 시 일리아스 2 (<<일리아스>> 독서기 2편 - 2) 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