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의 시 일리아스 2
- 갈등의 시 일리아스 1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아카넷 판, 이준석 역)를 읽고 적은 후기입니다.
- 객관적인 기준보다는 개인적 취향과 인상을 토대로 편하게 감상을 남겨보았습니다.
- 내용을 가리지 않고 언급하고 있어 열람에 주의를 요합니다. 고전 작품이라도 스포일러를 원치 않는 분께서는 먼저 작품을 보고 읽어주세요! (26년 3월 7일 기준 밀리의서재에서 천병희 역본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본 글은 갈등의 시 일리아스 1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일리아스는 갈등을 노래했다. 여기서 갈등은 단순히 대립함만을 뜻하는 표현이 아니고, 대립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채로 유지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일리아스가 노래하는 갈등은 '그리스 대 트로이아'의 흑백논리로 포착할 수 없는 사각지대를 비춘다. 도입부에서 노래하는 아킬레우스의 노여움은 트로이아인을 향한 게 아니라 같은 진영 사람, 그것도 가장 권위가 높은 사람(아가멤논)을 향한다. 그의 노여움은 복잡한 갈등의 시작을 알리는 것으로, 적을 무작정 해치우는 것으로는 말끔히 해소될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그래서 갈등이란 표현으로 지적되어야 하는 것이다.
갈등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아가멤논이 아킬레우스의 여자를 빼앗고, 이에 아킬레우스가 참전을 거부하는 파업으로 대응하면서 시작되었다. 파업에 동참하는 다른 장수는 없다. 자기 휘하의 군사만 데리고 파업에 돌입했다. 그가 거느린 함대의 규모는 50척이다. 주요 장수들이 아가멤논 100척, 메넬라오스 60척, 네스토르 90척, 이도메네우스 80척, 오뒷세우스 12척이다. 그외 많은 장수들도 상당수의 함대를 갖추고 있다. 숫자로만 따지면 아킬레우스가 없어도 전쟁이 수월하게 수행될 수 있을 듯싶다. 그러나 파업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지휘관 하나의 파업이 그리스군 전체에 치명적이었던 것은 그가 그리스의 최고급 전력이었기 때문이다. 전투에서 일당백이었기에 파업에서도 일당백이 될 수 있었다. 그가 없는 전장에서 수많은 그리스인 사상자가 발생했고 결과도 후퇴로 이어졌다. 그렇기에 잘못은 아가멤논이 먼저 했어도, 눈총은 점점 아킬레우스에게 쏟아진다. 여자를 강탈당한 영웅의 노여움과 죽어가는 그리스인을 긍휼하라는 집단적 규탄의 목소리가, 아킬레우스의 탁월성을 매개로 하나로 뒤엉켜 갈등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무자비한 전사 아킬레우스는 쟁의행위도 무자비하다. 그는 파업과 동시에 신을 향한 탄원도 진행했다. 탄원은 여신인 어머니 테티스에게 먼저 전달되었다. 그를 원망한 그리스군 입장에서 말하자면, 엄마한테 고자질을 했다. 테티스는 중요한 순간에 제우스를 도와준 적이 있어 올륌포스 내에서 입지가 큰 여신이다. 이런 거물 신이 엄마였기 때문에 고자질이 제우스의 귀에 직통으로 꽂히게 된다. 제우스는 그의 명예를 위해 올륌포스 친그리스파의 반대를 무릅쓰고까지 그리스군을 손봐주기로 마음먹게 된다.
파업과 탄원의 이중공세가 치명타로 들어갔다. 그리스군은 갖은 애를 써 보아도 전쟁의 열세를 타개하지 못하게 되었다. 아가멤논은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닫고 후회하면서 아킬레우스에게 사과하려고 결심한다. 아가멤논은 오뒷세우스와 아이아스를 전령으로 보내 화해의사를 표명하고, 막대한 양의 보상과 승전해 얻을 전리품을 제공하겠노라는 약속을 전한다. 그 규모는 책의 두세 페이지에 걸쳐 나열해야 할 만큼 막대해, 자신의 딸과 도시 일곱이 포함될 정도다. 그가 자신의 실수에 매긴 화해의 대가는 결코 적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아킬레우스의 대답은 '아니요'다.
그의 고집에 유능한 그리스 장수들이 실망하게 된다. 설득을 위해 찾아왔던 아이아스가 그를 질타한다. 참척의 고통을 안겨준 살인자에게 핏값을 받고 분노를 참으며 살아가는 아버지도 있음을 예로 들어 그를 비난한다. 눈부신 활약으로 아킬레우스의 빈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디오메데스는, 그에게 간청했던 것이 후회된다며 아가멤논을 두둔하기까지 한다. 결국 아킬레우스의 멈추지 않는 노여움은 저자세로 화해를 꾀한 아가멤논을 거부하면서 본디의 명분조차 힘을 잃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다만 그는 아이아스의 비난에 일말의 가책을 느꼈는지, 트로이아인들이 자기 진영 막사까지 쳐들어올 지경이 되면, 그때는 힘을 써 보겠노라는 식의 말을 뇌까린다.
말이 씨가 됐는지, 정말로 그리스인들은 패퇴를 거듭하다가 배를 세워둔 본진까지 전선이 밀려나게 된다. 탑을 쌓고, 참호를 파고, 적진에 잠입하는 등 갖은 노력으로 전쟁을 버텨 왔지만 결국 고향에서 끌고 온 배를 끼고 농성하는 처지까지 내몰렸다. 적장 헥토르는 그리스인의 함선을 불바다로 만들기로 결심한다. 거세게 저항해보지만, 마침내 배 한척이 불에 휩싸이고 만다. 텔라몬의 아들 아이아스의 활약으로 수성을 이어나가지 못했다면, 정말로 그리스군들은 그곳에서 뼈를 묻게 되었을 것이다. 본진이 공략당해 붕괴할 것처럼 전망되는 이 순간에도 아킬레우스는 여전히 파업 중이다. 보다 못한 파트로클로스가 그를 설득하기로 마음먹는다.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 휘하의 최측근이다. 줄곧 아킬레우스를 따라 파업에 동참하고 있으면서도, 그리스군을 치료해 주기도 하는 등 동료들의 상황을 신경쓰고 있었다. 동료들의 절규가 귀에 닿을 정도로 트로이아인들이 육박해온 시점에서, 결국 아킬레우스에게 참전을 권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눈물을 흘리며 아킬레우스에게 간청한다. 당신의 부모가 테티스와 펠레우스일 리가 없다는 식으로 부모 욕까지 해 가면서 아킬레우스를 다그친다.
"뛰어나다 못해 끔찍해져 버린 녀석"(<<일리아스>>, 아카넷 판, p.476)이라는 그의 질타는,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해 대단히 의미심장한 울림을 준다. 그의 뛰어남이, 그의 끔찍함과 관계 맺고 있음을 파트로클로스는 지적한 것이다. '뛰어나면서 끔찍한 인간'이 아니다. '뛰어나다못해 끔찍해져버린 인간'이다. 그는 그리스군의 대들보였으며, 한 번의 파업만으로 사상누각이 되어 흔들거리는 아군 앞에서, 몸을 뺀 대들보가 얼마나 뛰어나고 또 그래서 끔찍한지가 명명백백히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뛰어남 혹은 탁월성이란 무엇인지, 우리는 마침내 점검해 보게 된다. 홀로 뛰어난 전사가 될 수 있는가?
홀로 뛰어난 사냥꾼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홀로 뛰어난 전쟁군인은 될 수 없을 테다. 그것이 아킬레우스에게 매겨진 괴로움의 원인이라고, 나는 깨닫는다. 그것이 아킬레우스가 독존과 공존 사이에서 갈등하게 만드는 원인이다. 이어지는 아킬레우스의 독백이 인상적이다.
"아버지 제우스시여, 아테네, 그리고 아폴론이시여,
트로이아인들이 제아무리 많다 해도, 그들 중 아무도 죽음을 피할 자 없기를,
아르고스인들 중에서도 아무도 없기를 바라나이다! 그렇게 너와 나 단둘만
파멸에서 벗어나 트로이아의 신성한 장막을 풀어 헤칠 수 있기를!" (<<일리아스>>, 아카넷 판, p. 479)
전장의 모든 트로이아인과 그리스인이 죽기를, 그리고 오로지 사랑하는 전우와 둘만 살아남기를 바란다는 기도를,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의 앞에서 독백처럼 중얼거리고 있는 것인데, 두 사람만 생존하는 상황이 실로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가 뛰어난 전사로 남을 수 있을까? 생존자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승전의 주역이라 불리기는 어려울 것 같다. 결국 자신의 노여움과 그리스 영웅으로서의 명예를 함께 꽃피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아킬레우스가 마지막까지도 수긍하지 못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수긍하지 못한 대가는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이었다. 사랑하는 동료의 비난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기 진지가 침범당하지 않는 한 파업을 계속하겠다고 뱉어놓은 말을 번복할 수는 없겠다며, 아킬레우스는 당신 없이 출정하겠다는 파트로클로스의 청을 거절하지 않는다.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의 무장을 입고 출정한다. 그것을 입고 자기 행세를 해 보라고, 그러면 트로이아 군대가 공포에 빠지고 그리스인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대신에 싸움에 본격적으로 가담하는 일만큼은 피하라고 조언했지만, 결국 하나뿐인 전우는 헥토르의 손에 쓰러지고 말았다.
생각해 보면 아킬레우스의 타협안은 소득없는 미봉책이다. 아킬레우스가 직접 출정하지 않는 한 그리스인들은 전쟁을 승리로 끝낼 수 없다. 파트로클로스가 그리스인들을 적당히 돕다가 아킬레우스에게 돌아가면, 그리스인들은 다시 벼랑 끝까지 내몰리게 될 것이다. 결국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를 전쟁터에 내놓음으로써 갈등의 굴레를 소득없이 연장한 것에 불과하다. 막대한 빚을 진 인간이 자기 심장을 전당포에 맡길 수 있는가? 불가능하고 무의미한 일이다. 심장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서 불가능하며, 값을 치르고 심장을 회수하는 순간에 다시 빚쟁이가 될 운명이라는 점에서 무의미하다. 심장은 자기 존재의 조건이며, 가치에 있어 초월적이기에 저당으로 처분할 수도 없다. 심장을 저버리는 상환은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아킬레우스의 선택이 바로 이와 같아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존재를 전장에 담보로 맡기고 갈등을 연장한 것이다.
이 시는 뛰어난 시다. 뛰어난 시기 때문에 파트로클로스는 죽을 수밖에 없다. 그의 대리출정이 이 시에서 의미를 가지려면, 그가 살아서 아킬레우스에게 돌아가는 이야기는 있을 수 없다. 자기 심장을 맡겼다가 되찾는 일이 실질적으로는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은 것과 같듯이, 심장을 맡겼다가 잃어버리게 되어 선 채로 죽는 불상사가 있어야만 극은 극이 될 수 있듯이, 파트로클로스의 참전이 의미 없는 '마실'이 될 수는 없었다.
파트로클로스가 최후를 맞는 장면에서 한가지 사실이 밝혀진다. 아킬레우스와 헥토르가 갈등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대결구도'로 일리아스를 이해할 때 거기에는 갈등의 요소가 없다. 두 사람은 대치할 뿐이다. 오히려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에게 있어 그 누구보다도 '덜 갈등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헥토르와는 동료 그리스인들보다도 덜 갈등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서로에게 갈등 상대가 아니고, 갈등의 파국을 마무리짓는, 갈등의 집행자로 주어져 있다.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에게 선고된 갈등의 집행자로서 파트로클로스를 죽인 것이다.
파트로클로스를 죽이기 전까지, 아킬레우스에게 헥토르는 수많은 적들 중 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무력으로 따지면 그를 대적할 사람은 없으므로, 그 앞에 누가 맞서도 단번에 처단할 수 있다는 점에서 모든 적들이 동질하다. 그리고 시가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노래하는 후반부가 될 때까지 아킬레우스는 몸을 일으키지 않았으므로, 더더욱 그와 헥토르는 접점이 없다. 헥토르는 파트로클로스를 계획적으로 노린 게 아니다. 그는 트로이아 군의 우두머리라는 직분에 맞게 용감히 창을 겨눈 것이고, 그 자리에 파트로클로스가 있었을 뿐이다. 마치 사형수가 사형 집행인에게 목숨을 빼앗길 때, 사형수와 집행인이 직접적으로 연고 맺지 않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사형수는 사형당할 만한 일을 저질러 사형됐을 것이고, 집행인은 사형하라는 직분에 따라 사형했으니, 사형수의 사형됨이 사형집행인의 탓은 아닌 것처럼, 아킬레우스가 자기 심장을 분실한 것은 아킬레우스 본인의 갈등과 판단에서 촉발된 것이고, 헥토르는 집행인의 몫에 따라 그의 심장 파트로클로스를 거두어 간 것이다.
헥토르는 파트로클로스를 처단했을 뿐아니라, 그가 입고 있던 아킬레우스의 무장까지 거둬갔다. 이 시에서는 "무장이 굉음을 울리다"라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사용된다. 이 표현으로 무장의 육중함과 유구함을 전달하곤 한다. 시의 영웅들은 상대를 쓰러뜨리는 것 못지않게 상대의 무장을 취하는 데 집착한다. 전쟁통에서 무장을 수습하다가 위험에 처하기도 할 정도다. 그런데 치열한 전쟁터의 소음 속에서 실제로 무장이 '굉음'을 울릴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갑옷이든 방패든, 무장은 2m를 넘지 않았을 것이니, 땅에 떨어져도 '굉음'이랄만큼 눈길을 끄는 소리를 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즉, 굉음은 과장표현이다. 그 무장을 입은 영웅이 시 속에서 차지하는 무게를 구체화하기 위해 선택된 시어다.
그러므로, 파트로클로스의 무장이 굉음을 울림으로써, 헥토르에게 거둬짐으로써, 헥토르의 머리에 쓰임으로써, 아킬레우스에게 휘감긴 갈등의 파국적 결론이, 극적으로 그리고 시적으로 집행된다. 우리는 시 속에서 아킬레우스가 그 무장을 입고 싸우는 모습을 볼 수 없다. 이 쓰임의 부재에 이 시의 극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이 시에서 무장이 갖는 의미는 전사로서의 명예를 포함한다. 명예는 순전히 개인적으로 성취될 수 있는 가치가 아니다. 명예의 화룡점정에는 타인의 인정이 있다. 명예의 분배는 넓은 의미에서 정치적인 행위다. 한 사람의 성취를 집단적 차원에서 긍정하는 행위는, 긍정의 근거가 되는 가치에 대한 집단 차원의 이해가 공유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명예로워야 할 이에게 그에 맞는 명예를 확인시키는 행위는, 인간의 윤리관과 심미안을 검증하는 공적 행위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 최고의 장수로서의 명예보다는 여인을 빼앗긴 노여움을 더 시급한 것으로 판단해 파업을 계속한 아킬레우스의 쟁의행위도, 아가멤논과 사적인 차원에서 끝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명예로워질 수 있는 기회를 제안한 아가멤논의 화해를 거절하고 자신의 심장 파트로클로스가 건네는 회유마저 거절함으로써, 아킬레우스는 그리스인으로서 명예로울 수 있는 기회를 포기했다. 아킬레우스의 명예의 상징인 투구는, 결국 파트로클로스가 애써 착용해 몸을 가눠보려다가, 결국 헥토르에게로 넘어가고 말았다. 동료의 죽음에 출정을 결심한 아킬레우스가 입는 무장은, 엄마 신 테티스가 헤파이스토스에게 받아온 새 무장이다. 유구함이 결여된 무장이다. 실로 의미심장하며 아름다운 장면이라 할 만하다.
시 속에서 "빛나는 투구의 헥토르"라는 별명으로 자주 불리는 헥토르의 머리에 아킬레우스의 투구가 쓰이게 되는 이야기가 내게 지적 희열을 가져다준다. 불참의 아킬레우스와는 정반대로, 참전의 헥토르는 극의 시종일관 힘을 다해 싸우다 죽음을 맞았다. 그는 동생이 남의 여자를 데려오는 바람에 불러운 전쟁에서 선봉장으로 싸웠다. 그는 심한 말로 동생을 비난하면서도 언제나 앞장서서 적진에 뛰어들었다. 그는 눈물 흘리는 부모와 처자식을 뒤로하고 창을 들었다. 그런 인간의 머리에서 투구는 빛을 뿜는다. 그리스군이 여러 영웅들의 분투로 아킬레우스의 빈자리를 채울 때, 솔선수범하는 헥토르의 분투가 어쩐지 외로워보이는 것도 시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한다. 비록 그는 죽게 되었지만, 그는 아킬레우스가 가질 수 없는 것을 남겼다. 인간적인 영웅만이 가질 수 있는 인간적 명예다.
이 시는 헥토르의 죽음을 기점으로 아킬레우스의 일방적 학살극을 노래한다. 그 활약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고, 전장을 그리는 시의 호흡도 전과는 다르게 가빠진다. 호흡의 조절을 통해 아킬레우스의 무력을 전달하는 시인의 노련함에 감탄하게 된다. 아킬레우스는 살육을 마친 뒤 헥토르의 시신을 끌어와, 전차에 묶은 채로 몇 날 며칠을 질질 끌고다닌다. 그를 욕보이는 비정함에 신들마저 헥토르를 가여워해, 시신이 훼손되지 않게 막아 준다. 이 노여움 가득한 활약에 명예가 있다면, 그것은 인간적 명예가 아니다. 초월적 명예다. 헤파이스토스가 갓 만들어준 투구를 쓰고 얻은 명예다. 헥토르의 명예와 동질한 것이 아니다.
아킬레우스가 슬퍼하는 이유를 우리는 안다. 그것이 슬퍼할 만한 것임도 안다. 한데 헥토르 입장에서 보면 사정은 달리 여겨진다. 헥토르 아버지를 생각하면 더욱 묘하게 여겨진다.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는 헥토르만 잃은 게 아니다. 아킬레우스는 이 전쟁 전부터 그의 수많은 아들들을 잡아 죽였다. 외딴 섬에 팔아 넘긴 적도 있다. 이번 전쟁에서는 한 번의 출전만으로 헥토르뿐만 아니라 뤼카온과 폴뤼도로스를 죽였다. 모두 프리아모스의 아들이다. 자신의 판단으로 전장에 보냈다가 시신으로 돌아온 파트로클로스를 붙잡고 슬퍼하는 아킬레우스에게, 프리아모스가 늙은 시종 하나만을 대동하고 찾아간다. 아들의 상을 치르겠다는 일념으로, 그 아들을 포함해 자신의 수많은 자식을 죽인 이를 붙잡고 간청해야 하는 프리아모스의 처지가 더없이 안타깝게 그려지고 있다. 이로써 아킬레우스의 명예의 한계와 헥토르 부자의 비극이 공명하게 된다.
또 하나의 갈등관계가 밝혀진다. 아킬레우스와 프리아모스의 갈등이다. 두 사람이 함께 울부짖으며 땅에 뒹굴어, 잃어버린 전우와 잃어버린 아들을 곡哭할 때, 갈등시葛藤詩 일리아스의 극치가 드러나게 되고, 대치의 쌍으로 주어진 아킬레우스와 헥토르도, 곡哭하는 자와 곡哭되는 자로서 대치를 재개한다. 이 대목이 시의 백미라고 느꼈다. 아킬레우스와 헥토르는 화해할 수 없다. 두 존재는 시의 양극단에서, 갈등 없이 대치하는 존재다. 이 시는 극시다. 이 시의 시詩는 아킬레우스에게 가장 큰 몫으로 돌아갔지만, 극劇은 헥토르를 어여쁘게 여기고 있다고 나는 느낀다.
결국 이 시의 끝은, 전쟁의 끝을 노래하지 않았다. 이 시의 시작이 전쟁의 시작을 노래하지 않았던 것처럼. 시는 아킬레우스의 심심甚深한 노여움이 불러온 갈등으로 시작해서, 이 갈등이 부른 비극적인 상사喪事로 마무리되었다. 여기에 비극적 인간 헥토르를 함께 노래해 대위법을 이루었다. 이 시가 아킬레우스 위주로 읽힐 때, 시가 가져다주는 것은 일종의 무상함이었다. 전쟁통의 그늘에서 방관하다가 친구를 잃은 뒤 뒤늦게 적을 일방적으로 도륙하고 슬퍼하는 시로 읽히게 된다. 그렇게 읽는 것도 오독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시가 노래하는 갈등을 깊이 들여다보며 읽으니, 시는 새로이 열렸다. 그 얽힘은 치열했으며, 인간의 일이기에 비극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