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펑크: 엣지러너>> 시청후기

애니메이션

by 오윤오

- 이번 글은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시리즈 <<사이버펑크: 엣지러너>>를 시청하고 적은 후기입니다.

- 객관적인 기준보다는 개인적 취향과 인상을 토대로 편하게 감상을 남겨보았습니다.

- 영화 초반부와 전반적 인상을 언급하고 있어 열람에 주의를 요합니다(시놉시스 정도). 어떤 종류의 스포일러도 원치 않는 분께서는 먼저 작품을 보고 읽어주세요! 26년 3월 21일 기준 넷플릭스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



스포일러 방지턱. 애니메이션 정보.





야경으로 휘황한 밤, 상의를 탈의한 근육질의 남자가 야간근무중인 경찰 중 한 사람에게 말없이 다가간다. 경찰차에 타 있던 그 경찰이 대응의 말을 마칠 틈도 없다. 거수자는 느닷없이 산탄총을 꺼내들더니 그가 탄 경찰차를 피로 흥건한 벌집으로 만들어놓는다. 근처의 경찰들이 총알세례를 퍼부어보지만 몸에는 흠집조차 남지 않는다. 십수명은 족히 넘는 경찰들이 남자가 내지르는 연발총에 학살당하고 나서야, 경찰들은 그가 사이버사이코임을 알아본다.


헬기를 대동한 특수부대가 남자를 제압하고 나니, 이 낭자한 유혈극이 한 소년의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스너프 필름임이 밝혀진다. 불과 두 시간 전에 벌어진 총격전이 스너프 필름으로 유통된 것은, 인간의 기억을 그대로 저장하고 재생하는 기술이 있기 때문이다. 소년은 자기가 시청한 총격전을 보도하는 아침 뉴스를 보다가, 현장 수습에 어머니가 투입되어 있었음을 알아본다. 퇴근한 어머니를 앞에 두고, 지난 밤의 목격자였음을 부러워하듯 감탄의 외침을 내지른다. "대박(すっげぇ)!"


방탄의 육체와 가공할 화력, 기동력으로 무참히 경찰권력을 분쇄하는 힘도, 다른 사람의 기억을 머릿속에서 재생시키는 기술도, 모두 인간의 몸에 이식된 각종 첨단장비 덕분이다. 스너프 필름 속 남자를 가리키던 '사이버사이코'란 명칭은 남자의 이름도 별명도 아니었음이 밝혀진다. 사이버사이코는 증상자들의 통칭이다. 몸에 이식된 장비들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되면, 인간은 이성을 잃고 사이버사이코라 불리는 미치광이 폭도가 되어 피아구분없이 인명을 살상하기 시작한다. 오로지 죽음만이 그 폭거를 끝낼 수 있다. 이 애니메이션 시리즈는 사이버사이코가 되어 죽음을 맞이한 군인의 장비('산데비스탄')를 이식하게 된 소년의 파란만장을 담은 이야기다.


<<사이버펑크: 엣지러너>>(이하 <<엣지러너>>)는 밀림처럼 우거진 밤간판 속을 무대로 펼쳐지는 SF 액션 애니메이션이다. 이 작품이 그려보이는 미래기술은 첨단 무기와 인간 개조에만 경쟁적으로 몰두하고 있다. 기술은 공중의 치안과 위생에 보탬이 되지 않는 듯하다. 자동차, 전철 등의 교통수단이 여전히 현역인 세상이다.


기술은 살상력의 준말이 되었다. 과속, 절도, 강도, 난사가 난무하는 무법의 도시 속에서 암살자는 일자리를 구하기가 어려울 성싶다. 살殺의 수요가 없어서가 아니라 암暗의 수요가 없어서다. '나이트시티'에서 살인은 어둠 속에 감춰져야 할 필요조차도 없어보인다. 작품 속에서 사용되는 무기는 소음효과나 정밀타격기능 면에서 개선점이 없으며, 오로지 화력만을 과시적으로 증진한 화기들이다. 살인에 거리낌이 없기에 사건현장은 늘 유혈과 시신이 낭자하다. 노골적인 폭력의 연쇄가 형광색의 야경, 인간의 피, 총성과 단말마의 끊임없는 혼입으로 표출되고 있다. 수위 높은 액션 애니메이션으로, 마치 제한속력을 아득히 넘겨 달리는 반파된 험비로 쏟아지는 어지러운 야경과도 같은, 과격하고 속도감 넘치는 액션을 체험할 수 있었다. 수십명의 공중권력을 단숨에 무력화하는 미치광이 사내의 광분이, 또는 그것을 스너프 필름으로 감상하는 소년이 내지르는 고함에 섞인 흥분이, 시청자 쪽에도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다.


<<엣지러너>>는 인간 기술의 종착지를 혼돈의 불야성으로 상상했다. 박진감 있는 액션 드라마를 선사하고, 인체를 경쟁적으로 개조하면서 무뎌지는 인간성을 실감나게 보여 줌으로써, SF와 액션의 장르로 충실하다. <<엣지러너>>는 디스토피아 애니메이션이기도 하다. 그러나 앞서 지적한 시각적 연출이나 폭력과 절망의 표출이 디스토피아 장르가 되기 위한 충분조건은 아니다. 체념의 정서가 비로소 이 작품의 세계를 디스토피아로 만드는데, 여기서 체념은 인물들이 드러내는 내적 체념을 가리킬 뿐아니라, 작가적 체념까지도 포함한다.


<<엣지러너>>는 인물의 배치와 태도묘사를 통해 디스토피아의 골자가 되는 체념적 정서를 체화하고 있다.


인물의 배치를 통해 미래의 절망을 암시하고 있는 작품의 구성은 계산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작품에서 3인 이상으로 구성된 가정을 볼 수 없다.(혹은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드물다.) 목격되는 것은 1인가구, 결손가정, 2인핵가족 뿐이다. 화면에 세 사람 이상이 잡혀 있을 때, 그 모습은 언제나 가정의 한 장면이 아니고 일터의 장면이다. 그리고 일이란 것은 어김없이 갱스터 활동이다. 인간을 강하게 결집시킬 수 있는 것이 폭력뿐이라는 전망을 배치만으로 보여 준다. 유일한 예외로 초반부에 등장하는 아카데미라는 학원집단이 있는데, 그곳 집단의 구성원이 될 권리가 부잣집 자제들의 전유물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아카데미에 입학한 주인공의 학비는 어머니가 비리를 저질러가며 돈을 벌어도 감당이 어렵다. 어머니의 소망은 좌절되며, 주인공은 사고로 죽은 어머니가 빼돌린 첨단 장비를 달리 처분하지 않고 본인 몸에 이식했다. 산데비스탄 장비를 이식한 뒤 자신을 업신여긴 급우에게 보복하는데, 아카데미 집단에 소속되기를 포기하는 이 선택 또한 상징적이다. 작품은 이 '자퇴' 이후의 이야기인 까닭에, 주인공에게 매겨진 이야기는 구조적으로 그에게 정규 교육과정을 허용치 않고 있는 셈이다.


아카데미를 그만두고 가입한 사이버펑크 집단(작품 내 갱스터 집단)에서의 생활이 주인공에게 실질적으로 제공되는 처음이자 마지막 사회생활이다. 거기서 주인공은 동료애를 배우고, 연애를 배우고, '일하는 보람'을 배운다. 현란한 연출의 곳곳을 채우는 계산된 인물배치가 디스토피아적 구성의 핵심적 윤활제가 된다.


여기에 주인공의 태도가 더해져 작품은 디스토피아로 완성된다. 작품 내에서 주인공은 끊임없이 '나는 특별하다'라는 되뇜을 자기세뇌적으로 반복한다. 그 믿음 혹은 믿으려는 의지가 주인공을 추동시키는 힘인데, 그것은 한 인간을 고양시키는 건설적인 좌우명과는 결이 다르다.


작중 시대에, 유능함은, 신체개조를 통해 획득되는 것이다. 유능해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기술이지, 노력도 재능도 아니다. 신체개조를 하고도 몸이 성한지 아닌지가 유능함을 판가름하는 시대다. 인간의 능력과 성취가 기술력의 문제로 환원되어 있으니, 주인공에게는 자기가 기술의 축복을 받은 존재이기를 바라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다. '나는 특별하다'라는 말은 '나는 아무리 신체를 개조해도 사이버사이코가 되지 않는다'라는 믿음이다. 이 믿음에 기대지 않으면 그는 나아갈 수 없다. 한 번의 발분을 위해 한 번의 수술이 필요하며, 한 번의 도약을 위해 한 번의 약물주입이 필요한 인간으로 그는 전락한다.


그는 눈이 가려져 있다.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에서 그가 아는 진실은 둘 뿐이다. 하나는 앞에 낭떠러지가 있다는 것이고, 하나는 앞에 결승선이 있다는 것이다. 주인공이 작품 속에서 처한 상황이 이와 같아서, 그는 절벽이 결승선 앞에 있는지 뒤에 있는지 모른 채로 나아가고 있다. '나는 특별하다'라는 믿음은 결국 '절벽보다 결승선이 앞에 있다'라는 믿음과 동질하다. 절벽과 결승선의 자리에 대한 그의 믿음은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다. 자기 밖에 있는 것에 대한 맹목이다. 그러므로 그가 끊임없이 뇌까리는 '나는 특별하다'도,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다. 이 작품 속의 주인공을 움직이는 특별성에 대한 믿음은, 본질적으로 외세를 향한 미신적 의존인 것이다.


인간이 폭력의 응집력 없이는 영영 부스러기 신세를 면치 못하리라는 예감에 의해, 체념의 정서는 있다. 자신에 대한 신뢰가 유효한 믿음이 될 수 없는 시대를 예감하기에, 체념의 정서는 있다. 그것이 작가적 체념으로 비화하는 것은, 인간의 아비규환을 극복의 대상으로 그려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 작품에서 인간의 파국을 목격할 때, 보통 그것은 온고지신의 태도로 수용된다. 우리는 파국의 원인으로 인간의 실수를 점검하려 한다.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면 해결될 문제라고 세계를 파악하기 때문에 온고지신의 태도다. 그래서 한 작품이 비극적이라고 해도 그 작품이 예감하는 미래의 풍경까지 반드시 파국으로 그려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디스토피아 장르는 비극을 반성적으로 바라보려는 독자의 경향성을 의도적으로 차단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작가적 체념'이다. 인간이 도착할 목적지의 풍경으로 파국을 제시할 때, 작품은 작가적 체념의 풍경이 되고, 거기 그려지는 파국은 인간의 귀결로서 제시된다.


<<엣지러너>>는 형광색과 혈색이 난무하는 속도감 있는 연출을 통해 단번에 시청자를 몰입시킨다. 그러면서도 섬세한 문법을 활용해, 화려하게 채워진 화면의 근저에 해결할 수 없는 체념이 있음을 은근하게 드러내고 있다. 주인공에게 제시된 기승전결이 또렷해 친절한 작품인 동시에, 디스토피아라는 장르의 성립 근거를 설명하는 교본으로도 손색없는 작품이라고 정리해 본다.

수,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