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성 선수의 역사를 증명한 은퇴식

스포츠가 남기는 것 (1)

by 누리장인

UFC에서 활동하던 정찬성 선수가 은퇴했습니다.

2023년 8월 26일 UFC 싱가포르에서 맥스할러웨이(#1)와의 경기를 끝으로 승리하진 못했지만 패배를 등진 채 은퇴라는 이름으로 격투기 인생의 막을 내렸습니다. UFC에 유례없는 아주 감명 깊은 은퇴식으로 수많은 팬들을 울리며 옥타곤에서 퇴장하였습니다. 단순히 승패에 연연하기보다는 경기 내용과 스포츠맨십으로 무장하여 팬들을 열광케 했던 정찬성 선수는 여러 의미로 귀감이 되었습니다.


함부로 상대방에게 독설을 내뱉지 않다 보니 한국의 유교 사상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잘 꿰고 있는 건지 몰라도 상대 선수들이 먼저 예의와 품위를 갖춘 행동을 보여주기 일쑤였습니다. 하트를 날리는 선수도 있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고개를 숙이는 선수도 있었으며, 트래쉬 토킹을 하더라도 조종하는 누군가가 있을 거라며 의심하는 선수도 있었습니다. 서구권 국가에서는 보기 힘든 행동들이었죠. 이는 그들이 동양 문화에 대한 동경이나 다른 이유에 기인한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부분이긴 합니다. 하지만 존경이 묻어나지 않은 행동이라면 거짓말이겠죠.


그의 마지막은 챔피언도 아니었고, 승리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선수들과 팬들의 무수한 환호와 기쁜 작별로 이루어졌습니다. 정찬성의 상징정인 테마 음악도 함께 말입니다. 사실 이 같은 은퇴식은 UFC에서 많지 않습니다. 아니 최소한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선수는 소리 소문 없이 은퇴하기 마련이고, 유명한 선수일지언정 글러브를 링 위에 내려놓고 퇴장하는 것조차 보기 힘듭니다. 하더라도 메인이벤트(해당 대회의 마지막 무대)에 은퇴를 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도 됩니다. 은퇴를 할 때쯤이면 본인의 기량이 하락하는 것을 체감하며, 잦은 패배를 기록하고 대회 포스터의 대표로서 서는 일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메인이벤트는 보통 스타성이 높거나 랭킹이 높은 경우이며 넘버링인 경우 타이틀전이기에 마지막에 시간을 내서 본인의 은퇴식을 멋지게 거행하는 기회는 잘 오지 않습니다. 하물며 마지막 경기를 승리로 장식하고 은퇴하는 경우도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찬성 선수는 메인이벤트 경기에서 패배 후 은퇴를 하게 되는데, UFC 관계자는 테마 음악까지 틀어주며 그의 은퇴식을 축하해 주었습니다. 사실 정찬성 선수는 성적이 좋은 편이 아니었기에 최상급 선수라고 부르기는 힘들었습니다. 그럼에도, UFC와 선수 그리고 팬들은 그의 은퇴식을 떼창과 함께 아주 깊은 슬픔을 삼키며 박수를 쳐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정찬성 선수는 자신의 경기력으로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UFC데뷔전부터 보여준 최초의 트위스터 기술과 최단기간 KO 승리, 변화무쌍한 경기력 등이 많은 이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의 역동적인 모습과 이목을 끄는 움직임은 승패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그만의 독특한 페르소나를 드러내는 일이었습니다. 즉, 주어진 룰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특정 프레임에 얽매여 있지 않는 유니크한 스킬을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매우 창의적이면서도 과감한 모습이었죠. 게임을 끝내는 그 한순간에 열광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 과정 자체를 휘감는 움직임 하나하나에 절박함과 의지를 담아 대회장을 함성으로 채웠습니다.


이 같은 퍼포먼스는 MMA라는 스포츠를 좋아하는 팬들의 마음에 불을 지폈습니다. 이윽고 여태껏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그 모습을 마지막 경기에서 불살랐습니다. 결과를 차치하고 UFC와 팬들은 그의 커리어와 인간미에 대한 경의의 표현을 담아 UFC 싱가포르의 피날레를 도와주었습니다. 그렇게 정찬성 선수의 은퇴는 MMA 스포츠의 한 페이지에 족적을 남기며, 그의 닉네임과 음악 그리고 경기들은 역사 저편에 남게 되었습니다.


그가 UFC에 데뷔한 후, 10년이 넘는 동안 유사한 스타일의 선수를 찾아보기는 힘들었습니다. 그만큼 그가 보여왔던 커리어와 마지막 모습은 기나긴 격투기 여정에 크고 아름다운 흔적으로 남아, 앞으로의 격투기 선수나 스포츠인 그리고 이를 지켜본 다양한 이들에게 교보재가 되었을 것입니다. 챔피언이라는 결과물만큼이나 중요한 건 팬들에게 사랑받는 것이란 걸 말이죠. 실력적으로 뛰어난 선수들은 많이 있지만, 그들의 감정을 흔들어놓는 선수들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어깨 부상과 군대의 공백이 무색하게 상황에 걸맞은 전략과 스타일로 복귀전을 치르는가 하면, 결의가 느껴지는 등장신과 절박함이 느껴지는 경기력, 그리고 깔끔한 세레머니는 항상 대중들의 눈을 즐겁게 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MMA라는 스포츠를 좋아하게 된 경위는 정찬성 선수로부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제는 정찬성 선수를 끝으로 제가 좋아했던 모든 선수들은 무대 위에 올라오지 않습니다. 사실 최근 몇 년 간 MMA를 그렇게 열심히 보진 않았기도 하며, 나름대로의 이유가 여러 가지 있었습니다. 이대로 저 역시 더 이상 이 스포츠를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다른 스포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스포츠인들은 정신적 스트레스와 육체적 부상,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기 위한 승부욕 등으로 수없는 시련을 겪습니다. 그리고 무대 위에서 실시간으로 대중들에게 본인의 케파를 시험하고 드러냅니다. 그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얻어갈 수 있을까요?


https://youtu.be/VX6xJ-uEgsA?si=UbSm2hOe4iTYRXzj

제가 10년 전에 만든 동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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