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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도 느린 여행의 시작

그리스가 아닌 그리스에 다녀오다

by 다소느림

유달리 긴 연휴


올해 추석 연휴는 유난히 길었다.
달력을 보면서 사람들은 말했다.
“이 정도면 유럽도 다녀오겠네.”


일하느라 바빠서 여행을 가지 못했던 나에게는

이번 연휴가 황금같은 기회였다.
그래서 그동안 가보지 않았던 곳을 찾아보았다.


도시의 소음이 닿지 않는 곳,
시간이 조금 느리게 흐르는 곳.

그 끝에서 ‘남해’라는 이름이 내게로 다가왔다.


광주에서 출발하면 여수보다 더 멀다.
차로 몇 시간을 달려도 지도상으론 여전히 남쪽 끝.


그 길은 길었지만,
점점 바다 냄새가 짙어질수록
나는 그 길이 싫지 않았다.
조금씩 도시의 온도를 벗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첫날, ‘가인1829’라는 이름의 그리스


남해의 가인 1829

남해에 도착하자마자 숙소로 향했다.
이름은 가인1829.


처음엔 이름이 조금 낯설었다.

하지만 도착해서 문을 여는 순간,
그 이름이 왜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는지 알게 됐다.



남해의 가인 1829

하얀 벽과 푸른 지붕,
햇살이 벽을 타고 부서지며 만들어내는 그림자.
그곳은 ‘남해’가 아니라 ‘그리스 산토리니’였다.


숙소에는 스파와 개별 수영장이 따로 있었는데,
그게 또 단순한 온수풀이 아니라 순환식 시스템이었다.
따뜻한 물이 계속 아래에서 흘러나오고,
깨끗하게 순환되어 물이 식지 않았다.


정말로, 한국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가격은 30만 원대.
요즘 풀빌라 치고는 저렴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나는
가격이라는 단어로 이 숙소를 말할 수 없게 됐다.
그건 단순한 숙박이 아니라 ‘머무는 경험’이었다.


창문을 열면 바로 바다가 보였다.
바람은 짭조름했고,

파도는 멀리서 잔잔히 부서졌다.
그 풍경 안에서 모든 게 멈췄다.
시계도, 핸드폰도, 마음도.


저녁, 파도와 불빛 사이에서


그릴위의 바베큐

해가 질 무렵,

숙소 안 테라스에서 바비큐를 시작했다.
숯불이 익어가는 냄새와 고기 굽는 소리가 어우러졌다.
와인잔이 부딪히는 소리,

멀리서 들리는 파도.


그건 음악이었다.

도시에서는 늘 ‘해야 할 일’을 떠올리며 밥을 먹었는데,
그날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불빛이 은은하게 번지던 테라스 위에서,
‘지금 이 순간이 내 인생의 쉼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친구는 말했다.
“여긴 진짜 살아도 되겠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살면서 시골에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는데,
남해는 처음으로 그런 마음을 만들었다.
바다와 함께 아침을 맞고,
노을과 함께 하루를 마무리하는 삶.


그게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밤이 깊어가면서 별이 떠올랐다.
별빛이 바다 위로 떨어졌고,
와인잔 속에도 작은 불빛이 반짝였다.
그날의 공기와 냄새,

온도는 아직도 생생하다.


둘째 날, 조금은 느리게 걷는 시간


둘째날 새벽,
잠이 덜 깬 채로 베란다 문을 열었다.


숙소에서 바라본 바다위의 일출

그 순간,

세상이 오렌지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바다 위로 천천히 해가 떠오르며
모든 것이 빛으로 덮였다.


그 장면이 압권이었다.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바라봤다.

그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행은 결국,
‘좋은 장소를 보는 일’이 아니라
‘좋은 순간을 기억하는 일’이라고.


그리고 아침이 되어

커튼을 걷자 햇살이 부서져 들어왔다.
그리스의 바다 같은 푸른 수평선이 눈앞에 펼쳐졌다.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모든 게 완벽했다.


체크아웃을 하고 향한 곳은 독일마을.
남해 하면 꼭 들르는 명소 중 하나다.


하지만 사실,

전날 숙소가 너무 완벽했기에
어느 곳을 가도 그만큼의 감동은 없을 것 같았다.



소시지와 맥주 한잔

그래도 소시지와 맥주 한잔,
그 여유는 여행의 맛을 다시 일깨워줬다.
사진은 많이 남기지 않았다.


대신 그곳의 공기를 마음에 담았다.
낯선 언어가 들리지 않아도,
잠시 외국에 온 듯한 기분이었다.


마지막 목적지


물미해안 전망대

돌아오는 길에 ‘물미해안 전망대’에 들렀다.
그곳은 남해의 바다를 가장 넓게 품은 장소였다.


거기서 한참을 서 있었다.

말이 필요 없었다.
그냥, 바다와 눈을 맞췄다.
그 몇 분이 하루보다 길게 느껴졌다.


다시 집으로


광주로 돌아오는 길은 길었다.
하지만 그 길이 싫지는 않았다.
도시로 돌아가야 한다는 현실보다
남해에서의 하루가 오래 남았다.

남해는 내게 ‘여행지’가 아니었다.
그건 하나의 감정이었다.


바다 냄새, 흰 벽, 파도 소리, 그리고 조용한 밤.
그 모든 게 ‘그리스가 아닌 그리스’였다.


누군가는 말하겠지.
“그저 숙소 하나 잘 다녀왔네.”


하지만 나에게 그곳은,
‘살고 싶은 마음’을 처음으로 만들어준 장소였다.


남해에서의 하루


남해는 화려하지 않았다.
대신 솔직했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고,

바람이 조금 더 부드럽고,
사람들의 인사가 조금은 더 따뜻했다.


그곳에서 나는 깨달았다.
쉼은 멀리 있는 게 아니구나.
좋은 숙소, 따뜻한 사람,

그리고 느리게 걷는 하루.
그것이면 충분하다는 걸.


남해는 그렇게 내 마음에 남았다.
그리스보다 따뜻한 바다의 색으로.
그리고 다시 떠나고 싶게 만드는,
‘조용한 유혹’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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