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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by 다소느림

민주주의를 외치던 그들이, 권력이 되었다


민주주의는 오랜 시간 동안 ‘옳음’의 이름으로 불려왔다.
독재에 맞서고, 부패를 향해 싸울 때마다

그 깃발에는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깃발을 들었던 이들이 이제는
그 민주주의를 병들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권력을 쥐면 달라진다.
처음엔 국민을 위한다고 말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국민을 대신해” 결정하겠다고 말한다.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결국은 국민을 통제하려 든다.


다수결의 착각


지금의 정치판을 보면,

민주주의는 어느새
다수결이라는 편리한 도구로 축소되어 버렸다.
“우리가 다수이니 옳다.”
“의회에서 통과됐으니 정당하다.”


하지만 다수가 언제나 옳을까?
나는 종종 그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히틀러 역시 다수의 선택으로 집권했다.
그가 독재자가 되기 전까지,

사람들은 그를
‘국민의 선택’이라 불렀다.


다수가 옳다는 보장은 없다.
다수는 실수할 수 있고,

때론 감정에 휘둘리며,
선동에 끌려 잘못된 방향으로 걸어갈 수도 있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다수의 지혜’보다 ‘다수의 겸손’이 필요하다.


권력의 본질은 겸손이어야 한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권력의 소유가 아니라,
권력의 절제에 있다.
권력을 쥔 순간,

그것은 국민의 신뢰를 위임받은 것이지,
모든 행동의 면허를 받은 게 아니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은 반대다.
권력을 쥔 쪽은 자신이 곧 정의라 믿고,
비판은 ‘방해’로,
견제는 ‘적대’로 여긴다.


민주주의를 말하지만,
그 속은 점점 독선으로 굳어지고 있다.


불편함을 견딜 수 있을 때, 민주주의는 건강하다


민주주의는 원래 불편한 제도다.
합의에는 시간이 걸리고,
타협은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 불편함을 견디는 사회만이
진짜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세상은
‘효율’과 ‘속도’를 이유로
그 불편함을 지워버리려 한다.


다수의 힘으로,
절차를 생략하고,
토론 대신 통보로 정치를 대신한다.
그 순간, 민주주의는 편리한 독재로 바뀐다.


민주주의를 되묻는 용기


나는 요즘 자주 스스로에게 묻는다.


“민주주의라는 말은 여전히 옳은가?”
“우리는 그 이름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민주주의는 완벽하지 않다.
하지만 그 불완전함을 성찰하고 고쳐가려는 사람들 덕분에
지금까지 유지되어 왔다.


진짜 민주주의는
투표장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스스로를 끊임없이 의심하는 시민 속에서 자란다.


다수의 폭정 속에서, ‘다른 시선’을 잃지 않기 위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큰 목소리가 아니라,
더 깊은 생각이다.


다수가 옳다고 믿는 그 순간,
민주주의는 멈춘다.


다수의 이름으로 짓밟히는 소수의 목소리를,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덮이는 불편한 진실을,
끝까지 바라보는 다소다른 시선.
그게 지금 우리가 붙잡아야 할 마지막 민주주의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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