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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을 수 없는 암표

지능화된 플랫폼의 그림자

by 다소느림

‘사라진 티켓’의 비밀


요즘 인기 공연이나 스포츠 경기 표를 예매하려 하면,
몇 초 만에 매진된다.
하지만 몇 시간 뒤, 중고 거래 플랫폼에는
똑같은 자리가 몇 배의 가격으로 올라와 있다.


누군가가 ‘운 좋게 예매했다’고 믿기엔 너무 정교하다.
그들은 이미 매크로 프로그램으로 자동 예매를 돌리고,
다른 사람보다 수백 배 빠른 속도로 표를 쓸어 담는다.
그리고 그 표는 곧 ‘리셀’, 즉 정가보다 비싼 티켓으로 다시 등장한다.


이제 암표상은 거리에서 티켓을 흔드는 사람이 아니다.
노트북과 봇(bot)으로 무장한 지능형 시스템이다.


‘중고 거래’라는 이름의 합법적 방패


티켓베이, 번개장터, 당근마켓 등에서는
공연·스포츠 티켓이 끊임없이 올라온다.
대부분은 정가보다 훨씬 비싼 가격이다.


그런데 이 플랫폼들은 입을 모은다.
“우리는 거래를 중개할 뿐, 판매자가 가격을 정한다.”

법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직접 판매하지 않기 때문에,

‘암표상’으로 단속되지 않는다.


‘중고 거래’라는 포장 아래,
사실상 상업적 암표 거래의 인프라가 굳건히 자리 잡은 셈이다.


법은 오래됐고, 현실은 너무 빨라졌다


우리나라에서 암표를 금지하는 법은
‘경범죄처벌법 제3조 제2항 제4호’에 있다.

“공연, 경기 등의 입장권을 유상으로 되파는 행위”는20만원 이하의 벌금, 구류 또는 과료의 형으로 처벌한다.


하지만 이 조항은 오프라인 암표상을 대상으로 만들어졌다.

인터넷 시대의 매크로 리셀러, 플랫폼 중개, 전자티켓 양도를
전혀 상정하지 않았다.


그 결과, 수십만 건의 리셀 거래가
‘법적으로는 단속할 수 없는’ 영역에 머문다.
플랫폼은 빠져나가고,

리셀러는 익명이고,
구매자는 피해를 입어도 신고할 방법이 없다.


팬심을 돈으로 거래하는 사회


예전엔 공연을 가기 위해 텐트 치고 줄을 섰지만,
이제는 인터넷 창을 새로고침하며 기다린다.


그러나 그마저도,

돈과 기술이 있는 사람만 이긴다.

한국의 스포츠 경기들, 연예인 콘서트,
어디서든 ‘정가로는 구할 수 없는 표’가 되어버렸다.


팬심이 경쟁력이 되고,
진심이 가격표를 달게 된 세상이다.


법의 허점, 그리고 책임의 부재


리셀러는 “양도했을 뿐”이라 하고,
플랫폼은 “중개했을 뿐”이라 하고,
법은 “처벌할 근거가 없다”고 말한다.


결국 피해는 누구에게 돌아갈까?
바로 진짜 관객, 진짜 팬들이다.

암표는 단순한 불법 거래가 아니라,
문화 접근권의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사회적 문제다.


티켓을 살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공정하게 문화를 즐길 권리의 문제다.


법이 뒤처진 사이, 시장은 이미 변해버렸다


지금의 암표 시장은

더 이상 ‘잡을 수 없는 범죄’가 아니라,
‘잡지 않는 범죄’가 되어버렸다.


기술로 무장한 리셀러,
중립을 가장한 플랫폼,
그리고 낡은 법 사이에서
공정은 무너지고 있다.


이제는 누가 티켓을 갖고 있느냐보다
누가 법의 빈틈을 잘 이용하느냐가 더 중요해진 시대.


그 사이에서,
진짜 팬들은 여전히 표를 구하지 못한 채
화면 앞에서 ‘새로고침’을 누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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