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적 정의가 만들어낸 위선
요즘 세상을 보면,
“말해야 할 때는 침묵하고, 침묵해야 할 때는 말하는”
장면이 너무 익숙하다.
정치권은 국민이 분노할 만한 사건엔
“신중히 검토 중”이라며 말을 아끼고,
정작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이슈에는 앞다투어 입장을 낸다.
어떤 사건은 언론의 헤드라인을 수일간 장악하고,
어떤 사건은 하루 만에 사라진다.
사건의 본질이 달라서가 아니라,
그 사건이 누구에게 불리한가,
누구에게 유리한가에 따라 다르게 다뤄지기 때문이다.
이제 ‘침묵’은 책임 회피가 아니라 전략이 되었다.
말 한마디가 표를 잃게 할까,
지지층을 흔들까 두려운 사회에서
정치의 언어는 진실이 아니라 계산된 문장으로 변했다.
그 결과, 정치의 언어는 점점 공허해지고
정작 국민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나라” 속에 남게 되었다.
이 현상은 비단 정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기업, 단체, 시민운동, 언론, 심지어 개인의 일상 속에서도
‘선택적 정의’는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 되었다.
많은 단체들은 “우리는 평등을 지향한다”,
“모두를 위한 목소리를 낸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모두’에는 늘 조건이 붙는다.
“우리의 방향에 동의하는 사람들”,
“우리의 불편을 일으키지 않는 사람들.”
그렇게 ‘모두의 정의’는
점점 자기 진영의 정의로 축소되고,
결국 ‘같은 편’만 감싸는 울타리로 변한다.
예를 들어,
평소에는 “우리는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든다”고 외치던 집단이
내부 구성원이 억울한 피해를 입었을 때,
혹은 내부 권력자에게 불리한 일이 터졌을 때
놀라울 정도로 조용해지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그들의 침묵은 하나의 메시지다.
“정의도, 공정도, 불편하지 않을 때만 말하겠다.”
그건 더 이상 정의가 아니라,
이미지 관리의 언어다.
세상은 점점 ‘집단의 시대’로 가고 있다.
정당, 시민단체, 팬덤, 회사, 심지어 온라인 커뮤니티까지
모두가 “우리”라는 이름 아래 뭉친다.
하지만 그 ‘우리’ 안에서
한 개인이 다치거나 억울한 일을 겪을 때
대부분의 집단은 침묵한다.
왜냐하면 그 개인을 보호하는 일보다
‘조직의 이미지’를 지키는 게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건 개인의 문제야.”
“내부적으로 해결 중이야.”
이런 말로 덮어버리는 순간,
그들이 외치던 평등과 연대는 종이 한 장처럼 얇아진다.
결국 ‘같은 사람’이라던 말은 구호일 뿐,
불편한 순간엔 언제든 지워지는 문장이다.
이건 정치의 문제도,
조직의 문제도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의 거울이다.
이제 사람들은 누가 상처받았는지보다
‘누가 상처받았느냐’를 먼저 본다.
사건의 본질보다,
피해자의 소속을 먼저 따지는 사회.
그게 바로 선택적 공감의 구조다.
누군가 피해를 당하면
“그 사람이 우리 편이냐”를 확인하고,
그게 아니라면 “그건 복잡한 문제야”라며 고개를 돌린다.
이런 사회에서는 진실이 설 자리가 없다.
사건은 정치화되고, 분노는 방향을 잃는다.
결국 모든 일은 “진영의 논리”로 소비되고,
그 사이에서 진짜 피해자는 더 고립된다.
정의는 언제나 불편하다.
누군가를 감싸려면,
다른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해야 하고,
공정을 지키려면,
때로는 내 편을 비판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쉽게 타협한다.
“이번만은 그냥 넘어가자.”
“우리 이미지에 안 좋을 수 있어.”
이렇게 만들어진 침묵은 시간이 지나면
하나의 문화가 되고,
결국 사회 전체를 병들게 한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건
더 큰 목소리가 아니라 불편한 진실을 말할 용기다.
정치든 단체든,
혹은 우리 개인이든
“이건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사회는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한다.
침묵이 미덕이었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말하지 않음이 곧 방조이고,
침묵이 곧 편들기가 되는 시대다.
말해야 할 때 말하는 사람,
불편해도 침묵하지 않는 공동체,
그게 바로 건강한 사회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