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착취의 현장
나는 여러 알바를 해왔다.
카페, 식당, 분식집, 족발집.
업종은 달랐지만,
공통된 말은 있었다.
“우리 가족처럼 일해보자.”
그 말은 늘 따뜻하게 들렸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따뜻함은
책임의 부재로 바뀌곤 했다.
가족처럼 지내자던 사장은
휴가를 준 적도,
야간 수당을 챙겨준 적도 없었다.
가게를 혼자 맡았던 날조차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로 모든 게 끝이었다.
그들의 ‘가족’이라는 말은
노동의 가치를 지우는 주문처럼 작동했다.
그들은 늘 희망을 말해주곤 한다.
“너 열심히 하면 나중에 비법 다 알려줄게.”
“너는 열심히 해주니까 나중에 분점 하나 내줘야겠다.”
하지만 그 ‘나중’은 결코 오지 않았다.
그 약속은 늘 미래 시제로만 존재했다.
그 말 뒤에는 늘 “조금만 더 버텨봐”,
“지금은 힘들어도 나중엔 다 돌아와”
같은 문장이 붙어 있었다.
하지만 그 ‘나중’은 오지 않았고,
그 ‘돌아온다’는 말은 늘 사장의 편에서만 돌아왔다.
그건 희망이 아니라 가스라이팅이었다.
직원이 떠나지 않게,
자신의 안정을 지키기 위해
던지는 달콤한 미끼였다.
최근 한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벌어진 일은
단지 한 브랜드의 비극이 아니다.
요식업 전반에 스며든 구조적 문제의 단면이다.
하루 12시간, 16시간씩 서서 일하는 것이
‘열정’으로 포장되고,
휴식이 ‘게으름’으로 치부되는 문화.
트렌디한 인테리어와 SNS 감성 뒤에는
여전히 오래된 ‘노동의 그림자’가 있다.
우리가 사진으로 소비하는 ‘핫플레이스’의 반짝임은
누군가의 피로와 희생 위에 세워진다.
그 사실을 잊은 채 우리는 “이 집 분위기 좋다”며
그 공간을 또 하나의 소비재로 소비한다.
요식업계의 노동착취는 교묘하다.
법적으로 문제는 없다고 말하지만,
실제 현장은 늘 한 사람이 세 사람 몫을 한다.
휴식은 눈치로 결정되고,
퇴근은 손님이 끊겨야 가능하다.
“다들 이렇게 일하는데 왜 너만 힘들다고 하냐”는 말은
가장 흔한 폭력 중에 하나다.
그 말은 결국 “착취를 정상으로 받아들여라”는 뜻이다.
이건 단순히 프랜차이즈만의 문제가 아니다.
카페, 식당, 편의점, 공장, 사무실.
어디서나 ‘조금만 더 해봐’,
‘가족처럼 지내자’는 말이
노동의 언어를 대체하고 있다.
하지만 진짜 가족이라면,
쉬게 하고, 돌봐주고, 보상해줘야 하지 않을까?
그게 배려이고, 그게 관계다.
‘가족’이라는 단어는 애정의 언어가 아니라
이제 노동현장의 가장 교묘한 면죄부가 되어버렸다.
이제 우리는 ‘열정’이라는 단어의 이면을 봐야 한다.
그 말 뒤에는 ‘무급노동’, ‘장시간 근무’,
‘책임전가’가 숨어 있다.
누군가의 꿈과 비전을 말하기 전에,
그 사람이 쉴 수 있는 권리부터 보장해야 한다.
노동이 존중받지 않는 사회에서
그 어떤 성공 스토리도 오래가지 않는다.
가족처럼 일하자던 사장은
가족처럼 쉬게 해주지 않았다.
그게 한국의 많은 현장의 진실이다.
이번에 일어난 한 프랜차이즈 카페의 사건은
누군가의 죽음으로 알려졌지만,
우리 모두의 일상 속에서도
조용히, 매일 반복되고 있다.
누군가의 피로가 쌓여 만들어진 디저트 냄새가
이제는 달콤하지 않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