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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웅 Dec 07. 2022

‘이대로’와 ‘더 낫게’

마음자세에 따른 영욕

통찰력과 발상의 전환

안빈낙도와 부국강병



통찰력과 발상의 전환

해양과 대륙 사이에 위치한 반도 국가의 숙명은 기복이 심하지만, 특히 우리 한민족은 오랜 역사 동안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국들과 관계에서 ‘힘 있는 자’에게 휘둘렸다.

BC108년, 한나라 무제가 고조선을 멸하고 한 4군(漢4郡)을 설치한 이래, 1895년까지 2,000여 년간 중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원나라가 일본 원정을 하겠다면 고려는 말과 배를 준비해야 했고, 일본이 명을 칠 테니 길을 내어라(征明假道)”면 조선은 기를 쓰고 막아야 했지만, 아무런 준비 없이 뛰어든 전쟁 결과는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도전과 응전'일까? 1467년부터 시작된 일본 ‘전국시대(戰國時代)’는 그 시대적 특성이 하극상이었다. 절대 맹주가 없어지자, 각 지방 영주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부국강병을 추구하여, 이 시기에 오히려 국가 전체 경제력이 급성장하였던 아이러니도 경험하였다. 반면에, 조선은 ‘세종’ 이래 나라를 흔들 만한 큰 변동 없이 정체된 경제력을 유지하였다. 전국시대가 한창인 1543년 어느 날, 태풍으로 표류하던 포르투갈 난파선이 일본에 상륙하였다. 일본에 ‘조총’이라는 신무기가 소개되던 순간이었다. 일본 규수 남단의 도주 ‘도키다카’는 포르투갈 선원으로부터 ‘머스킷(Muskeet, 화승총)’ 2정을 샀다. 대가는 은 2,000냥. 지금 가치로는 대략 20억 원으로, 당시 가치로 병사 200여 명의 1년 동안의 유지비용이었다. ‘조총’의 가치를 알아본 그의 혜안이 놀랍다. 수십 년간 익힌 무예로 전장을 풍미하던 사무라이들은, 그야말로 농민 출신 잡병들의 ‘조총’ 사격 한 방에 그냥 쓰러졌다. ‘조총’의 비대칭성은 전투 패러다임을 바꾸고, 일본은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통일되었다.


다시 50여 년 뒤 1591년, 조선에 조총이 소개되었지만, 당대 최고 무장 ‘신립’ 장군을 비롯한 조선 조정의 문무백관들은 별다른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다. 위력에 비해 장전 시간이 길고, 우천 시 사격이 제한된다는 단점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선의 단견에 비해 일본의 발상 전환은 눈부시다. 간웅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총의 위력을 극대화했다. 한두 정의 위력은 별로지만, 수백 정의 조총을 조별로 정렬시켜 교대로 동시 사격을 해 대면 그 위력은 과히 압도적이었다. 관점의 차이가 역사를 바꾸었다. 이듬해 1592년, 임진왜란으로 일본군이 침략했다. 이후 7년간의 전쟁에서, 조선 백성 ⅓이 죽고 수많은 문화재와 도자기 등 당대 최고의 기술들이 약탈당했다. 40여 년 뒤, 병자호란에서 조선은 청나라에 또다시 무기력하게 치욕과 굴종을 당했다. 북벌을 다짐하고 복수를 맹세했으나 공허한 메아리였다. 


그리고 다시, 250여 년 뒤인 1894년, 반침략, 반봉건을 주창하던 동학농민운동으로 역사의 물꼬를 돌릴 수 있었던 기회마저, 조선 왕실의 비겁함이 자초한 외세 개입으로 산산조각 무산되었다. 죽창을 든 동학농민군은 관군과 일본군 연합과 ‘우금치(공주) 전투’에서 격전(?)을 벌였다. 7,000여 명이 몰살당한 동학군에게는 격전이었으나, 극소수가 전사한 관군과 일본군에게는 무의미한 살육전이었다. 패배의 원인은 벌컨포와 비슷한 최신 ‘게틀링’ 기관총과, 한번 장전에 15발 사격이 가능하고 사거리가 800m인 일본군 ‘무라다’ 신식 소총이었다. 무기체계의 차이는 극명하고 참혹했다.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300여 년간 조총(사거리 120m에 한 발 장전에 2~3분 소요되는 화승총) 수준이었다. 동학군 대부분은 이마저 숫자가 부족하여 죽창을 들었다. ‘부적을 태워 먹으면 총알이 비켜 갈 것’이라는 신념과 강인한 정신력조차, 불과 몇 시간 후에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이대로’가 편했던 것일까?


안빈낙도와 부국강병

조선은 ‘사농공상(士農工商)’ 신분제도였다. 책만 읽지 아무런 생산력이 없는 선비는 공자와 맹자를 논하며 현실 안주를 원했다. 변화는 자신들의 위상을 위협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추구하였고, 변화와 혁명을 억압하고 적대시하였다. 똑같이 ‘사농공상’ 신분제도를 가졌지만, 조선의 사(士)가 선비를 지칭하지만, 일본의 사(士)는 무사를 의미한다. 무사는 늘 죽느냐사느냐?”의 갈림길이다. 안주는 죽음이니 살기 위해서라도, “더 낫게”를 찾아야 했다. 왜란 이후, 이어진 ‘에도 막부’는 찬란한 경제, 문화의 발전을 이루었으나, 조선의 실학사상은 그 빛을 잃었다. ‘에도 막부’ 말기, 미국의 철선(黑船)에 굴복하였으나, 오히려 ‘더 낫게’를 추구하며 ‘명치유신’으로 근대화를 이루었다. 이에 비하여,  단말마적인 발악이랄까? 개혁을 하겠다며 마지막 안간 힘을 써서 내려진 단발령조차 '신체발모 수지부모... 부모님이 물려주신 신체의 일부인 상투를 자를 수 없다'며 '이대로'를 고집하던 '딸각발이' 조선은 끝내 식민지배의 치욕을 당하였다. 계속되는 ‘더 낫게’ 에 고무된 일본은 세계를 무대로 온갖 수탈과 정복을 이어 갔다. 개구리가 황소를 삼킨 관점의 차이, 생각의 차이였다. ‘이대로’에 안주하던 대가로 ‘더 낫게’에 의해 씻을 수 없는 수모를 당하였다.


국제적으로도, ‘이대로’에 안주하다가 ‘더 낫게’에게 폭망 한 전례는 많다. 미국 원주민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자신들을 공격하였던 서구 이주민들로부터 총 이외의 신문물을 거부하였고, 수기로 작성된 ‘꾸란’에 집착하던 ‘오스만 터키’는 ‘인쇄술’마저 거부하였다. 덕분에 최근에야 아랍어 꾸란이 해당 국어로 번역, 인쇄되었다. 또, 아프간 ‘탈레반’들은 외부세계로부터 단절을 위해 TV 시청조차 제한하였다. ‘이대로’에의 집착은 무지의 발로거나 안주만 바라던 기득권 세력의 권익 유지에 다름 아니었다.     


하지만, 역사에도 항상 반전은 있다. 1960년대 한국의 '잘 살아 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라는 국민적 열망은 모두를 일깨우고 '이대로'의 안주에서 탈피하려는 첫 시도였다. 그리고, 이어진 도전들... 자동차, 철강, 화학, 건설, 조선, 반도체, 심지어 문화 콘텐츠까지 "빨리, 빨리"를 외치며 쉼없이 달리며, 그 누구보다도 '더 낫게'에 올인하였다. 그야말로, 셰계인이 주목하는 '한강의 기적'이었다. 반면에, 승승장구를 구가하던 일본은 "잃어버린 30년'에서 보듯 오랫동안 제자리 걸음이다. 토끼와 거북이의 달리기에서 잠에 빠진 토끼처럼 자만에 빠졌던 탓일까..? 우리는 지금 단군이래 최대의 번영기를 구가하고 있다지만, 아직도 우리의 '더 낫게'는 성에 차지 않는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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