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군사 외교관 이야기 (미국, 제6화: 미국 해군대학원 편 - 4)
한국계 미국 동포(시민권자)의 남다른 애국심
미국 시민권자가 된 아이들
한국계 미국 시민권자의 남다른 애국심
한국전쟁은 한국인들에게 특별히 비참했다. 수십여 만 명의 전쟁고아와 전쟁미망인, 수만 명의 상이용사, 그리고 엄청난 난민들이 발생하였다. 미국 등 참전국들의 사회, 종교단체는 버려진 고아들을 입양하거나 고아원을 운영하였고, 너나 할 것 없이 먹고살기 고달팠던 상황에서 전쟁미망인이나 난민들의 일부는 미군부대 주변에 기지촌이라는 촌락을 이루며, 개중에는 국제결혼을 하거나 위안부도 있었고, ‘하우스 보이’든 뭐든 미군기지 내 온갖 잡다한 일을 처리하는 등 여러 가지 모습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대부분 미군은 철수하였지만, 전쟁에서 크게 패배하였던 미 2사단(군우리 전투), 7사단(장진호 전투), 24사단(대전 전투)은 1970년대 중반까지 한국에 주둔하였다. 그러다가, ‘카터’ 대통령의 주한 미군 철수 정책으로 7사단과 24사단은 철수하여 각각 캘리포니아와 워싱턴주, 그리고 ‘하와이’와 ‘알래스카’에 재배치되었다.
필자가 공부하였던 미 해대원은 캘리포니아주 ‘몬트레이(Monterey)’라는 도시에 있는데, '몬트레이'는 꽤 큰 카운티(미국의 주 아래 행정 단위, 우리의 군급)로, 몬트레이, 페블 비치, 퍼시픽 글로브, 씨사이드, 마리나, 카멜 비치 등 여러 개의 해변가 휴양도시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씨사이드 주변에 있는 ‘포트 오드(Ft. Ord)’라는 미 육군기지는 한국에서 철수한 미육군 보병 제7사단이 주둔하고 있었다.
미 7사단은 보병 사단급이라 PX나 '그로서리 스토어'(식료품 마트)가 우리 해군 대학원보다 규모가 크고 물건이 다양하여 미군 장교 ID를 가진 필자는, 주말이면 이곳에 가서 생필품 쇼핑을 하였다. 그런데, 이곳에는 유난히 한국 분들이 많아서 굉장히 놀랐다. PX 종업원인 한국 분에게, “어디에 사시냐?” 물으니, 근처 ‘마리나(Marina)’라는 해변 도시에 사신다며, 도시 인구의 70% 정도인 7,000여 명이 한국 동포라고 말해 주었다…. 나중에, 그 도시에 가보니 거리에는 정말 한국분들이 많았고 미장원, 식품 가게 등 수많은 한국어 간판이 걸려 있었다. 그때가 한국 88 올림픽 이전이었는데…
필자가 만난 분들은 미군 7사단 철수 시 함께 오신 분들이었다. 그중에서, 미군과 국제결혼한 어떤 분은, 결혼 이후 무려 49명의 가족을 데려왔단다. 어려웠던 70년대, 미국이 가족 이민이든 초청 이민이든 수많은 이민자에게 새 삶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1986년 말, 한국 ‘현대자동차’의 ‘포니(엑셀)’이 미국에 첫 수출되었다. 특이하게도 한국차가 수출되지 마자, 당시 수출 물량 전부가 예약판매로 매진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대부분 구매자들이 한국계 미국인이었다. 필자가 마리나에서 만난 이 분은 자신이 겪은 전쟁의 참화와 현대차의 모습을 비교하며 자꾸만 눈물을 훔쳤다. 한국은 기지촌 주변에 거주하던 이들을 홀대하고 험한 생활을 강요한 것밖에 해 준 게 없는데도…. 꿋꿋하게 살아오시며, 비록 국적은 바꿨어도 한순간도 한국에 대한 애정을 버린 적이 없던 분들을 바라보며, “진정한 애국자의 모습이 어떤 것일까?” 하는 생각에 필자도 잠깐 울컥 감정이 북받치기도 했다.
당시에도 유학, 초청 이민, 국제결혼 등 다양한 형태로 한인 교민들이 200여만 명이 넘어, 미국 내 모든 고등학교에 한인 학생이 다닌다고 할 정도였다. 한국전쟁은 한민족을 흩어 버리고, 인고의 시간을 안겼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자 흩뿌려졌던 이들이 미국 사회 각 분야에서 성장하여 나름대로의 위상으로 자리 잡았다.
그 뒤로도, 그곳에 공부하러 오신 분, 국제결혼하신 분 등등… 정말, 다양한 교포들을 만났는데, 대화를 하다 보면, 많은 분들이 '농담 반, 진담 반'이라며 육군 장교였던 필자나 동료들에게 아이를 낳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라고 권유하셨다. 당시, 우리들은 시민권은커녕 한 시라도 빨리 논문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큰 꿈이었는데... 나름대로, 한국에 가면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미국 시민권자가 된 아이들
미국은 속지주의라 미국에서 출생만 하면 성인이 된 후에는, 본인의 의지에 따라 시민권을 얻을 수 있다. 시민권자가 되면 미국 내 주립대학 등은 대학 학비가 외국 유학생의 1/3 미만이고, 의과대학도 갈 수 있으며, 사내아이의 경우, 군대 문제로 스트레스받을 일도 없고, 노후에는 연금 받고 최저 생계비도 보장되는 등 노후복지 지원도 우리보다 낫다. 그래서일까? 공부 도중에 가끔 부인이 아이를 출산한 동료들이 있었다. 요즘에는 원정 출산이라며 하와이는 물론, 괌이나 사이판까지 간다는 말도 있지만, 당시에는 병원비가 하룻밤에 $400 가 넘어서, 월 $800~900 정도를 받는 가난한 유학생에게 출산이란 커다란 경제적 부담이라 별로 관심이 없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동료의 부인은 1주일 정도 입원하라는 의사의 말을 무시하고 이틀 만에 퇴원하여 주변의 염려를 사기도 하였다. 어쨌든, 이런저런 사연을 겪으며 동료들로부터 여러 아이들이 태어났다.
세월이 많이 지났다. 어느덧 동료들은 사회의 일선에 물러났고, 그때 미국에서 출산한 동료의 아이들은 대부분 미국에서 의사나 치과의사, 변호사 등으로 살아간다. 일견 좋아 보이고 남들도 부러워한다. 하지만, 가끔씩 만나는 동료들은 "한국에서 같이 살면 좋을 텐데... 아이를 잃어버렸다"라며 푸념을 늘어놓는다. 어떤 이는 '아이와 절연(연을 끊는다) 하였다'라고 말하기도 하고... 지리적인 간격으로 왕래가 어려운 탓도 있지만, 미국식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아이들이니, 한국인 부모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며 한탄한다. 손자, 손녀도 한국말을 못 하는 경우도 많고... 그렇지만, 손자, 손녀를 보고 싶어 하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심정을 자신들이 애지중지 키운 아들, 딸이 알기나 할까? 아빠의 유학으로 인하여 엉뚱하게 아이들의 인생행로가 바뀌었다.
그럼에도, 지금도 외교관이나 상사 주재원, 유학생 등 많은 가정에서는 아이들을 미국에서 출산하여 시민권을 갖게 한다. 한국도 이중 국적을 인정하여, 이제 이중 국적을 가진 아이들은 유창한 이중 언어, 양국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 등으로 한국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의식이 '한국인' 일 때의 이야기다. 환경이 습관이나 태도를 지배한다. 미국에서 교육받다보면 한국의 정서를 지켜가기 어렵다. 극소수의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한국을 잊어버리거나, 한국과 미국의 양다리를 걸치는 경우가 많다. 아이들의 의식구조는 한국인도 아니고 미국인도 아니다. 경계인이랄까...? 자신의 정체성을 못 찾아 헤매는 아이들도 많다.
미국사회는 대놓고 인종차별이야 하지 않지만 유리 천장이 있다. 아무리, 미국적 관념에 충실해도 미국 상류사회에 진출하기도 어렵고... 통게자료가 보여주듯이, 한인 교포가 수 백만이지만 상원의원은 커녕 하원의원조차 몇 손꼽을 정도이다. 일본의 이민 역사는 150여 년에 이른다. 지금껏 상원의원 1명, 4성장군 1명 정도 배출했다. 한인 교포로 미군 내 간혹 장군으로 진출한 자가 있지만, 대부분 주류가 아니거나 완전히 미국인이 된 경우이다. 이들은 겉만 한국인 모습이지 머리 속은 완전 미국인이다. 대부분 한국 국익에는 무심하다.
친구 딸아이가 미국 최고 명문이라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했다. 당연히, 주변에 한국 학생 커뮤니티도 있었다. 하지만, 학창 시절부터 그 여자 아이는 한국 남학생과 어울리기보다 백인 남학생과 친하였다. 그걸 나쁘다는 게 아니라, 관점의 차이를 지적하고 싶다. 대부분 한국인 남학생들은 일류대학에 가기 위해 죽자고 공부해서 공부벌레라는 말을 들었지만, 춤이나 스포츠 기타 소소한 행복을 가꾸는 일에는 같은 대학을 다니는 백인 남학생을 못 따라간 게 아닌가...?라는 것이다. 한국인 남학생들이 그 여학생 눈에는 차지 못했던 같다. 친구의 백인 사위는 한국과 처가댁을 끔찍이 생각한다지만, 손주들이 한국어를 못하니 조부모와 대화가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