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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웅 Apr 03. 2023

'우리'의 '눈치'와 서구의 '양식'(良識)

글로벌 다양성 이해 (문화 차이, 제18화)

'눈치' - ‘우리’라는 공동체가 요구하는 삶의 지혜

행동이나 태도의 판단 기준은 상식이나 양식(良識)

'우리'라는 개념

예의와 에티켓


'눈치' - ‘우리’ 공동체에서 삶의 지혜

농경사회였던 중국은 개개인의 심성이나 행동에 관심을 두기보다, '충효'에 기반한 사회정의에 더 치중하였다. 특히, 삼강오륜적 가치관을 내우는 공맹 사상은, '공동의 유익'을 추구하는 것으로서, 이런 '관계'를 숭상하는 동안, 유교에 바탕을 둔 ‘유교적 공동체’는 국가를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로 간주하였고, 개인의 권리보다 사회적 권리를 우선시하였던 것이다. 당연히, 개인의 존재감은 ‘우리’라는 사회의 한 부분으로 재구성되어, 개인의 자유는 필연적으로 억압되었으며, 상호 의존적으로, 다른 구성원과 조화를 이루어야만 살 수 있었다. 

열녀문(출처: 진천군청)

조선시대에는 ‘열녀’나 ‘효자, 효녀’가 많았다. ‘열녀문’이나 ‘효자문’은,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마을의 자랑이었고 가문의 자부심을 나타내었다. 이처럼, 남편이나 부모에 대한 희생과 헌신의 정신을 높이 샀지만, 정작 개개인이 처한 내면의 세계에는 무심하였다. 예컨대, 남편과 일찍 사별하여 과부가 된 여인에게 수절은 ‘법도’의 이름으로 강요되었다. 만약, 재가 (再嫁)라도 하면 ‘그 자식은 벼슬 길에 나갈 수 없는’ 법이 있었으니, “누가 자식의 앞길을 막으려 하겠는가?” 


이처럼, 조선 사회에서는 ‘내가 뭘 어떻게 하고 싶다’ 라거나 ‘내가 남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등 등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 보다는, ‘남이 나에게 어떻게 하라고 하느냐?’나,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주된 관심사였다. 그만큼, ‘우리’ 속의 남의 이목이나 눈초리가 무서워 나의 행위가 개인으로서의 가치보다, 소속한 ‘집단이나 가문의 명예’에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라는 두려움이 더 컸던 것이 아닐까?


그만큼, ‘우리’라는 그룹들은 자기 자신보다 상하 좌우의 '관계주의'에 따랐고, 동시에 나도 남만큼 '우리 속의 이웃'에 대해 왈가왈부하거나, 심지어, ‘남의 집 젓가락이 몇 개인지?’도 알기 원했다. 그 남들이 ‘우리' 속의 구성원들이었으니까, 내가 관심을 표명하고 간섭하는 것 역시, '우리'가 해야 할 일이었다.


서구 - 행동이나 태도의 판단 기준은 상식이나 양식(良識)

이처럼, ‘우리’는 개인이 아닌 사회의 일원으로서 늘 주변을 의식하였다. '감정의 은폐나 억제'로 '남에게 아예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일본인과 달리, ‘우리’의 한 부분인 '나'로 인해 무슨 문제가 생기면 안 되니, 일단 ‘간’을 본 다음 주변여건에 따라 적당히 대처하려는 마음가짐이 강하였다. 이같이 주변을 의식하는 독특한 문화가 ‘눈치문화’이다. ‘눈치를 보다’는 말은 우리만의 고유한 말이다. 영어사전에서도 굳이, ’Read one’s countenance’라고 하지만, 그 사람들에게 그런 개념조차 없으니 거기에 맞는 표현은 사실 없는 듯하다. 눈치에 대해 이어녕 교수는 저서 ‘이것이 한국이다’ (pp42, 문학사상사)에서 아래처럼 정의한다.

이어녕, '이것이 한국이다'

「프랑스의 일상을 지배하는 정신은 ‘봉 상스 (bon sens양식, 良識)’이고, 영국인은 ‘컴몬 센스 (Common Sense, 상식, 常識)’로 세상을 살아간다. 하지만, 우리의 ‘눈치’는 프랑스의 ‘양식 (봉 상스)’이나 영국의 ‘상식’ 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이들 국가에서는 나의 행동이나 태도가 ‘양식이나 상식에 맞느냐? 어긋나느냐?’에 따라 판단되는 것과 달리, ‘눈치’는 상대방의 기분에 내 행동과 태도가 ‘맞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지극히 수동적이다. 그러니 ‘눈치’란 오히려 불합리할 때 그 빛을 발한다.   


많은 서구인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양식이나 상식에 어긋나면 양보와 타협을 하지 않는다. 회사에서는 사장도 일단 부하 직원의 말에 타당성이 있다고 믿으면 솔직히 그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만약에, 우리나라에서 누군가가 사장에게 '양식 (봉 상스)'나 '상식 (컴몬 센스)'을 가지고 따지려 들면, ‘말대꾸’를 한다거나 ‘버릇없이 덤벼든다’고 생각하고 혼쭐이 난다. 그러니 ‘이치’를 따지기 보다 ‘눈치’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주변을 의식하는 것'을 겸손으로, 그리고 예의로 생각했다. 이런 관점에서, ‘눈치’는 권위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의 산물이었다. 왕조시대에는 각종 '사화'를 겪었고, 일본 식민지배, 군부독재까지 겪었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없을 수 없었다. 자연스레, 모두가 ‘우리’의 일원이 되고자 하였다.


'우리'라는 개념

그런데, 우리가 입버릇처럼 달고 사는 ‘우리’라는 개념은 개별적인 ‘나’와 ‘너’의 합(合) 집합이다. 합집합은 ‘나’와 ‘너’ 사이를 묶는 어떤 연결고리가 있어야 한다. 우리 사회는 그 연결고리를 ‘끈’이나 ‘줄’로 표현하였다. 그러고 보니, ‘줄을 잘 잡아야 끈 끊어진 갓 신세가 안 된다’는 표현이 새삼 와닿는다. ‘끈’이나 ‘줄’은 묶거나 매는 역할이다. 그래서 인연이나 우정을 맺고, 계약을 맺고, 지연, 혈연, 학연 등 ‘연(緣) 줄’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끈으로 매면, 두 개는 독립성을 상실하고, 서로를 속박한다. 상대방에게 그냥 ‘나’를 맡기고 ‘나’도 ’ 너’도 아닌 ‘우리’가 되니 ‘너와 내가 모든 것을 공유’하는 관계, 그야말로, ‘우리끼리’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 못 끼이면 ‘왕따’가 되는 것이고… 

갓 끈

덕분에, 우리 모두가 출세하려 했고, ‘우리’ 속의 남들이 알아주고, 우러러보는 일을 하길 원했다. 부모는 ‘내 노라’하는 자식 자랑에 급급하였고, 자식들은 “내 부친이 누구~”라며 부모를 파는 일에 인색하지 않았다. 그 결과, 젊은이들 중에 자신의 취향이나 적성을 고려하여 인기 없는 학문이나 영역에서 평생을 바치려는 사람이 별로 없는 이유이기도 하고, 꿋꿋한 소신으로 살아가던 위인들은 집 안팎으로부터 ‘강하면 부러진다’고 유별나게 고통을 받기도 하였다. 


이처럼, 개인의 인성과 의식 수준은 ‘얼마나 주변의 눈치를 잘 보느냐? 의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중용지도 (中庸之道)’랄까? 원만하고 적당한 수준의 마음가짐이 요구되었다. 누군가가 '입속의 혀'처럼 너무 줏대 없이 굴며, 남의 비위나 맞추는 ‘아첨꾼’ 행세를 하면 애써 외면당하였고, 반대로 ‘미련한 곰탱이’나 남의 입장 따윈 전혀 모르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독불장군’ 같은 ‘눈치가 없는 인간’도 ‘우리’의 일원이 되지 못하였고, 당연히 출세하기 힘들었다. 또, 너무 출세 지향적인 인간이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노력하여 높은 지위를 갖고도, 의지나 뚜렷한 주관 없이 주변의 시류에 휩쓸려 ‘눈치껏’ 일희일비하는 인격도, ‘우리' 속 모두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였다. 


하지만, ‘눈치’에 익숙한 개인은, 하나의 ‘독립적인 인격체’라기보다 시계의 톱니바퀴처럼 ‘우리’라는 사회의 구성원의 한 부분으로서 각각 그 존재 의미를 가지게 되었고, ‘우리’ 속에 있을 때 더 편안한 심리적 안정감마저 갖게 되었다. 이쯤 되면, ‘나’로서가 ‘나’가 아니라, ‘우리’라는 너와 나의 ‘관계의 틀’ 속에 ‘나’를 속박하고 갇히게 만들 수밖에 없다. '눈치'가 생존의 수단이 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면, 조폭이나 갱단이 내세우는 '조직의 식구'라는 표현과도 다를 바 없어질 만큼 '나'의 존재는 사라져 버린다.


예의와 에티켓

그런데, 동양의 ‘예의’와 서구의 ‘에티켓’을 ‘눈치’와 ‘양식 (良識)’의 관점에서 비교해 보면, 양자 간의 차이가 느껴진다. ‘예의’는 상대에 대한 존중이 기본이다. 존중의 범위는 타인의 사생활로부터 재산, 관념, 철학, 종교, 성별 모두를 포함한다. 우리 조상들은 ‘3강 5륜 (三綱五倫)’과 함께, 사람이 항상 지켜야 할 5가지 도리인 오상 (五常) -‘인의예지신 (仁義禮智信)’을 유교 윤리의 근본으로 보았으며, 이중에서도 사람이 살아가는 도리로 특히, ‘예 (禮)’를 강조하였다. 이 때문에 6 조판서에도 이, 병, 형, 공, 호조와 함께 예조가 있었다.

 

명품에 집착하는 이유?

사실, 예의는 지키면 서로에게 편하고, 예를 지키지 않는 사람은 상종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때문에, ‘예’에 관한 한 조선인들은 늘 재빠르게 주변 상황과 관계를 확인하고 민첩하게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여 ‘눈치’ 있게 대처해야 했다. 대충 뭐라 해도 ‘척'하면 '척’이다. 내가 아니라 ‘보는 사람의 입 맛’에 맞추는데 익숙하다. 하지만, 과유불급이라던가? 때때로 자신의 체면이나 위상에 맞추는 형식적인 예의에 매우 민감하였다. 같은 이유로, 최근 한국인들은 명품에 열광한다. 명품하나 걸치면 자신의 체면이나 위상이 오른다고 생각하였을까? 이 같은, ‘보여주기 식’ 예의로 허례허식이 시작된다.  


이에 비해, 서구의 ‘에티켓’은 교양인의 척도이다. 신사, 숙녀라는 남녀노소간에는 주변 상황에 무관하게 ‘해야 할 바’와 ‘해서는 안 될 바’를 지나 ‘어떻게 해야 할지’가 반사적으로 나오도록 숙달하였다. 특히, 신사에게는 숙녀에 대한 배려가 강조되었다. ‘에티켓’은 아래, 위의 개념 없이, 눈치를 보거나 과도하게 표현하지 않고, 상호 존중, 배려, 상식이라는 기본적인 틀 안에서 적절히 행동하도록 강조한다. 그런데, 미국이 다문화, 다인종의 융합이어서? 아니면, 자유분방함으로 덜 경직되어서? 일까, ‘에티켓’에 대한 미국인의 행동이나 표현 방식은 유럽인의 그것에 비해 좀 더 자연스럽다.


한국은 한 때, 동방예의지국이었다. 

'예'를 숭상하였던 우리 조상들의 슬기처럼, 오늘날에도 바른 예의는 교양인의 덕목으로서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이다. 예의는 암기를 한다거나, 도덕교과서에 나열한다고 해서 저절로 나오는 게 아니다. 항상, 마음으로부터 상대를 존중하려는 바른 인성을 가꾸고, 어릴 적부터 가정, 학교에서 지켜야 할 매너나, 예의, 태도를 본받고 체득해야 저절로 나오는 것이다. 


예의범절을 지키지 않는 무례는 '천박함'으로 대변된다. 그리고, 이 같은 무례함의 범주에는 상대에 대한 무시, 배려부족, 차별은 물론, 상대방을 괴롭히는 행위까지 포함된다. 직장인 10명 중 9명이 직장에서 상급자로부터 존중은커녕 무시나 무례한 취급을 당하거나 목격하였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이제는 오죽하면, 직장 내 ‘상급자 갑질’도 상담해 주는 단체가 생겼을까? 


미국 기업들도 비즈니스에서 '무례함' 때문에 지출하는 비용이 연간 3,000억 달러가 넘는다 한다 (‘태도의 품격’, 로잔 토머스). 세상에, ‘성질 못 내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비즈니스 승패는 성질 한번 잘못내면 돌이킬 수 없다. 삭막한 세상일수록 '예의와 품격'을 차리는 것이 중요하다. 존중을 받아 싫어할 사람은 없다. 서로 정도껏 분수에 맞추어줄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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