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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웅 Apr 04. 2023

'노크'와 '찌개'

글로벌 다양성 이해 (문화차이, 제19화)

노크’와 ‘찌개’ 

우리끼리’의 접대 문화 

 


노크’와 ‘찌개’ 

필자의 해외 근무로 집 아이들이 초, 중, 고교 때 미국학교를 다녀, 자연스레 미국 생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런데, 둘째 아이는 대학마저 미국 대학으로 진학하였다. 하지만,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생각을 잊지 않으려 노력하였다. 때문에, 일부러라도 한국에서 고교를 마치고 유학 온 또래들과 어울리려 노력했고, 그리고, 친하게 된 몇, 몇 친구들과 함께 집(House sharing)을 빌려서 방은 따로 쓰되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였다. 


노크하기

그러던 어느 날, 친한 친구가 아이의 방에 '노크도 없이' 불쑥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이는 친구의 무례함에 깜짝 놀라 잠시 당황하였는데, 그 친구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술 더 떠서, 아이가 아끼는 물건들까지 허락도 없이 만지작거렸다. 사실, '노크'도 안 하고 불쑥 들어와서, 자기 것도 아닌 방안의 물건을 함부로 만진다? 이런 일은 미국 아이들 간에는 용납하기 어렵지만, 한국에서는 예사로운 일이다. ‘우리’는 친구니까..., 친한 친구 간에는 ‘내 것, 네 것이 없다’는 강한 일체감을, 아이의 친구처럼 이를 ‘우정의 척도’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만약에, 한국에서 친한 친구사이에 노크를 요구하고, 물건을 만지는데 무슨 허락을 요구한다면 친구관계가 깨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한국 친구들과 잘 지내고 싶어 하는 아이여서, 늘 친구를 위해 “양보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이들을 대하였다. 그런 생각으로 인해, 아이에게는 한국 친구들과의 관계는 늘 조심스러웠고, 그러다 보니, 차이를 극복해 가는 동안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이처럼, 친구지간에는 공간의 개념조차 구분치 못할 정도로 밀착하는 것도 좋지만, 어떤 경우는 개인의 공간에는 좀 더 유연성을 발휘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만약, 문이 닫혀있다면 당연히, 노크를 하고, 열려 있다면 ‘헛기침’이라도 해서, 자신의 ‘기척’을 알림으로써 어떤 상황에서든 누구 하고라도 어색한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고 세심한 배려를 하는 것이 어떨까?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알아서 하는 마음과 ‘이심전심 (以心傳心)’도 중요하지만, 최소한의 예의도 필요하지 않을는지?    


큰 아이도 ‘유별나게’ 친구를 좋아하여 미국 아이들과도 친하게 지냈다. 우리 방식이 통했던 것일까? 보통의 미국 아이들과 달리 미국에서 살 때, 유년기 이웃 친구와 지금껏 교류하고 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표현처럼, 친구는 ‘우리’의 한 부분이었고, ‘우리’라는 개념은 한국인에게 매우 강한 유대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이런 순수함으로 평생의 지기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다. 

우리 마누라?? (출처: 우리문화신문)

또, ‘우리’라는 말은 누군가를 호칭할 때 가감 없이 전달된다. 학교에서 같은 반 친구끼리라면, “우리” 사이이니 선생님은 ‘우리 선생님’이고, 친구 간에 자기 아빠를 칭할 때도 ‘우리 아빠’다. 하물며, 어른들 간에도 친구라면, '우리 집', ‘우리 마누라’라는 표현조차 자연스럽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내 물건’, ‘네 물건’이 있을 수 없는 구조이다. 단수, 복수의 구분이 뚜렷한 영어와 달리, 두리뭉실한 '우리'는 공생을 지나 공유의 의미라고로도 전혀 이해가 되질 않는다. 


그런데,  외부와의 교류가 제한된 외진 지역일수록 “우리’ 사이가 더 강한 듯하다. 일부 남부 지역 사람들은, 어느 전직 대통령이 모 검찰총장을 "우리 000" 라고 칭하였듯이, 누군가와 “친숙함”을 자연스렵게 과시하려할 때, '우리 아무개'라는 표현을 버릇처럼 사용하였다.  


모두가 함께 즐기는 찌개(출처: 중앙일보)

그럼, 이런 '우리'는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우리’가 즐겨 먹는 음식으로 “00 찌개”라는 게 있다. 먹을 게 풍족치 못한 시절, 작은 량의 고기나 생선이든 야채든, 된장이든, 김치든 무엇이든 큰 냄비에 물과 보글보글 끓여서 국물을 함께 떠먹는 음식인데, 농경문화의 유산이라지만 우리에게만 있는 독특한 음식 문화이다. 


예전에는 ‘우리’ 모두 이 찌개 주위에 둘러앉아 각자의 숟가락으로 퍼서 먹었다. 최근 들어, 여러 사람의 숟가락이 같은 음식 그릇에 들어가면 질겁을 하고 위생 관념이 어떠니 하면서, 별도의 '앞 접시'에 먹을 만큼 들어서 먹고 있지만…, ‘한 솥밥을 먹는 사이'라는 표현처럼 '함께' 퍼먹는 음식이야 말로 ‘우리’가 아니면 누가 같이 나눌 수 있겠는가? ‘공유’의 개념은 ‘우리’가 되기 위한 본질이었다.   


우리끼리’의 접대 문화 

‘우리’들은,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함께 먹은 옆사람과 따로따로 밥값을 계산하려면 영 마음이 편치 못하다. 그러니, 외국인들과 함께 식당에 갈 경우에도 한국 사람이 "밥값을 내겠다"라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러면 우선 “왜?”하며 경계심을 표한다. ‘더치 페이 (Dutch Pay)’가 생활화된 외국인들이나 일부 젊은이들은, 한국인들이 ‘왜, 밥값을 내겠다고 그러는지?’ 이러한 ‘관계의 문화’의 속 뜻을 잘 알지 못한다. 


음식비 먼저 지불하려는 몸싸움(출처: 뉴시스)

외국인의 눈에 비치는 신기한(?) 모습 중의 하나가, 음식점 계산대 앞에서 친구지간은 물론, 심지어 부자지간, 형제지간 등 가족 간에도 서로 먼저 음식비를 계산하려고 서로 붙들고 밀치며 몸싸움(?)을 벌이는 장면이다. 누군가의 음식값을 다른 이가 내려고 하거나, 더 나아가 서로 먼저 내겠다고 다투는 문화는 특이하다. 도대체,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 무슨 대가를 기대하기보다 체면(?)때문에 ‘밥 값을 서로 먼저 내겠다’고 몸싸움을 벌이는지? 한국 이외에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평가는 상반된다. 이를 ‘아름다운 싸움’이라고 평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자기 과시’라고 폄하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서로를 속박하기 위한 행위’라고 평하기도 한다. 한번 얻어먹으면 또 만나서 갚아야 하니까 자꾸 얽매이게 만든다는 것이다. 남의 밥 공짜로 얻어먹고, 나중 ‘나 몰라라’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평가야 어떻든, 한국인의 ‘우리끼리’ 문화나 ‘우리 가족’ 관계는 물질을 초월한다.


지금의 20~30대 젊은이들은 어떨는지 모르겠으나, 한국사회에서는 '밥 사는데 인색한' 선배나 웟 사람들은 후배들의 존중을 받기 어렵다. 후배들은 그런 사람들을 스스로가 ‘우리’라는 관계를 갖고 싶어 하지 않는 이들로 단정한다. 그 순간 부로 우리가 아닌 남이 되니, 선배라는 이유로, 웟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에게 ‘속내’를 내어줄 리가 없다. 


필자의 사무실은, 가끔씩 이직하는 직원 환송 행사를 가졌다. 미국식 레스토랑에 가면 각자가 먹은 것을 계산하고 가면 되는데, 가끔 한국 식당에 가서 회식을 하면 식비 지불 문제로 난감할 때가 있다. 어떤 미국인은 공깃밥 한 그릇도 자신이 먹지 않은 것은 제외하고 지불하려고 한다. 이런 사람들 눈에는 '혼자서 음식비를 다 내려고 서로 실랑이를 하는 모습'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혼밥 (출처: 엠씨플러스)

그런데, 우리도 점점 진화해서일까? 요즘은 같이 밥을 먹더라도 각자 자기가 먹은 만큼만 지불하는 분위기라고 한다. 뭐, 그게 더 부담도 적고 자연스럽기도 하다. 물론, ‘2인’ 이상 주문이 가능한 메뉴를 만들어 선택의 자유를 제한하였던(?) 식당 주인은 이런 변화가 달가워하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혼밥’ 문화도 정착되어 간다. 사실, 혼자 밥 먹는 게 어색하다는 사람도 많지만, 식사시간만큼은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픈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일본에서는 혼자 밥 먹는 문화가 오래전에 정착되었다. “아름다운 싸움”을 연출하였던 “우리끼리” 접대 문화도, 시대 변화와 함께 저물어 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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