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군사 외교관 이야기 (미국, 제9화: 미 육군 지휘참모대 -1)
군사 외교는 자기가 하기 나름
피하기는 쉽지만, 피하다 보면 고립된다
공식적인 채널을 최대한 활용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기 통제'(Self Control)
몇 년 뒤, 필자가 다시 미국 육군 지휘 및 참모대학으로 출국할 때는, 그동안 세상이 많이 바뀌어, 해외여행 자유화가 시행되었고, 1992년 구 소련 등 공산권 붕괴에 따라 노태우 정부에서는 북방외교가 강화되고 한국은 북한과 함께 유엔에 동시 가입하였다. 그리고, 1993년 김영삼 정부는 소위 “세계화(Globalization)” 바람을 일으키며, 본격적으로 해외근무를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는 동안, 필자는 전방에서 대대장과 사단 참모 근무를 마치고, 미국의 중앙부에 위치한 캔자스 시티 근교 미국 육군 제병협동 사령부 및 지휘참모대학에 연락장교 및 교환교관(군사학 교수)으로 부임하였다. 정확한 명칭은 한국 육군 교육사령부 파견 미국 육군 제병협동 사령부(Combat Arms Command) 연락장교 겸 미국 육군 지휘참모대 교환교관)
돌이켜보니, 미국 육군 지휘참모대학 (이하 미 지참대)에서 보냈던 2년 간은 군 생활 중 가장 보람찬 기간이었다. 하지만, 출국 시의 상황은 그리 녹녹하지 않았다. 아무도 환송하는 사람도 없는 가운데 10살, 6살의 남자아이 둘을 데리고 묵묵히 공항으로 따라나서는 아내의 발걸음은 그다지 가벼워 보이지 않았다. 내심, 앞으로의 일이 많이 불안하였던 탓이리라. 친한 동기들 또한, "대령 진급 심사를 눈앞에 두고 웬 출국이냐?"라며 모두가 말렸다. 그래도 나름대로 소망을 갖고 갔었는데, 정말 기대 이상으로 군사외교관으로서는 물론 개인적으로 매우 보람되고 알차게 보냈다고 자평한다. 해외 파견 근무의 역할과 위상은 남이 정해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기 나름이다. 잘한다 해서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골프 치고 논다고 해서 누가 뭐라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군의 근무 인연이나 인간관계는 안 보이면 멀어지는 'Out of sight, out of mind'이다. 이는 외지에서 고독한 싸움 (Self Control)을 하는 모든 군사외교관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캔자스에서의 생활은 여러모로 다행이었다. 같은 부서의 근무자와 스폰서(후원자)는 물론, 미 지참대 교관이면 누구나 이수해야 하는 교육학 석사과정 (캔자스 주립대, Off-Campus)를 미 육군의 후원으로 이수하고, 지참대 교관 자격증을 획득하면서, 제병협동 사령부 및 지휘참모대의 더 많은 장교, 교관들과 동창으로써 친분관계를 익혔다는 것이다. 이런 노력 덕분에, 제병협동사의 주요 인원들과 다양한 모임을 가지면서, 또, 지휘참모대의 교환교관/연락장교로서 교관 과정 동기는 물론, 학교 교직원과, 연락장교단, 현지 주민 그리고 학생장교들과도 많은 교류를 가졌다. 뿐만 아니라, 필자 아이들의 학과 후 과외활동 (수영)을 적극 참여하여 학교에 근무하는 교관 및 자원봉사하는 그들의 가족 등 많은 주변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 낯선 곳이지만, 점점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근무에도 자신감을 가졌다.
그리고, 해마다 필자가 주관하는 '국군의 날 행사(육군의 자금 지원)와 지휘참모대학이 주관하는 '한국 소개 행사(Nation's Parade)'에도 이런 인사들을 적극 초청하였다. 특히, '한국 소개 행사'는 캔자스 시티에 거주하는 교포들까지 지원해 주어 다른 나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잘 준비하였다. 그때마다 초청된 인사들은 우리 한국에 대해 재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며 초청에 감사하였다. 당연히, 이들 인사와의 교류는 필자의 업무에 직, 간접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미군들의 보안의식은 매우 엄격해서 개인적인 친분만으로는 허용할 수 있는 범위를 절대 초과할 수 없으나, 허용된 분야에 대한 질의/응답 시 비교적 편안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었다.)
피하기는 쉽지만, 피하다 보면 고립된다
제병협동 사령부는 미 육군 교육사령부 예하의 미국 지휘참모대와 보병, 포병, 기갑, 공병, 통신, 정보, 항공 학교 등 각급 전투 병과학교에 대한 전투발전, 학교/교육훈련, 교리발전 등에 대한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데, 당시, 제병협동 사령관은 3 성 장군인 '뮐러' 장군으로서 교육사 부사령관 겸 미국 육군 지휘 및 참모대학 대학장을 겸하고 있었다. 사령관 내외분 모두 인품이 아주 훌륭한 분들인 데다 부임 시기와 근무교대 시기가 필자와 거의의 유사하여 많은 점을 배웠고 도움도 많이 받았다(차후 언급), 제병 협동 사령부의 참모부장은 모두 준장이었다. 그리고, 교수부장 격인 지휘참모대학 참모장은 대령이었다. 당시, 참모장 ‘쟈니니’ 대령은 나중에 한국에 주둔하는 미 8군 사령관(중장)까지 승진하였는데 매우 유능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사령부에는 영국, 캐나다, 독일, 프랑스 , 터키 등 나토 동맹국 5개 국가와, 한국, 일본, 브라질, 칠레 등의 연합국 등 총 9개국의 연락장교단과 미 해군, 공군, 해병대, 국가방위군 등의 연락장교들이 파견되어 지휘부의 참모장에 소속되어 있었고, 제병협동 사령부/지휘참모대학은 이들 연락장교들에게, 같은 지역에 위치한 미군 대령급 관사를 제공하였고 사무실과 공동비서를 두어 좋은 근무조건을 제공하였다.
하지만, 가정적으로는 간혹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외국군 장교 부인들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처음의 기대감과 설렘이 식어지고 나면 권태기를 맞이하는데 이때가 가장 큰 위기이다. '미국 사람 꼴도 보기 싫다'며 두문불출하는 부인네들도 적지 않았다. 어떤 이는 자기 나라 것만 찾다가 향수병에 걸리기도 하고, 심한 경우 우울증을 앓기도 한다. 원인은 대부분, 미국에 처음 온 이들이 '영어가 않된다'거나 '미국 문화가 익숙지 않다'라며 스스로를 고립시켰기 때문이다. 낙천적인 브라질 장교 부인처럼, 영어를 못해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공부하여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즐겁게 보낼 수 있지만... 그건 개인의 취향문제이기도 하다. 옆 집 이웃 일본 연락장교 부인은 2년 동안 말하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가끔 보면, 그저 배시시 웃어주는 정도였다. 그저, 남편 직장 이전 따라 미국에 왔는데... 또한, 멋모르고 아빠 따라온 아이들도 스트레스받기는 마찬가지다. 말도 안 통하는 친구를 다시 사귄다는 어려움을 말로 표현할 일이 아니다.
참모장 '쟈니니' 대령은, 오랜 해외근무로 이런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외국군 장교들에게 사회적 활동의 계기를 많이 마련하여 주었다. 먼저, 미군 각 군의 연락장교와 각 국가에서 파견되어 온 연락장교 (교환교관) 등 모두 18명의 중, 대령급 장교들로 연락장교단 모임을 구성하여, 전통적으로 해오던 귀국자 환송 및 신입자 환영 행사를 직접 주관하고, 국제 장교단 행사 등 정기적인 모임 이외에 부인들 '커피 모임'이나 상호 초청 행사 등을 통한 친목활동을 병행하였다. 필자가 이 모임을 특별히 언급하는 이유는, 우리 중 일부는 이미 자국의 무관 등으로 타국을 경험한 자도 있었고, 모두들 교리/ 훈련/ 전투 발전 관련 각종 자료수집은 물론, 자국의 각종 문화, 군 홍보행사 등을 주도적으로 담당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이들과 교류하는 동안에 자연스럽게 무관 업무와 유사한 군사외교 업무를 사전에 충분히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공식적인 채널을 최대한 활용
우리 육군의 전투병과학교와 유사한 제병협동 사령부는 미국 육군의 미래를 준비하는 산실로써, 각 병과 학교별로 전투개념에 의한 소요제기, BCTP 프로그램, 전투모의 실험실(Battle Lab), 디지털 육군(Digital Army) 등 각종 전투 발전 개념을 발전시켜 왔으며, 그중에서도 '지휘 및 통제' 분야를 주도하는 지휘참모대는 특별히 신 FM100-5 ('작전 요무령’)를 저술함으로써 모두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연락장교로써의 필자는 개인적 관심과, 한국 육군본부 및 교육사의 정보요구(RFI)로, 당시 미 측의 주요 이슈였던 '작전 요무령' 등 신 전투개념 자료들을 수집하여 보고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군사외교관 역할을 경험하였다.
사실, 아무리 미국이 우리의 우방국이라고는 하지만, 자신들이 피땀 흘려 발전시킨 이러한 자료들을 거저 줄 리가 없다. 따라서 이를 효과적으로 수집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입체적으로 병행되어야 했다. 우선은 저들이 연구 개발하는 업무가 무엇인지 알아야 했다. 필자는 약간 근무에 익숙해 지자, 공동비서를 통하여 공식적으로 연구개발과 관련되는 전체 주요 부서에 대해 "Courtesy /Office Call"을 넣고 방문을 신청하였다. 그리고 방문한 뒤에는 설명을 듣고 토의하며, 미진한 사항은 계속해서 방문 시 받은 자료에 대한 추가적인 질문/ 토의를 하는 방식으로 육군이 요청한 자료를 수집하였었다. (당시 사령부에는 대령급이 처장인 약 30여 개의 부서가 분야별로 주요 임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필자는 이들 부서에 대해 순차적으로 방문하였다)
그리고, 보다 세부적인 정보를 요구하는 분야는, 사령부 외에 각 병과학교의 주요 부서에 대한 방문으로 답을 찾고자 했다. 당시, 미 제병협동 사령부는 예하에 보병학교(포트 배닝), 포병학교(포트 씰), 기갑학교(포트 낙스), 통신학교(포트 고든), 부사관학교 등을 관할하고 있어서, 이들 학교에 대한 방문 허가를 연락장교단 명의로 사령부에 공식 건의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혼자 만의 요구보다 옆 방에 있는 일본 연락장교를 설득하여 그와 함께 승인을 받도록 힘을 모았다. 사령부 측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라며 주저하였으나, 참모장까지 건의하자 사령관이 우리 두 나라의 요구를 승인해 주었다. 이를 보면, 주재국에서 아무도 우리를 챙겨주지 않으므로 그저 관례에 따라 가만히 앉아서 문서로 요청하고 기다리는 수동적인 자세보다, 각종 규정이나 제도를 확인하여 공식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건의해서 적극적으로 얻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