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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웅 Dec 14. 2022

군사외교와 대인관계

어느 군사 외교관 이야기 (미국, 제10화: 미 육군지휘참모대 -2)

대인관계는 군사외교의 첫걸음

다름과 차이의 존중 : 잘못된 군사 외교관 사례



대인관계는 만남과 초청으로 시작

외교든 뭐든 모든 일은 사람이 한다. 그래서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대인관계는 만나고, 교류하는 동안 점점 발전한다. 그런데, 외국에 나가면 누구든 '을'이 되어, 가만히 있으면, 아무도 챙겨주지 않는다. 아는 사람이 없다고 가만히 앉아 있기보다, 각종 규정이나 제도의 범위 내에서 사람들을 만나려고 적극 노력해야 한다. 동병상련이랄까? 같은 신분으로 이곳에 나와있는 영국, 독일 등 나토국 대령급 9명과, 한국, 일본, 브라질, 칠레 및 미 해군, 미 공군, 주방위군, 해안 경비대 선임장교들로 만들어진 연락장교단 모임이 있어서, 우리는 월 1-2회 정도 간격으로 각자 숙소를 돌아가며 부부 모임으로 자주 어울려 업무도 교류하고, 친선 경기도 하였다. 참, 숙소 초청 이야기를 하다 보니 관사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비교적 좁은 아파트에 거주하는 한국인은 웬만해서는 집으로 친척 이외의 손님을 초청하기보다 바깥에서 만남을 해결하곤 한다. 하지만, 서구인들은 친근의 표시로 자신의 집으로 초청한다. 


미국 정부는 캔자스 지역에서 1840년대부터 1890년대까지의 개척시대에 지어진 역사적 보존 가치가 있는 큰 저택들을 역사적 건물(Historical Site)로 지정하고 리모델링한 뒤, 미 육군이 관리하도록 하였다. 미 육군 지휘참모대학 학교 부지 내에도 이런 저택이 많았다. 학교본부는 비교적 큰 관사를 대령급 참모와 각국 교환교관/연락장교들에게 집기/가구와 함께 (All furnitured) 고정적으로 임대(월 $1,000)하여 주었다. 

리모델링한 미국 육군 지휘참모대 관사 

건물 모양은 서로 다르지만, 대부분 서구식 집이 그렇듯이 지하실은 창고나 세탁실, 1층은 거실과 식당, 2층은 방과 서재, 3층도 방과 테라스 등이었다. 방 6개, 화장실 4개로, 우리 가족 4 식구가 살기에는 너무 커서, 필자의 어린아이들은 한동안 집을 무서워하였다. 필자에게 스폰서를 자청하였던 Donna와 Jim 내외도 올 때마다, "아직도 정착이 덜 되었니?"라고 매번 물었다. 집이 커서 휑하다고 느껴서일까? 하지만, 이렇게 큰 관사를 제공한 것은 꼭 가족끼리만 살라는 것보다 주어진 직책에 걸맞은 활동도 하라는 의미다. 수 백 평짜리 청와대 본관을 몇, 몇 식구만 살라고 준 것이 아니지 않나?  필자의 집은 1883년도에 지어진 집이었지만 리모델링으로 잘 관리된 집이어서 손님을 초청하기에 좋았다.


이제 미국에 왔고 집이나 가구가 잘 갖추어져 있으니, 필자도 미국 식으로 초청활동을 하였다. 우선, 우리 연락장교단 모임에 집중하였고, 차츰차츰, 교관이나 학교 관계자 등을, 한 번에  4~5 가족을 만찬에 초청하였다. 그러다 보면, 그들도 답례로 우리를 초청하게 되어 자연스레 매주 1-2회 정도 피 초청되었다. 이처럼, 활발하게 사람들과 함께 왔다, 갔다 하면, 피곤하지만, 그래도 매우 보람 있고 재미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더불어 살아가다 보니 남을 더 잘 알게 되고 대인관계도 더욱 풍성해진다. 


어느 날, 미국 주방위군 대표로 지휘참모대학에 파견된 '주 방위군 (Army National Guard)' 선임장교 J가, 5일간의 일정으로 '네브래스카'와 '사우스 다코다' 주의 주방위군 훈련이 있는데, 참관하러 가자는 제의를 하였다. 그는 우리 연락장교단 모임의 멤버로 자주 교류한 사이였다. 모두가 훈련 시간에 일정을 맞추었고, 주방위군이 제공한 소형 군용기가 지휘참모대 비행장으로 왔다. 그런데, '사우스 다코다'로 날아갈 때, 조종사가 우리들을 위해, 비행경로 상의 - 미국의 대통령 4명의 얼굴을 조각한 '큰 바위 얼굴'로 알려진 -  '마운트 러쉬모어 (Mt. Rushmore)'에 근접하여 3차례나 선회하는 특별 비행으로 우리 일행을 즐겁게 해 줬다. 모두가 J의 호의였다. 그 외에도 비록, 짧은 4박 5일간의 일정이었지만, 환대 속에 네브래스카주와 사우스 다코다 주의 주방위군 훈련장을 참관하면서 지역의 많은 인사들을 만났다. 이들 중에는, 한국전 참전 인사들도 있었다. 다시 한번, 좋은 관계를 나누던 주방위군 선임장교의 각별한 배려를 느꼈다..

마운트 러쉬모어 미국대통령 조각

대인관계의 다른 케이스는, 전술한 바와 같이, 옆 사무실 일본군 '엔도' 대령과 함께 미 교육사 예하의 주요 병과학교 - 보병학교 (포트 배닝), 포병학교 (포트 씰), 기갑학교 (포트 낙스), 통신학교 (포트 고든) 및 부사관학교 등을 방문한 것이었다.  이 방문 요청에, 해당 참모는 처음에는 전례가 없다며 보류되었으나, 미 제병협동사 사령관이 이를 승인해 주었다. 덕분에 둘이서 10여 일간 상기 학교들을 공식 방문하였고, 후임자들도 그런 기회를 갖게 되었다. 여기에는, 앞서 언급한 대로, 당시 참모장 '쟈니니' 대령의 조언이 컸다.


다름과 차이의 존중: 잘못된 군사 외교관 사례


우리 교환교관/연락장교단의 모임은 매우 활발하였지만, 어느 날, 새로 부임한 독일 교환교관 ‘괴벤스(Goehwens)’대령은 유별나게도 나토국 장교나 일본 교관에게만 호의를 보였을 뿐, 필자를 포함한 나머지 나라 교관들에게는 아예 관심조차 표명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필자도, 아무리, 독일 국민성이 차갑다고는 하나, 그의 오만한(?) 태도에 내심 불편하여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부인 ‘하이케’가 그의 관사에 우리 부부만 초청한 것을 계기로, 우리는 좋은 관계가 되었다. 아내와 ‘하이케’의 친교는 우연히 시작되었다. 미국 지휘참모대학이 외국 장교 부인들을 위해 운영하는 영어과정에서는 각국 장교 부인들이 돌아가면서 자기 나라를 소개하였다. 아마도 한국인을 처음 접한 ‘하이케’는 아내의 발표를 매우 인상적으로 보았고,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이 꽤 가까워져 남편에게 우정을 선사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한번 마음을 열면 정말 진심으로 대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시, 독일 교환교관/연락장교단은 대령 및 보좌관 소령 그리고 1명의 상사급 부사관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들의 자료수집 및 처리량은 필자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미군에게 있어 독일이라는 국가 위상이 가지는 영향력은 물론, 그의 폭넓은 대인관계, 그리고 나토국가라는 제반 지원 여건으로 인해 그는 참 많은 군사자료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친분이 두터워지자 자연스레, 자료가 필요하다고 요청하면 늘 도와주었다. 필자는 매월 1회 한국 육군으로 보내는 각종 군사자료를 보냈는데, 어떤 달은 그의 도움으로 얻은 자료들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독일군 대령의 생활 수준은 한국군 중령과는 차이가 있었고, 몇 차례 만찬 초청 시마다 유럽식으로 손님을 접대하는 그의 모습은 후일 필자가 오스트리아 대사관에 근무할 때 손님 초청시 마다 많은 참고가 되었다.


그런데, ‘괴벤스’ 대령이 처음부터 필자에 무관심하였던 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참 어이없는 일이 발단이었다.

그가 소령 시절, 독일 지휘참모대학에 다니던 어느 금요일 날 아침, 아침 기도를 하고 있는 무슬림 학생 장교들에게 한국군 유학생(소령)이 다가가서, “아침부터 왜 잠도 못 자게 시끄럽게 떠드느냐?”라고 항의하며, 행패를 부렸다는 것이다. 금요일은 기독교의 일요일처럼 무슬림이 모스크를 찾는 주일이며, 아침 기도는 하루 다섯 번의 기도 중  하나다. 그렇지만, 이 한국 장교는 한국에서 무슬림을 듣지도 보지도 못했으니, '이슬람'은 멀고도 무관심한 종교였을 것이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적대감이 없는데 어찌 그렇게 무지몽매한 일을 벌여 많은 사람들의 지탄을 받았는지…?”


독일에는 1980년대 중반에, 제1차 세계대전 동안 같은 동맹국(추축국)이었던 터키계 무슬림 200만이 거주하여 (지금은 약 400만 이상), 모스크 등 시설도 무수히 많다. 그리고, 무슬림이라면 누구든 하루 5번 기도를 해야 하므로, 무슬림이 많은 미국이나 유럽은 물론, 인천공항 등 세계 각국의 주요 공항, 항만 등에도 '메카'를 향한 '기도실'을 별도로 준비해 준다.

당시, 한국인 유학생 한 명의 타 종교에 대한 심각한(?) 몰이해와 생각 없는 행위로 인해, 그 모습을 지켜본 '많은 현지인이 한국을 마치 동양의 한 '미개 국가'로 여기게 만들었다. 그 일이 70년대 중반의 일이니, 그 한국군 장교에게는 이슬람이 멀고도 멀었던 시절이라 씁쓸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 없는 행위가 그 모습을 지켜본 많은 현지인에게 한국의 이미지를 부정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알고 나니,  군사외교를 한답시고 살아온 필자의 어느 순간, 어느 모습도 누군가에게 괜한 모습으로 보이지 않았을까 걱정도 된다. 무식했던 만큼 우리의 존재가 그들에게 더 크게 부각되는 이유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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