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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웅 Apr 12. 2023

공부 선수와 '1등 지상주의'

글로벌 다양성 이해 (문화 차이, 제25화)

'공부 선수'와 '변별력'

1등 지상주의

좋아하는 것, 해야 하는 것



'공부 선수'와 '변별력'

조선시대에는 과거시험 장원급제로 출세 길을 달리는 게 양반의 염원이었고, 해방 이후의 한국에서도 젊고 유능한 인재를 발탁하려는 사법고시, 외무고시, 행정고시, 기술고시, 입법고시 등등 ‘고시’(考試)라는 제도가 생겼다. 누구든 이런 고시에 한번 붙으면 그야말로 ‘죽을 때까지 잘 먹고 잘 사는’ 구조였으니, 모두의 꿈이었다. 의사면허도 이와 유사하게 한번 따면 평생보장이었으니, 식민지배와 한국전쟁 동안 헐벗고 굶주림을 경험한 한국인들은 그 누구보다도, 신분 상승의 사다리로 지목된 교육에 몰두하였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부모의 염원'이라며 자신의 꿈을 강요하여 대리 만족을 얻으려는 듯, 자신이 하고 싶은 것과 적성에 무관하게, 명문대학의 의학, 법학 등 편협된 분야에 집착하여 많은 과목과 높은 수준을 공부하도록 강요하였다. 


공무원 사회뿐만 아니라, 일반 기업체의 사업주들도 기술인력이나 기능인보다, 우수 학생이 몰리는 일부 명문 대학 출신을 맹신하고 중용하였다. 이처럼, 사회의 인정과 부모들의 지극 정성, 학생들의 치열한 경쟁이 자아낸  명문학교에 대한 동경심과 동문애로 우리 교육은 찬란한 상아탑을 이루어 냈다. 그 과정에서 등록금 문제로 '우골탑'이란 부작용도 생겨났지만.... 결과적으로, 모두가 명문대학이라는 한 방향으로 몰려들어 치열한 경쟁은, ‘어떻게 하면 지원자 중에서 합격자를 객관적으로 잘 선별하나?’에 치중하였고, 그 결과, '변별력'이라는 미명하에 아이들을 어렵게, 힘들게, 불필요하게 공부시키며, 미세한 차이조차 요구하였다.


집집마다 “자녀가 그저 좋은 대학에 들어가길…” 바라는 부모들의 염원에,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변별력'을 갖기 위해, 내신성적에는 물론, 대입 수능 시험 준비에도 시달린다. 내신을 좌우하는 고교 성적표를 보면 과목별 점수와 석차, 그리고 석차 배분율과 등급이 표시되어 있다. 같은 학교 동급생들 몇 명보다 얼마나 더 잘했느냐가 성적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어린 학생이 올린 SNS를 보니, “친구들끼리 점수가 따닥따닥… 내신이 내려갈까 조마조마… 교과서 본문 달달 외우기…”라고 써 놓았다. 이런 글을 보면, 과연 ‘친구들과의 무한 경쟁의 늪’인 우리 교실에서 보다 나은 삶을 향한 교육의 지향점을 찾는 것이 맞는 것인지? 의문이 생긴다. 


한국의 성적위주의 교육은, 전 세계적으로도 매우 독특한 ‘사교육’을 만들었다. 사교육은 기본적으로 '선행 학습'을 통하여, 학교의 학습진도보다 앞서 나감으로 같은 과정을 두 번 거치고, 동시에 기출문제 학습을 통하여 ‘시험을 잘 치르는 방법’의 교육에 주안을 둔다. 점수만 잘 따면 되는 이런 교육에는 그저 유형별 문제 풀이(Pattern Drill)를 통하여 수동적으로 “주어진 문제를 어떻게 푸는가?”라는 풀이 방식에만 골몰할 뿐이다. 이론이나 원리를 따지고, 심지어 도전적, 모험적인 아이디어나 행동을 가르치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  


이런 사교육에 년간 25조 원 이상의 돈이 투입된다. 그중에서 약 5~7조 원은 수학 관련 교육비라니… 돈의 규모도 엄청나지만 무엇보다도 큰 일은 우리 아이들을 그저 수동적인 '문제풀이 선수'로만 양성한다는 것이다. 이런 교육에 익숙한 아이들은 자칫 대학을 졸업하고도 사교육을 받아야만 취업하고, 직장에 들어가서도 사교육을 받아야만 주어진 문제를 풀지도 모른다. 주어진 ‘학습’ 문제에만 기술적으로 반응하는 ‘교과목 위주 공부 선수’들은, 순간순간 바뀌는 다양한 환경이나 전혀 경험치 못한 문제에 속수무책일 수도 있다. 


사실 그런 인재라면, 시시각각 변화하는 사회에서는 의미가 없다. 그래서인가? “학교의 우등생이 사회의 열등생”이라는 말도 나왔다. 시험 이외에의 도전이나 모험, 임기응변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한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이들이, 국, 영, 수 필기시험만 잘 치르면 모범생이 되는 학교 생활을 거쳐, 다시 각종 임용고시에서 필기 성적 결과로 '우수한 인재'로 포장되어 사회의 주요 요직을 독점하였던 것이 사회의 문제였다. 공부선수로서 지식만 가졌지, 보다 중요한 인성, 통찰력, 소통, 협업, 창의력 등등의 현실대응 능력은 갖지도 못한 채… 


2019년 정치권의 화두는 선거법이나 공수처법 등 '패스트 트랙' 법안처리였다. 여, 야의 많은 유명 정치인들이 연루되었다. 하나같이 일류 명문대를 나왔고 일부는 법조계 출신들도 있었다. 이른바, '공부 선수'들인데… 2021년은 이른바 '검수완박'이라는 법안으로 나라가 한동안 시끄러웠다. 정치를 한답시고 민생보다 상대방 죽이려는 법안을 끊임없이 창출해 내는 법대 출신 의원들... 하지만, 그들이 한국 정치를 뒤흔드는 갈등에 대한 해법은 참 보잘것없었다. 학벌이나 스펙이, 포용력이나 설득력, 소통할 수 있는 인성을 대신하기에 너무 부족했다. 오히려, 야전에서 잡초처럼 성장한 '거친 정치인'의 모습이 더 돋보였던 건 필자만의 시각일까?


공무원 학원 강의

우리 사회의 가장 큰 화두가 일자리 창출과 취업이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차라리, 공무원이라도 되고자 하는 ‘공시족’이 무려 40여만 명이다. 대졸자가 '봉사직'인 공무원이 되려고 졸업 후 또 다른 필기시험공부를 한다? 대학에서 무얼 배웠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에만 있는 특이한 현상이다. 그것도 몇 년씩 필기시험공부를 다시 해서라도...? 


돌이켜보면, 입시나 인재 등용 시 필기시험에 의존하였던 것은, 몇몇 유명대학을 포함하여, 년 수만 채우면 졸업하는 학교, 학점 시스템에 대한 불신과 더불어, ‘우리끼리’가 판치는 세상에서, 면접의 객관성 (자주 취업비리 대상이 된다)을 담보할 수 없었기도 하고, 변별력면에서 필기시험만큼 객관화된 점수로 당락을 결정할 수 있는 시스템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0.1점의 차이로 당락이 결정된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큰 손실일 수 있다. 젊은이들이 목을 매는 공무원 시험의 경우, 영어 단어 하나 더 알고, 수학문제 하나 더 잘 풀고, 행운에 맡긴 사지선다형 ‘찍기’를 하나 더 잘했다 해서 인성이나 재능이 다른 이들보다 나으란 법은 없다. 세계 어디에도 이런 식의 필기시험에만 의존하는 공무원 선발시험은 드물다. 진정한 공무원 선발은 절대(?) '어공'이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별로 사명감 없는 ‘공부 선수’보다, 사회나 이웃에게 헌신하고 희생, 봉사할 자세를 가진 인재가 필요하다. 또한, '봉사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봉사를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서구에서는 대학원 입시든 취직시험이든 필기보다 면접을 매우 중요시한다. 물론, 면접 간에 전문지식 내용을 물어본다. 하지만, 개인을 직접 보면서 심층면접으로 그가 살아온 과정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 인재에 대한 평가가 가능하니 굳이 필기시험 따위로 평가할 필요는 없다. 더구나, 직무 연관성도 없는 이상한 문제나, 대학 교수도 못 푸는 문제, 미 언론조차 필기시험 난이도가 ‘하버드 대학’ 합격보다 힘들다고 할 정도의 문제는, 변별력과는 무관할 것이다. “급변하는 디지털 시대의 요구에 성적과 학벌만으로…?” 어림도 없는 발상이다. 


각 기업들이 특정대학이나 출신지방의 차별을 없애도록 ‘깜깜이’ 채용을 한다 하니, 시험과 스펙만으로 사람을 선발하는 방식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제는 봉사활동을 하더라도, 희생하고 헌신하는 자세와 마음으로 참여했던 실적 등을 심층 깊게 확인하는 시스템이 자리 잡지 않을까? 이게 정착한다면, 자연스레 필기시험 이외의 ‘변별력’이 자리 잡을 것이고, 향후 현 업에서 갈고닦은 실력으로 능력을 인정받고, 무능하면 퇴출되는 구조로 급격히 바뀌야만 기업도 경쟁력을 가질 것 같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이 공부선수로서 이렇게 고생, 고생하여 대학에 들어간다 해서 ‘유토피아’가 펼쳐질까? 천만의 말씀이다. 높은 학비에 생활고 그리고 취업 준비 등 그야말로 갈수록 태산이다. 영국과 미국의 대학은 교육의 질이 유럽에 비해 월등히 높은 것도 아닌데, 학비가 년간 수 천만 원대로 매우 비싼 편이다. 한국의 대학도 미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탓인지 경쟁력에 비해 학비가 너무 비싸다. 그럼에도, 최고의 명문대를 포함해서 한국의 대학 중에 대학 간의 서열로도 세계 100위권내 대학은 거의 없다. 


오스트리아 비엔나 대학교

유럽은 기본적으로 공부하려는 이들만 대학에 간다. 독일, 프랑스 등 대륙국가는 학비가 거의 없거나, 의료보험 포함 년 1백만 원 정도로 매우 저렴하다. 저렴한 학비조차 본인이 장학금을 받거나 알바로 조달한다. 게다가 유서 깊은 몇몇 대학을 빼고는 대학 간 서열 차이도 거의 없다. 교수진과 학점 교류는 활발하나 졸업은 엄격하다. 입학만 하면 절로 졸업하는 우리와 다르다. 


예컨대, 오스트리아는, 수능시험 격인 ‘마투라’에 합격하면 대학 진학과, 박사까지 학비는 물론, 의료보험, 공공교통 요금할인 등 혜택이 있고, 결혼하면 교내 아파트도 제공한다. 학생 천국이다. 하지만, 졸업은 어렵다. 그런데, 박사 과정에 유학하였던 일부 한국 유학생은 쾌적한 환경과 문화 속에 귀국을 늦추다가, 십 수년간 학생 신분만으로 보내는 바람에 귀국 적기를 놓쳐 한국 내 동기들보다 사회적 위상이 뒤처지기도 했다.


또한, 독일에서는 무슨 대학을 졸업했다 해서 우대하기보다, 오히려 직장근무 경력을 더 선호한다. 때문에 같은 직장에서도 '일반고등학교'(Gymnasium)을 나와 대학을 졸업한 초임이, 같은 나이 또래의 '실업고등학교'(Hauftschule) 경력자에 비해 한동안 급여면에서 낮을 수도 있다. 사실, 독일 기술자들은 무슨 대학 학위보다 오히려 ‘장인(Meister)’ 칭호를 더 내세운다. 도제(Apprentice) 생활을 거쳐 얻은 기술이니 남다른 자부심이 있다. 혹여, 직업과 관련되는 지식이 필요하면, 전문대학 등에 다니며 얼마든지 대학을 다닐 수 있다. 그러니, 학비를 내면서 굳이 대학에 진학할 이유가 없는 거다. 독일의 대학 진학률은 거의 30%대 초반이다.


한국은 OECD 국가 중에 대학 진학률 1위 (69.8%)로, 미국 (47.8%)이나 프랑스 (43.3%) 보다 훨씬 높다. 서구와 달리, 한국의 대학은 모두가 가야 할 필수 코스가 되었다. 하지만, 많은 대학생이 대학과정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통계도 있다. 진학률이 높다는 것보다, 대학 공부를 할만한 사람들을 훌륭한 인성이나 능력과 자질을 갖춘 유용한 인재로 키우는 게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필기시험만 잘 보는 '공부 선수'보다, 실질적으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팔방미인'으로 양성하는 시스템이 개인이나 사회에 보다 더 중요할 것 같다. 이조시대, 생산력 없이 글만 읽던 양반 문화는 '안정된' 삶을 추구하다가 외세로부터 혹독한 시련을 겪었지 않았는가? 


1등 지상주의

한국인들 개개인은 어릴 적부터 가정과 학교에서 ‘1등 지상주의’ 교육을 받았다. 교육의 목표가 '공부선수' 줄 세우기였다. 그러니, 수단과 방법 등 과정을 살피기보다, 영악스럽게 하더라도 결과만 1등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전장에서도 승자만 살아남았듯이, 철저한 ‘승자 존중의 문화’였다. 피폐해진 사회에서도, 제한된 자원이나마 누가 더 많이 갖고, 누가 더 좋은 위치를 갖느냐? 하는 처절한 경쟁을 경험한 현실이기도 하다. 


이처럼, 모두가 죽자고 1등이 되기 위해 노력한 결과였을까? 우리 사회는 단 시간에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한 명의 1등 만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동안 수십 명의 2등 이하는 그 존재가치 마저 사라져 버렸다. ‘더불어 사는 사회의 룰’이 사라진 것이다. 결과는 참혹하다. 누구든, 어떤 경쟁이든 간에 1등을 못하면 승복을 하기는커녕, 분하고 억울해서 울음보를 터뜨리기 일쑤다. 때로는, 패배자가 경쟁자인 승자를 진정으로 축하해 주기보다, 어떻게 하든 깎아내리려 하기도 한다. 승복을 못하니 투서가 남발하고 음해가 무성하다. ‘사촌이 논을 사도 배가 아프고, 남 잘되는 꼴은 결코 보지 못한다.'라는 말이 그냥 나온 말일까?


한때, 일본 교육은 한국 교육의 모델이었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교육은 일본과 많이 다르다. 서로의 관점의 차이는 뚜렷하다. 한국이 '잘 먹고 잘살기 위해' 피땀을 흘리며 좋은 직장을 찾는 ‘결과 지향적’이라면, 일본은 살만해서 그런지 '순간순간의 성장에 보람'을 느끼는 ‘과정 지향적’이라 한다. 어떤 일본 기자는 춤과 노래로 사랑받는 젊은 층들의 ‘아이돌(Idol)’에서 한국-일본 간의 차이를 찾았다. (중앙선데이, 2018.10.13일 자)


고시엔대회 참가팀의 관중에 대한 인사(출처:머니 투데이)

한국의 ‘아이돌’은 몇 년 동안 연습생으로서 노래나 춤을 배우는 혹독한 과정을 거친 뒤, 완성도가 높은 상태에서 데뷔한다. 이에 비해 일본의 ‘아이돌’은 미숙한 상태로 데뷔하여 팬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이들을 응원하고 그들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는 방식이란다. 이럴 경우 프로그램이 진행함에 따라 점점 더 잘하는 모습을 보이게 마련이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좀 '미숙한' 일본 ‘고시엔 (甲子園)’의 고교 야구가 '완숙한' 일본의 일반 프로야구 못지않게 대중의 사랑을 받는 이유도 알 것 같다.


이 신문은, 한국 몇몇 대학의 '실용음악과' 입학시험은 수 백대 일의 경쟁이었다고 한다. 보도 내용은, 수험생들은 재수, 삼수를 무릅쓰며 입시를 준비하는 터라, 바로 프로로 진출할 수 있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은 상태여서... 막상 대학에 입학하면 별로 배울 것도 없는데, 무엇 때문에 몇 년씩 재수하여 대학에 입학하려는지 알쏭달쏭하다는 논조였다. 우리 대학이, 학생들의 미숙함을 채우고 다양한 꿈을 갖게 해 줄 거라고 '믿어서'일까? 아니면, 같은 대학 출신으로 같은 분야에서 상부상조하며 안정적인 직업을 유지하기 위한 '관계 맺기' 때문일까? 어쨌든, 유명세를 타고 출세하려는 게 이들 공부의 목표일 텐데...


올림픽 금, 은, 동메달

승부욕은 ‘페어플레이’가 강조되는 올림픽 등 큰 대회 스포츠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는 금메달의 개수만으로 참가의 성과를 따진다. 은메달이나 동메달도 대단한 성과이지만, 이들 메달은 경쟁국과 금메달 개수가 같을 때의 비교대상일 뿐일 정도로... 예전에 일본이 정한 서열 기준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여전히 그걸 당연한 듯 여기고, 언론 등에서도 종합 순위라며 보여준다. 하지만, 미국이나 서구 언론은 메달 총 개수로 서열을 매긴다. 그리고, 일본도 이젠 서구식 방식을 따른다고 한다. 이제, 우리도 '1등 지상주의'를 탈피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스포츠 승부에 대한 집념이 강한 만큼, 때로는 미숙한 모습의 애국심을 보인다. 애매한 판정으로 불이익을 받거나 심판의 편파적인 판정이라 생각되면 거의 전 국민이 이구동성으로 비판에 가세한다. 사회 전체가 이런 모습에 감정적으로 동조하고, 결과에 승복지 못하는 모습은 외국인에게 이해하기 어렵다. 여기에, 선수들의 감정 표출도 때로는 성숙지 못한 듯하다. 언젠가 TV 중계를 보았더니, 경기에 지고 난 뒤 경기장에 앉아서 하염없이 울거나,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분노를 삭이지 못하는 경우를 보았다. 스포츠 게임일 뿐인데…


사실, 심판에 대한 피해 의식은 특히, 남미 등 후진국 스포츠에서 많이 보인다. 그런데, 승복지 못하는 행동은 심지어 운전 때도 나타난다. 보복운전을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내 앞에서 앞 차가 방해가 되면 질서나 규정도 무시한다. 사고 위험조차 감내한다. ‘감정이 상하면 앞, 뒤를 안 보고 말지, 절대로 굽히지 않는다’. 그러면, 혼돈과 무질서만 존재할 뿐이다. 결국 승자가 없는 게임이다. 나보다 못한 자에게 1등을 내어주고, 내가 2등이 되는 일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며, ‘내 생애에 양보란 없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살아가는 이가 많다. 


스포츠 밖의 사회에도 우등과 열등이 존재한다. 그런데, 사회에서는 1명 만이 1등이 되는 게 아니다. 미국 초등학교는 학생 모두가 각각 다른 상을 받도록, 분야별로 다양한 종류의 상을 준비한다. 선생은 어린이들이 잘하는 분야를 찾아 각자의 성취감이나 자존감을 높이는데 주안을 둔다. 공차는 것, 그림 그리는 것, 글씨 쓰는 것, 노래 부르는 것, 산수문제 잘 풀기... 등등 각자가 잘하는 것을 일깨워 주고 잠재능력을 북돋아 주는 것, 그게 교육이다. 국, 영, 수 잘하는 게 전부가 아니니, 굳이 상을 적게 줄 이유는 없다. 각 개개인이 잘하는 분야를 찾아서 모두가 승자가 되고, 1등이 되게 해야 한다. 자존감을 갖는 것은 더불어 사는 지혜에서 나온다.    

 

좋아하는 것, 해야 하는 것

필자 큰 아이는 초, 중, 고교를 미국계 학교에 다녔다. 하지만, 나름 적성을 찾아 KAIST에 입학하였고, 재학 중 일본 ‘W’ 대학에 교환학생으로 1년간 공부하고 돌아왔다. 공부를 잘하니 부모로서 나름 기특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공계 대학을 졸업하던 아이가 느닷없이, “아빠, 나 '일본라멘' 식당을 개업할래”란다. “뭐? '일본라멘'? 그게 뭔데?”가 나의 반응이었다. 아니, ‘공학자가 식당 개업이라니…?’ 식당에 대한 나의 편견이 지나쳤던가, 아니면, 무지한 건가? (사실, 그때만 해도 서울에 '라멘' 식당이 전무하였다) 


LA일본 라멘 식당 음식(출처:미주중앙일보)

“재미 곁에 '의미'있고, 재미 위에 '성과'있다”라는 말이 있다. 누구든 “좋아서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하는데... 아이가 평소 요리에 관심이 많고 재능이 있어 늘 대견해했지만, “그건 아니다”는 필자의 강한 반대에 아이는 할 수 없이 꿈을 접고, 십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벤처기업’을 하느라 고생 중이다. 지금도 뭔가를 위해 노력하는 나이 든 큰 아이를 바라보면 문득 미안해진다. “내가 무얼 안다고? 그렇게 반대를 했을까! 그때, 그냥,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게 놔둘걸…” 아이는 "괜찮다. 철없을 때의 일"이라고 말하지만, 지금 와서 필자의 무지와 편협함을 되돌릴 수 없으니 더욱 후회스럽다.  


그런데, 그로부터 몇 년 전, 필자가 오스트리아에 근무할 때, 어느 날 친하게 지내던 KBS-1 TV 특파원이 ‘오스트리아 호텔학교’에 대해 취재하고는, 괜찮은 내용이라며 방송을 보라고 권한 적이 있었다. 입학도 어렵지만, 13세부터 몇 년 동안 호텔 요리사나 전문 경영인이 되기 위해 호텔의 서빙으로부터 고객관리까지 체험적으로 익혀 나가는 과정을 보면서, “과연, 서구의 전문 직업인이란…”하고 감탄하고, 올바른 교육이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정작 내 아이가 그와 유사한 길을 간다니 '이건 아니다'며 ‘굳은 머리’가 용납지 않았던 거다.  


프랑스는 중학교부터 학생들에게 1주간씩 ‘인턴쉽 프로그램’에 참여시킨다고 한다. 평소에 하고 싶어 하는 일들을 해보게 하면서 학생의 적성에 맞는 진로를 찾아준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중학교에서 유사한 개념으로 2학기 동안이나 자유학기제를 운영하며 각종 체험활동을 통하여 아이들의 적성을 찾아주려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사회의 통념이 바뀌지 않는다면, 필자처럼 부모의 완고함이나 편협함이 아이들의 장래에 걸림돌이 되지 않을는지 걱정스럽다. 만약, 전교에서 공부도 제일 잘하고 똑똑한 아이가 제빵사가 되겠다면, 어느 부모가 선뜻 그 아이의 장래를 제빵사로 키우려 할까? (제빵사 폄훼가 아니라, 직종별 선호도 순서면에서) 


2019년 초에 ‘SKY…’라는 TV 드라마가 방영되어 많은 사람들이 시청하였다 한다. 특정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벌이는 엄마와 아이의 이야기가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아이의 삶을 직업의 귀천, 부의 생성과 연계 지어, 자식에게 자신의 꿈을 투영시키려는 부모의 허영심을 다룬 드라마였다. 이런 것을 하나의 문화나 가치로 받아들이는 사회적 분위기가 바뀌지 않는 한 이런 스토리는 계속될 듯하다. 부모의 욕심대로 판, 검사가 되고, 의사가 되는 것은 아이들로서는 '해야 하는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는 사람은 그야말로 소수에 불과하다. 그리고, 모두가 그렇게 할 수도 없거니와, 그렇게 된다고 해서 행복해진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전공 분야에 따라 석, 박사가 되어도 가시밭 길이긴 하다. 배움의 수준에 걸맞은 취업 자리가 매우 제한적이어서이다. 2018년도, 서울대 이공계 대학원은 석사, 박사, 석박사 통합 과정 모두에 개학이래 처음으로 ‘정원 미달’ 사태를 맞았다. 같은 해, 일본에서는 '박사, 학자'가 초등학교 남학생들의 장래 희망 직업 1위로 선정되었다 한다. 한때, 스포츠 스타가 1순위가 되었던 적도 있지만, 꿈을 키워가는 아이들의 눈에 '돈 많이 버는 것'보다도, 사회적 대우나 존경심, 그리고 신뢰받는 모습이 더 크게 부각된 걸까? 같은 또래 아이를 둔 한국의 부모들과 일본 초등학교 아이들의 시각을 보면 미래를 점칠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에는 똑똑한 학생이 많으나, 부모의 교육 탓인지 아이들의 삶의 목표는 하나같이 ‘잘 살겠다’는 물질 지향적인 듯하다. 하지만, 물질지향보다, 잣대를 바꾸어 이타적, 헌신적으로 가치의 중심을 재정립하는 것이 더 나은 사회를 위해 필요하지 않을는지? 다가오는 세상에서 세상을 바꾸는 사람은, 기술적으로  '공부만 잘하는' 사람보다, ‘세상에서 뭐가 중요한지?’, ‘세상을 발전시키는 것은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찾아가는 사람일 것이다. 세상은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면되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생님들도 똑똑한 인재에게, ‘Know How’보다, ‘Know Why’를 알도록 고민하고, 재능을 발휘하도록 격려하면 얼마나 좋을까? 일류대학에 몇 명을 더 보내는 게 스승의 가치는 아닐 것이다. “해야만 해서 하기보다, 하고 싶어서 마음껏 하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되게 하면 어떨까? 당연히 인생이 즐거울 것이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우리 학생들 모두가 어른이 되어 ‘즐거운 삶’을 사는 시간이 빨리 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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