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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웅 Oct 20. 2023

'문화 차이' 이해와 전쟁터의 전법

낯선 전장, 낯선 접근

상대를 알려면 ‘문화 차이’에 대한 이해와 존중은 기본

‘문화 차이' 이해가 가른 전투의 승패 사례


낯선 전장, 낯선 접근

'차이와 다름'에 대한 이해의 필요성을 죽기, 살기로 싸워야 하는 전쟁의 관점에서 살펴본다.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는 손자병법 제일 첫 구절이다. 전쟁은 상대가 있으니, ‘나 자신을 아는 것’과 동시에 ‘상대를 아는 것’이 ‘전승의 요체’라는 것인데…. 문화적인 배경이 전혀 다른 동양과 서양이 생사를 가르는 전쟁터에서 만나서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전쟁사를 보면 한국전쟁에서 미-중은 서로의 접근 방법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상대에게 헷갈려하는 부분이 많았다. 문화와 역사가 다르니, 당연히, 국가별, 사회별로 생각하는 방법이 달랐고, 종교나 문화가 다른 만큼, 가치 기준도 다르니 서로 상대의 다음 행동을 예측하기 어려웠다.


미국과 중국은 각각 세계 최강의 군사 강국답게, 수많은 전쟁을 연구하고, 발전시킨 비법들을 전수받았다. 서구의 ‘전쟁론’과 중국의 ‘손자병법’이 대표적인데, 공통점은 ‘전쟁과 정치’의 조화에 있지만, 방법상의 주안은 다르다. ‘전쟁론’이 적을 궤멸시키고, 적 영토를 탈취하는 ‘양의학적 외과수술’이라면, ‘손자병법’은 ‘싸우면 이기되’, ‘싸우지 않고도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니, 기와 혈을 북돋우는 ‘한의학’과도 같은 맥락이라 할까….


예컨대, 한방은 어떤 의사가 침이나 한약으로 환자를 치료한다는 것은 알지만, ‘어떻게’ 치료하는지는 모른다. 반면에, 미국인이 익숙한 병원 치료는, 모두가 아픈 부위를 째거나 도려내거나 화학 약품으로 원인을 제거하는 직접적인 양방치료였다. 이에 비해, 한방은 기와, 혈, 맥 등 인체의 조화와 균형을 다스리는 침이나 한약 등 간접적인 방법으로 환자를 치료하였다. 미‧중 국교 수립 이후, 양국 인사의 잦은 왕래로 에피소드가 많았다. 그중 하나로, 미국인은 심한 두통이 있는 환자에게 머리에 큰 침을 놓겠다는 한의사를 이해하지 못했다. 


21세기 이후 미국이 참전한 전쟁은 모두 해외 원정이었다. 19세기 중반 진주만 기습 시까지, 미국은 친 일본적 행보를 보였지만 전쟁 상대로서 일본의 존재를 거의 알지 못하였다. 단지, ‘체구가 왜소한 일본인은 먹는 음식이나, 먹는 방식조차 다른, 민주주의가 뭔지도 모르는 인종적으로 다소 열등한 집단’으로서 일종의 외계인 모습 정도로... 그러니, 그들의 ‘반자이’ 공격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그들에게 포로가 된다는 것이 상대의 군사문화에서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였다. 자신의 가치기준과는 전혀 달랐다. 결과는 경악의 연속이었다.


미국은 태평양 전쟁 동안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국-공합작 이후에는 항일 전쟁을 수행하는 국민당 군대는 물론, 중국 공산군 근거지 ‘옌안’에도 ‘옵서버(관찰조)’ 역할로 많은 군인과 종군 기자를 주재시켰다. 이들은, 중공의 중앙군과 팔로군, 그리고 신 4군 지휘관들과 같은 밥을 먹고, 노래하며 훈련과 군사정보를 공유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평가한 보고서에는 미국이 중국 국민당에게 지원한 물자의 일부만이라도 중국 공산당에게 제공하면 이들은 언제든 중국 전역을 장악할 능력이 있다”라고 할 정도로 공산군의 의지나 능력을 정확하게 판단하였다. 하지만, 이는 전장 지휘관들이 구사하는 전법에 대한 정보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내용이었다.


1950년 발발된 미‧중 전쟁은 어땠을까? 미국에게는 문화적 뿌리가 깊은 중국과의 전쟁은 또 다른 차원의 전쟁이었다. 미군은 일본군과 남태평양 등 광범위한 지역에서 몇 년간 싸우며 동양의 문화와 사고방식을 많이 경험하였고, 경이로운 부분도 알게 되어, 동양인을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하였을는지 모른다. 하지만, 장구한 문화의 광대한 대륙 중국은 섬나라 일본과는 또 달랐다. 일본과 중국의 차이가 프랑스와 독일의 차이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다른 문화적 가치 기준을 갖고 있다는 사실도 전쟁을 치르기 전까지 잘 알지 못하였다.


미-중이 처음 격돌한 중공군의 1차 공세에서, 제일 큰 피해를 입은 미군은 미 제1기병사단 예하 8 연대였다. 기습에 성공한 중공군은 다수의 미군 포로를 수집하였다. 전장에서는 비록, 서로를 죽이지만 일단, 포로가 되면 ‘제네바 협약’에 의해 신변 보호를 받게 되어있다. 하지만, 1차 공세에 성공한 중공군 지휘부는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포로를 전술적으로 활용할 방법을 모색했다. 당시, ‘맥아더 사령부’는 중공군의 1차 개입을 그저 북한에 대한 단순한 ‘체면치레’ 정도로 과소평가했다. 이를 인지한 중공군 지휘부는, 일부 포로를 풀어 주면 ‘맥아더’ 사령부가 중공군의 차후 공세에 대한 경계심을 갖지 않을 것으로 기대했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 ‘맥아더’는 필리핀을 침공한 일본군에 밀리며 ‘바탄’ 반도에서 고전하다 그가 이끌던 미군과 필리핀군 8만여 명을 버리고 호주로 도주했던 적이 있다. 일본군은 자결을 할지언정 포로가 되는 것을 치욕스러운 비겁자로 간주했다. 포로가 된 8만여 명의 미군과 필리핀군 대부분은 일본군의 혹독한 포로 관리에 견디다 못해 대부분 병사하거나 불구가 되었다. 그런 아픔으로 '맥아더'는 미군 포로에 관심이 각별하였다.


이런 점을 이용한 중공군은 ‘마오’의 승인을 얻어, 제1차 공세에서 확보한 일부 포로를 풀어주는 술책을 구사하였다. 이런 간계는 오랜 전쟁의 역사에서 물려받은 유물이었다. 하지만, 유엔군은 여러 면에서 중공군의 전법이나 간계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때문이었을까? 미군의 X-mas 공세를 약한 줄만 알았던 중공군이 역공세로 되받아친 제2차 공세로, 유엔군은 큰 혼란에 빠져 엄청난 피해를 입고 급하게 38도선까지 패주 했다. 외국의 일부 군사 전문가는 이 청천강 전역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비견할 만큼 크게 전사적 의미를 부여한다.


이처럼, 같은 문화권의 상대와 달리, 문화와 이념에 대해 상대에게 무지한 이에게 전쟁은 상상을 초월하는 난감한 문제였다. 한국전쟁 간에 벌어진 미‧중 전쟁을 되돌아보면, 미국은 중국의 낯선 전법에 허둥대었고, 중국은 미국의 엄청난 물자와 화력에 압도되었다. 미‧중 전쟁은 서로에게 그저 찌르고, 베어 버리고, 화력으로 제압하는 단순한 살상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전쟁이었다. 6‧25 전쟁을 수행하던 ‘트루먼’ 정부의, 한국이나 중국의 역사, 문화에 대한 정확한 인식 결여는 전투를 수행하던 군인들에게 까지 엄청난 고통을 주었다. 


과거, 미국이 참전하였던 한국전 등 아시아는 물론, 아프리카, 중동지역의 각종 분쟁을 들여다보면, 미국이 다문화 다인종 사회라지만, 외국인 특히 비백인계에 대한 문화적 다양성 차이(Cultural Divergence)’의 이해는 다소 부족하지 않나 싶다. 전쟁에 임하는 미국의 무지와, 상대에 대한 잣대나 기준이 흔들려 보여서다.    


상대를 알려면 ‘문화 차이’에 대한 이해와 존중은 기본

누구든 모르는 상대에게 접근하려면 ‘문화 차이’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전제되어야 한다. 필자가 미국에서 군사교육을 받을 때, 같은 반에 아프리카 ‘수단’에서 온 공군 조종사가 있었다. 그는 소련에서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MIG 전투기를 자국으로 받아갔던 인물인데, 쿠데타로 친미정권이 들어서자, 이제 미국 정부가 제공하는 전투기를 인수하러 왔었다. 미소 냉전 시절, 초강대국 두 나라를 경험한 그에게 양국의 차이를 물었더니, 그의 관점은 뜻밖에도 ‘정치 군사적’이 아니라 ‘종교적’ 관점이었다.


그는, 소련은 비록 많은 전투기를 주지 않았지만 한 대를 주더라도 주요 본체와 더불어 수리부속품예비부품 및 필요 공구까지 심지어 탄약까지 포함하여 한꺼번에 무상으로 주었다”라고 한다. 하지만, 미국은 처음에는 다수의 전투기를 무상으로 제공하였지만나중에는 탄약은 물론각종 수리부속품이나 공구류는 별도로 구매하게 하였다.” 마치 ‘잉크젯’ 프린트처럼 기기는 싸지만, 잉크값을 비싸게 파는 방식인데….


이 때문일까? 그는 소련인(불신자)들은 마음이 따뜻한데미국인(이교도)들은 마음이 친절하다고 평하였다.” 이슬람 무슬림으로 살아온 철저한 유신론자인 그는, 세계 적화를 지향하던 무신론자인 소련인(불신자)에 대해 화를 내어야지만, 오히려 자본주의적, 물질중심적인 미국인(이교도)의 태도에 좀 더 화가 났던 것 같다. 미국은 원조를 제공하면서도 준 만큼 감사받지 못했던 것일까?” 아마도, ‘물질’보다 ‘정신’적 경건함을 추구하는 무슬림에게조차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접근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그의 답변에… 필자도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무지를 많이 느꼈다.   


필자가 한때 근무하였던 이집트에서도 미군이라면 ‘십자군’을 들먹이며 치를 떠는 무슬림이 많았다. '8, 9백여 년 전의 십자군에..? 미국은 이집트에게 매년 수십억 달러의 경제, 군사원조를 주었지만, ‘아프간을 침공’한 소련에 대한 무슬림의 증오와 비슷하였다. 이는, 돈의 문제가 아니었다. 미국이나 소련이 핵무기가 없어 베트남과 아프간에서 패했을까?” 현지 문화와 종교에 대한 무지가 패배를 불렀다. 상대의 문화나 정서에 대한 분석과 현지 이해가 부족했다.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면, 주민의 마음을 살 수 없고, 무력으로만 승리할 수 없다. 

    

‘문화 차이’의 이해가 가른 전투의 승패 사례

중공군을 난생처음 접한 미군은 중공군에 대한 무지와 다른 잣대가 스스로의 생각과 행동을 옭아매는 데 한몫했다. 전혀 다른 의미의 ‘기습’을 당한 셈인데…, 중공의 개입을 예상치 못한 미군은 적전술에 대한 연구도 없었고, 이질적인 문화 차이로 인하여 상대의 전술적 의도조차 파악하기 어려웠다. 많은 전투사례를 돌아보면, 상대를 알고 적의 의도를 파악하여 대처하거나 의표(意表)를 찌르면 승리하였지만, 그 반대는 참혹하였다.


제공권을 장악한 미군은, 막강한 화력과 엄청난 기동력으로 양공, 양동작전을 병행하며 정면을 돌파하는 전법을 선호하였다. 반면, 기동과 화력이 열세한 중공군은 야간전투, 위장, 매복, 침투, 우회, 유인 격멸 등 각종 기공법으로 전술을 짰다. 중공군 제1차 공세의, ‘운산 전투’는 매복과 우회침투였고, 제2차 공세 때에, 서부와 동부전선에서 미군 1개 사단씩이 호된 곤욕을 치른 것도 매복과 우회침투, 포위격멸 때문이었다.


특히, 동부전선의 ‘장진호’ 전투에서, 맥아더 사령부나 미 10군단은 항공정찰에만 의존한 결과, 중공군의 포위망 시도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실제, 영하 30도의 날씨에 수만 명의 중공군이 눈 덮인 산악지형에서 포위망을 형성하고 매복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한 미군 장성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의 상식과 가치 기준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웠으니까... 전쟁에 대한 승리의 열정은 상대의 의도를 넘어서는 비상식을 감행하기도 한다.


반면에, 중국인의 특성을 알고 잘 대비한 사례도 있다. 예컨대, 미 해병 1 사단장은 어릴 적 부모와 중국에서 생활하여 중국 문화와 중국인에 대한 어느 정도 감각이 있었다. 그가 받은 인상은 중국인은 음흉한 면이 있어 조용하면 뭔가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스미스’ 사단장은 적이 공격하기 바로 직전의 소강상태에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장진호 남단의 야지에 공중보급과 환자수송을 위한 임시활주로를 건설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런데, 이게 미군의 체면을 살렸다. 이곳에서 수천 명의 부상병을 일본으로 이송하였다.


한편, 서부에서 미군이 호되게 당한 ‘군우리’ 전투는 지휘관의 판단 착오였다. 당시, 청천강 선에서 철수를 강요받던, 미 2 사단장 ‘카이저’ 소장에게 2개의 철수로가 있었다. 하지만, 철수에 유리한 도로는 그 일부가 인접부대 관할 지역이다 보니, ‘카이저’는 비록 ‘애로’ 지역이지만 그의 관할에 있는 도로를 철수로로 택하였다. 그런데, 이게 패착이었다. 중공군은 미군은 작전 간 전투지경선의 의미에 충실한다는 속성을 알고, 그 도로를 선점하고 미 2사단의 철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상대에게 의도를 읽힌 결과는 처절한 참패였다.


예상을 뛰어넘는 적진 침투 전술도 인상적이다. 1951년, 5월 강원도 ‘현리 전투’에서 중공군 1개 중대는 야간 13시간 동안 무려 25km의 길도 없는 산악을 달리다시피 하여 국군 3군단의 퇴로인 ‘오마치 고개’를 확보하고 길목을 차단했다. 퇴로차단의 공포에 질린 3 군단장이 항공기로 도주하자, 군단 6만여 병력이 대부분 장비를 유기하고 뿔뿔이 흩어져 산속으로 도주하는 수모를 당했다. 이 중공군 1개 중대는 침투하는 동안, 휴식도 없이 오로지 ‘오마치’라는 목표만 보고 내달렸다. 대단한 집중력이었다. 이들은 전투영웅(?)이 되었다.


하지만, 중공군 또한 유사한 방식으로 사고하는 편협성으로 인하여 많은 실수를 범하였다. 제1차 공세 시에 화력과 기동의 열세를 절감하던 그들은 국군을 미군으로 오인하여 회피하였고, ‘인천상륙작전’을 목도한 중공군 지휘부는 1952년 ‘상감령 전투’ 당시에도 미군의 ‘원산 상륙작전’ 가능성에 극도로 신경을 곤두세웠다. 중공군은 미군의 후방지역 상륙작전 가능성을 염려하여 전쟁 내내 많은 병력을 해안 지역에 예비로 배치하였다.


미군과 중공군의 차이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경제력의 차이였다. 보급물자의 부족을 별로 느끼지 못한 유엔군은 중공군이 열악한 보급지원으로 작전지속 능력이 부족한 사실을 간파하는 데까지 무려 5개월 이상이 걸렸다. 한 달 동안 조용히 숨어있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8일 정도 맹렬히 공격하고는 다시 사라진다...?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리지웨이’의 호기심과 의문으로 발견된 적의 약점으로 전장의 주도권을 뒤집어 놓았다.


문화적 차이에 더하여, 한반도는 전 국토의 70% 이상이 오밀조밀한 산악지형이다. ‘지형 윤회설’에서 노년기 지역인 한국의 산악은 미국과 유럽과 달리, 찌를 듯이 가파른 큰 산이라기보다는 높고 낮게 이어지는 능선들이다. 한국에 처음 왔던 미군 군사고문단은 지형연구도 없이 그저 산악이라는 이유로, 한국은 전차가 기동 하기에 부적합한 지형이라며 한국에 단 한 대의 전차도 주지 않았다. 이에 비해, ‘스탈린’은 250여 대의 전차를 제공하였다. 덕분에, 전쟁 초기에 소련제 전차가 종횡무진 전선을 헤집어 국군은 후퇴의 충격을 받았다.


한반도는 지형상 도로가 덜 발달되어, ‘걷기’에 의존하는 중공군에게 유리하였지만, 차량 등 ‘탈 것’에 익숙하던 미군에게는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자연히, 미군은 도로 따라 평지에 진지를 구축하고, 웬만한 산악 지역 방어는 국군에게 맡겼다. ‘리지웨이’ 미 8군 사령관은 이런 식의 전투를 수행하다가 번번이 산악으로, 우회 기동하는 중공군에게 패배당하는 부하들에게 극도로 분노하였다. 


특히, 중공군의 야간작전은 미군과 국군을 엄청나게 괴롭혔다. 역설적으로 화력과 기동력이 약한 데다 주간에는 미 공군기의 시도 때도 없는 공폭 하니 백주대낮에 공격은커녕 숨어 있는 게 차라리, 생존의 수단이었다. 낮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가, 밤만 되면 달려들었다. 중공군은 박격포와 수류탄 공격이 주요 수단이었다. 수류탄은 투척거리가 30여 m여서, 미군에게 최대한 접근한 뒤 수류탄을 던지고 죽어갔다. 그러면, 또 다른 중공군이 어디선가 달려들고… 이른바, ‘인해전술’이었다. 이런 전투가 밤새 이어졌다. 미군 최강 미 해병도 그 엄청난 현실에 얼이 빠졌다. 결과적으로, 낮에는 잠자고 밤에만 활동하다 보니, 오히려 상대가 싫어하는 전장 환경이 된 것이다. 누군들밤에 편안히 자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야간전투는 중공군의 단골 메뉴였다. 


미군의 대응은 항공과 포병으로 구성된 엄청난 화력전으로 공격하는 적에게 결정적 타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밴 플리트 탄약량이라는 무제한의 화력지원으로 전쟁의 주도권이 바뀌었다. 중공군이 다시는 기동전을 감행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국-공내전시 국민당군의 포병소리를 음악소리로 알았다던 중공군 사령관 펑더화이조차 "미군의 화력에 얼이 빠졌다"라고 술회할 만큼 미군의 화력은 엄청났다.


장군, 멍군이랄까? 중공군의 공세가 좌절되고, 전선이 교착되어 진지전으로 전환되자, 화력 열세에 빠진 중공군이 생존 전략으로 선택한 ‘갱도전’은 미군에게 매우 생소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이오지마’ 등지의 태평양 도서공략 시, 일본군의 동굴 진지로 많은 피해와 어려움을 겪었지만, ‘진지전’이라는 고정관념에 집착한 미군은 일반 참호와는 달리, 갱도 속의 갱도를 구축한 중공군의 ‘갱도 진지’ 전술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였다. 


미군은, ‘상감령 전투’에서 낮에 점령한 진지에서 밤이면 유령처럼 적이 나타나 후방을 치는 갱도 전술에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물과 식량 없이 갱도 속에서 견딜 수 있었을까?’ 미군의 상식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극단적인 전법으로 여기에도 악전고투하였다. 이를 보면, 낯선 전장에서 중공군은 전투력, 지형적 적응성, 생존성 향상 등에 최적화한 전법으로, 전술 교범에 나오는 대로 ‘화력과 기동으로 적을 제압한다’는 정형화된 공식에 집착하던 미군을 압도하였다. 군사교리는 기준일 뿐 전쟁은 상대에 대한 이해가 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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