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성웅 Dec 23. 2022

영욕의 역사를 지닌 '비엔나'

어느 군사 외교관 이야기 (오스트리아, 제5화)

신성로마제국과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도

보-오 전쟁과 오스트로-헝가리 제국

흘러간 제국의 영광 - 비엔나 군사박물관



신성로마제국과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도

오스트리아의 역사는, 유럽 역사의 큰 부분이다. 비록, 흘러간 제국의 영광이지만 '음악과 예술'의 도시만큼이나 '비엔나'(빈)의 역사 관련 볼거리, 알 거리는 방대하다. '비엔나'는 유럽 문명의 주류였던 로마제국의 계승자인 게르만족 ‘프랭크’ 왕국의 후예로 신성로마제국의 정통성을 자처하며, 로만 가톨릭(천주교)이 국교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도였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한때, 러시아를 제외하고 유럽에서 가장 큰 대제국을 이룬 적도 있었지만, 종교개혁으로 벌어진 ‘30년 전쟁’을 종결시킨 ‘베스트팔렌 조약(1648)’으로 인하여  각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였다, 

1683년은 서구의 역사에서는 매우 의미 있는 한 해였다. 발칸반도에서부터 치고 올라온 이슬람교도 터키군이 서구의 심장부인 신성로마제국의 수도 ‘비엔나’까지 진출하자, 전 서구 기독교 사회가 이슬람 공포(‘이슬라모포비아’)에 떨었고, 이슬람은 한껏 위세를 뽐내며 서구에 대한 우월을 과시하였다. 당시 터키군의 군세는 서구를 압도할만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유명무실한 신성로마제국의 후예를 자처하던 합스부르크 왕가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지만, 폴란드 등 주변국과 기독교 연합군을 결성하여 9번의 전투를 치르며 천신만고 끝에 '비엔나'에 진입한 이슬람교도 터키군을 물리쳤다. 그리고, 퇴각하는 터키군을 추격하여 발칸반도의 상당한 영토까지 확보하며 오스트리아는, 새롭게 게르만 문화를 기반으로 '보헤미아'와 '슬라브' 문화를 융합하여 중부 유럽의 강대국으로 도약하였다. 그 충격이 컸던 탓일까? 이슬람은 이후부터 세계 각지의 여러 지역에서 서구에 밀렸다.


여담으로, 잠실(신천) 등 서울 여러 곳에 '1683'이라는 이름의 커피숍이 있어 필자가 내심 놀랐다. 오스트리아를 잘 아는 분이 만든 것 같다...


‘이슬라모포비아(이슬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한 합스부르크 왕가는 승리의 흔적을 역사에 남겼다. 수도 '비엔나'의 중심에서 왕궁과 더불어 비엔나의 상징물로 자리 잡은 고딕양식의 거대한 ‘스테판스 돔’ 성당의 외벽에 포획한 터키군의 포판을 박고 그 위에 개머리를 조각하여 매달아 놓았다. 또한, 이슬람이 패퇴하며 남기고 간, 대포를 녹여서 큰 종을 만들어 달았다.(아래 이미지) 모두가 ‘이슬라모포비아’를 극복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비엔나'외곽의 고급 주택가 근처에는  ‘터키 요새 공원’으로 부르는 거대한 공원이 있다. 1683년 당시 16만여 명의 터키군이 진을 쳤던 지역으로, 숲이 우거진 아름다운 이 공원에는 성곽형 망루와 이슬람식 문양이 새겨진 우물들이 여전히 남아있으며, 지금도 공원을 찾는 시민들이 이 물을 마실 수 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신성로마제국은 이 전쟁의 승리로, 100여 년간 융성을 누렸으나, 후에 나폴레옹 전쟁(1803-1815)에서 패한 신성로마제국은 나폴레옹을 따르는 ‘라인동맹’에 의해 해체되고, 합스부르크 왕가는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나폴레옹 패망 이후, 나폴레옹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였던 오스트리아는 '비엔나' 체제( 왕정복고 구체제 반동체제)로 유럽 역사를 주도하였고, 게르만족인 자신과 보헤미안, 슬라브족 등 자기 왕국을 구성하는 족속들을 묶어 대독일주의를 표방하였다. 


화무십일홍(花無百日紅) 인가? 흩어졌던 영주국가들을 통합하여 순수 게르만족의 소독일주의로 대항하던 프러시아(독일)와 맞붙은 한바탕 전쟁(1865, 보-오 전쟁)에서 오스트리아가 패배하자, 신성로마제국은 ‘비스마르크’와 빌헤름 황제의 독일제국으로 계승되었다. 이후, 오스트리아는 헝가리를 병합하여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으로 간신히 명맥을 이어갔지만, 계속되는 패전의 불운에 휘말렸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는 독일, 터키 등 추축국 편에 섰다가 패배하자 헝가리가 분리되는 등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의 1/10 정도의 영토만 남은 상태에서 다시 독일 편에 합병되었다. 하지만,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또다시 패배하면서, 오스트리아는 패전 독일과 함께 미, 영, 불, 소 등 4 대 전승국에 의해 분할되어 점령 통치를 받았다. 수도 '비엔나'와 ‘그라츠’ 등 주요 도시까지도 독일 수도 '베를린'처럼 4등분 되어 분할 통치를 받았으나, 독일과 달리 1956년 미, 소 합의에 의해 영세 중립을 표방하며 독립하였다. 


흘러간 제국의 영광 - 군사박물관

역사 이야기가 너무 길었다. 하지만, 유럽을 알려면 오스트리아 군사 박물관을 방문하길 꼭 권유하고 싶다.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는 중세에서 근세에 걸친 대 제국을 통치하여 많은 유명한 전쟁 역사를 남긴 왕조여서 비엔나의 군사박물관은 그야말로 현 국세에 비해 엄청나게 방대하고 가치 있는 군사 역사학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특히, 나폴레옹 전쟁 자료가 많다. 필자는 부임 초기, 수개월 동안 틈틈이 시간을 내어 군사박물관의 모든 전시실에 대한 설명서를 읽고,  3-4차례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전시품을 꼼꼼히 공부하였다.

마리아 테레지아 왕녀와 합스부르크 왕가, 나폴레옹 전쟁과 오스트리아-프러시아(독일) 전쟁, 그리고 1차, 2차 세계대전 등등... 각 전시실을 수 차례 돌아보았다.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던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 사건 당시 타고 있던 차

인상적이었던 것은, 시대순으로 정리된 역사 전시실 가운데 한 전시실에는 세계 제1차 대전의 원인이 되었던 오스트리아 황태자에 대한 암살 현장을 거의 그대로 복원하여 재현해 놓았다. 


관련하여, 잘 알려진 전쟁 비화 스토리가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의 정보국장이 세르비아 침공 작전 등 오스트리아 극비문서는 물론, 러시아내 오스트리아 첩보조직까지 러시아에 팔아넘겼다. 정보전과 첩보전에서 역사상 최악의 배신자로 알려진 '레들 대령 때문에, 러시아에 대해 틀린 정보나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1차 세계대전 개전한 오스트리아는 개전 이후, 무려 120여 만 명이 사망하여 전쟁 내내 수세에 몰렸다. 특히, 세르비아 전에서만 약 50여만 명이 살상되어 오스트리아 패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그런데, 이 군사박물관에, 대사로 부임한 전 청와대 외교안보 수석을 하셨던 반 대사님이 관심을 표명하셨다. 필자는 대사가 새로 부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사관 전 직원을 초청하여 군사 박물관에 가서 여러 전시관을 설명해 주었는데 반응이 의외로 좋았다. 대부분 민간인은 군사 역사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데... 이를 계기로 대사님의 권유로로 대사관 가족과 교민들에게도 차후 두어 차례 더 소개를 하였고, 오스트리아를 방문하는 정부 고위인사의 단골 방문 코스가 되었다. 무관으로써 나름 그들에게 의미 있게 기여하였다고 생각한다. 


오스트리아에는 이 박물관이 소장한 나폴레옹 전쟁 자료 외에, 가까운 거리에 바그람, 오스트릿치, 울름 등 산재한 나폴레옹 전역지로부터 워털루 전장에 이르기까지 여러 전쟁터마다 현장 박물관이 건립되어 있어서 나폴레옹이 치른 각각의 전투를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었다. 유럽대륙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비엔나의 지리적인 이점을 이용하여 휴가 기간에는 오스트리아와 주변국의 군사전적지를 답사하여 전쟁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유럽 역사를 이해하는 동안, 오스트리아를 더욱 깊게 문화, 예술적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과거 전쟁이라고 해서 군인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온고이지신 (溫故而知新)이라 하지 않은가? 과거를 돌아봄으로써, 다가오는 미래를 준비하는 지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작가의 이전글 군사 외교관의 꽃, 국방무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