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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웅 Dec 25. 2022

나폴레옹 전쟁의 최대 피해자, 수혜자 '오스트리아'

어느 군사 외교관 이야기 (오스트리아, 제8화)

전쟁의 천재 나폴레옹의 영욕 

나폴레옹의 쇠퇴와 오스트리아의 부흥



전쟁의 천재 나폴레옹의 영욕 

2021년, 나폴레옹 사망 200주기를 맞아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이 '엥발리드' 묘역에 있는 나폴레옹 묘소에 헌화하였다는 기사를 보았다. 어? 프랑스인도 나폴레옹을 존경하는가 보다... 소위, 역사상 영웅으로 묘사되는 많은 이들이 과연 '무엇을 위하여?, 누구를 위하여?'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였는지에 의문을 품으며 전쟁을 혐오하는 많은 사람들이 분명히 프랑스에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기사의 내용은 약간 뜻밖이었다. 


나폴레옹 묘석. 바닥 원형안에 그가 치뤘던 전역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필자는 육사 생도시절, 다양한 전쟁사례를 배웠지만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나폴레옹 전쟁사였다. 나폴레옹이 치른 각종 전투를 배우면서 매 전투마다 발휘하는 그의 천재적인 전술적 통찰력을 보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당시의 강국이라던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로이센... 수많은 군주국들이 병력의 과다에 무관하게 그와의 전쟁에서 맥을 추지 못하였다. 특히,  오스트리아는 매 전역에서 처참할 정도로 나폴레옹에게 당했다. 


나폴레옹은 적어도 전쟁을 운영하는 측면에서는 당대의 여느 군주들과 생각이나 관점이 확연히 달랐다. 그리고, 이러한 혁신적인 전술적 통찰력이 그에게 항상 승리를 안겨주었다. 요즘의 시장 경제가 그렇듯이 사실, 전쟁은 살아있는 생물이다. 과거의 답습에 안주하며, 뻔한 논리뻔한 전법으로 상대의 의표를 찌를 수 있을까?” 마치, 맥아더의 전략, 전술이 상대에게 다 읽혀서 계속 고전하였던 한국전쟁의 경험처럼..


일반적으로 소부대 전투는 ‘사격과 기동’의 연결에 승패가 좌우되므로, 부대 훈련은 사격술과 기동력이 핵심이다. 대 부대 전투도 기본적으로 기동과 화력의 조합이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는 병력의 규모가 중요했다. 그런데, 병력 규모는 돈의 문제였다. 초기 전역을 보면, 재정이 튼튼한 오스트리아가 용병 수준의 다민족 황제군을 보유한데 비해, 프랑스는 군세가 열세였다. 여기서 그의 해법은 상대보다 빠른 기동이었다. 기동은 이러한 병력의 숫적 우위를 순식간에 뒤바꿀 수 있는 비결이었다. 


예컨대, 나폴레옹의 기동 비결은 경무장과 보급지원의 경량화로 기동성을 배가하여 집중과 분산을 효율적으로 수행한 것이었다. 당시, 상대인 중무장의 오스트리아군이 분당 70보를 기동 하였는데 비하여, 나폴레옹 군은 분당 120보를 기동 하였다. 시간당 24Km 정도를 기동한 셈인데, 이는 요즘의 행군 속도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당시로서는 엄청난 속도였다. 그 결과 항상, 결정적인 지점에서 적보다 많은 군사력을 집중하여 수적 우위를 점할 수 있었고 승전을 거듭하였다이처럼, 우세한 기동력은 공격 작전 간 많은 융통성을 부여한다. 

 

한국 전쟁에서, 1951년 중공군 제5차 2단계 공세시, 강원도 현리지역에서 중공군 제60사 178단(연대) 2영(대대)의 1개 중대가 국군 종심 깊숙이 위치한 ‘오마치 고개’로 침투하였다. 오마치 고개는 국군 3군단이 춘천으로 철수할 수 있는 유일한 기동로였다. 그런 만큼, 중공군 제20군이 ‘오마치’ 고개 점령에 작전의 승패를 걸었다는 뜻이겠지만, 중공군 1개 중대가 수림이 울창한 700~900m의 험준한 강원도 산악지대를 야간 13시간 동안 무려 25km를 전진하였다. 변변한 기동수단이 없는 중공군은 급속행군(달리기)가 유일한 기동력이었다. 길도 없는 산악 지역을 비록 경무장(소총과 탄약, 휴대 식량 등 약 20kg 정도 군장)이라 해도 야간에 시간당 약 2km로 이동한 것은 놀라운 능력이었다. 이 침투로 인해, 국군 3군단 장병 6만여 명이 퇴로를 차단당한 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당시, 중공군의 행군속도는 국군의 2배 이상 빠른 것으로 각종 포로 증언에서 나온다. 2배 이상의 행군속도는 상대가 전혀 예측하지 못하는 엄청난 기습효과를 발휘한다. 


그런데, 병력의 규모가 커지면 지휘 통제가 점점 어려워진다. 보병, 포병, 기병 등 각 병종의 효율적인 조합은 군을 잘 편성하는 것이다. 이른바, 제병 협동작전 수행 능력인데 당시, 나폴레옹이 만든 5,000~ 7,000여 명 규모의 사단(Division) 편제와 예하대인 연대(Regiment) 조직은, 기동과 화력의 조합을 최대한 고려한 것이었다. 이 편제는 그 뒤로 계속 발전하여 지금껏 세계 각국 군대에서 공통적으로 적용하고 있는 개념이다. 


구체적으로, 자신이 가진 보병은 평균이하 수준이고, 포병은 평균, 기병은 평균이상이라면 이런 요소를 최적화시키는 조합의 난이도는 점차 증가할 것이고, 이런 복잡성은 기동부대에 대한 지휘통제를 더욱 어렵게 한다. 또한, 이런 들쑥 날쑥함은 당연히 군수지원에도 많은 어려움을 초래한다. 오스트리아 원수들이 그런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국가 총동원체제를 정비하고 사단 편성 등을 통하여 기동부대를 적당한 수준으로 표준화하고 평균화시키면서 효율을 크게 하고 지원 부대로서도 미리 예측가능하게 만들었다. 나폴레옹이 포병 장교로서 수학을 배운 탓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참고로, 당시, 각 나라 사관학교는 포병과 공병에게만 수학을 강조하였다고 한다)  

나폴레옹 군 대포

또한, 포병이야기가 나오면 나폴레옹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대포의 위력과 적 방어선을 분쇄하고 공격을 지원하는 능력을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나폴레옹 전쟁으로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의 전투 간 병사 1,000명 당 몇 문의 대포가 가용한지가 지휘관심이었고, 전투간 사망자는 대부분 화력운용의 결과였다. 사실, 나폴레옹 전쟁이전부터 프랑스인들의 수학적 사고방식으로 포병 발전의 대부분은 프랑스 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포병대의 목표는 대형을 잘 갖춘 적의 기동부대 대형을 와해시키는 것으로 예컨대, 40문의 대포로 500m 전선에 1,000여 발을 퍼붓는 식이었다. 나폴레옹 포병대는 사단에 1개포대 이상을, 그리고 군단 포병이나 예비포병, 황제 근위대 포병까지 집중 운영하여 상대하는 모든 포병을 앞섰다. 하지만, 자욱한 포연과 포신의 반동, 소음으로 나폴레옹 군대를 지원하는 젊은이들은 포병을 그리 선호하지 않았다고 한다.   


기동력과 화력은 나폴레옹을 신화로 만들었다. 1805년 10월, 오스트리아를 필두로 반 나폴레옹 연합군은 프랑스 제국을 전복시키고자 대규모 기동을 전개하였지만, 프랑스군은 오히려 신속한 기동으로 오스트리아 군을 '울름 전투'에서 포위하여 전원을 항복시켰다. 동, 서, 남, 북 기동력으로 상대가 예측하지 못한 지점에 나타나 상대를 놀라게 했다. 이 포위작전은 고대 로마시대 알프스를 넘어 로마군을 궤멸시킨 '한니발'의 '칸네의 회전'과 비견된다. 그러고보면, 알프스를 넘어 이태리로 진군하였던 모습은 나폴레옹도 '한니발'과 유사하다.


그리고, '울름'전투에서 패배한 오스트리아 프란츠 황제가 비엔나를 포기하고 도주하여 러시아 알렉산드로 황제의 군대에 합류하자, 1805년 12월 다시 '오스트릿치'에서 맞붙었다. 프랑스군의 여러 장점을 감안하더라도 러시아 알렉산드로 1세 황제와 대적한 '오스트릿치' 전투는 쉽지 않아보였다. 하지만,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미리 전쟁을 살펴본 듯, 나폴레옹의 전투 예측은 '자로 잰 듯 정확하게 치른 완벽한' 전투로 '지휘와 기동'의 예술이라고 까지 평가받았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그는 군인에게 필수적 무형자산인 애국심의 개념을 이해하였다. 프랑스혁명의 열기로 시민군에게 ‘프랑스’라는 국가에 대한 애국심을 일깨워주고, 프랑스혁명으로 인하여 형성된 시민 평등, 법치주의, 능력주의 및 자유주의 이념으로 농노 수준의 사람들에게 시민의식을 불러 넣어준 것도 프랑스 군의 또 다른 무기가 되었다. 당시, 황제의 군대들은 돈이 없으면 잘 안 굴러가는 직업적인 용병 수준이었다고 한다. 


나폴레옹 육군 장교 군복에 단 명에의 상징인 훈장 

애국심의 경우는 예컨대, 나폴레옹 몰락 이후에도 나폴레옹의 군대 방식으로 살아가려는 '쇼뱅이즘'이라는 극단적 국수주의 이념을 지닌 자들도 많았다. '쇼뱅'이라는 군인처럼 이들의 충성심은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여기에, 착안한 나폴레옹은 훈장 제도까지 만들었다. 명예심에 목숨조차 버리도록... '오스트릿치' 전투의 승리로 4000만 프랑이라는 거액을 배상금으로 받은 나폴레옹은 이 돈을 전사자 유족과, 부상자 그리고, 전쟁에 참여한 자들에게 모두 지급하였다. 그는 부하의 마음을 읽고 움직일 줄 아는 군인이었다. 프랑스 군대는 작전의 중요성보다, 발바닥이 닳도록 행군하면서도, 무엇보다 백전백승하는 황제 나폴레옹과 같이 전장을 누비는 것을 영광으로 알았다.



나폴레옹의 쇠퇴와 오스트리아의 부흥

1806년, 다시 영국, 러시아와 함께 동맹을 맺은 프로이센(독일) 군이 나폴레옹 군과 '예나 전투'에서 맞붙었으나, 프로이센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고 베를린까지 빼앗겼다.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로이센 황제까지 모두 쓴맛을 보았다. 이런 여러 가지 결과는 나폴레옹의 천재성의 한 단면이었지만, '승자의 저주'랄까? 이런 승리는 그에게 강한 자만감을 주었고, 모든 상대들이 공포에 떨어 당분간 전쟁보다는 외교로 국제문제를 해결하게 되자, 나폴레옹의 군사적 통찰력은 점차 그 날카로움을 상실하기 시작하였다. 


급기야, 1809년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 아스페론에서 생애 최초의 패배를 기록했으나 이어진 '바그람' 전투에서 오스트리아 군에게 대승을 거두었다. 어쨌든 나폴레옹이 예전 같지 않게 된 반면에, 전쟁을 치르면서 호된 대가를 치른 상대들은 점점 나폴레옹의 기법을 배워며 강해져 갔었고... 1812년, 프랑스 군의 러시아 침공 시, 러시아의 청야전술로 프랑스 군은 궤멸 수준의 타격을 입었고, 이후부터 계속 수세에 몰리다가 1814년 파리를 함락당하고 '엘바' 섬으로 추방되었다. 1815년, '엘바'에서 탈출한 나폴레옹은 다시 '90일 천하'를 이루지만 '워털루 전투'에서 패퇴하여,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됨으로써 나폴레옹 전쟁은 끝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영국 견제를 위해 '대륙 봉쇄령'라는 그의 지나친 욕심이 화를 불렀다. 적당한 선에서 멈추었어야 하는데... 이를 보면서, '워털루'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의 웰링턴 장군은 "정복자는 포탄과 같다. 잘 날아가다가 마지막에는 터져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라는 말을 남겼다. 하지만, 울름전투(1805), 오스트릿치 전투(1805), 예나 전투(1806), 바그람 전투(1809) 등에서 보인 그의 천재성은 역사적 사실로 남아 있다. 


1798년 나폴레옹이 최고 권력을 장악한 이후 영국과 프랑스 대립이 심화되었고, 1804년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자, 영국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를 끌어 들어 나폴레옹 전쟁(1803~1815)을 치르게 된다. 나폴레옹 몰락 이후, 비엔나에서 '나폴레옹 같은 인간이 다시는 등장하지 못하도록' 보수반동 '왕정복고'를 주제로 오스트리아의 외상인 '메테르니히'에 의해 '비엔나' 체제가 완성되어 유럽의 국경은 새로 그려졌다. 이에 따라, '비엔나' 체제의 최대 수혜자는 그토록 나폴레옹에게 군사적 굴욕을 당하고 황녀까지 결혼케하였던 오스트리아가 되었다. 이 보수반동 체제는 1860년대까지 이어졌다.   


오스트릿치 전적지(체코)

필자는 휴가 중에 비엔나에서 가까운 '오스트릿치' 전투 현장과 전적지 박물관을 다녀왔다. 지금은 체코의 제2도시 '브르노'(Brno) 근교의 드넓은 평원인 '슬라브코프우부리다' 지역이다. 박물관에는 전황도를 묘사한 사판이 유리관에 덮혀 관광객들이 볼 수 있도록 되어 있으며, 한쪽에서는 프랑스와 러시아 병사와 대포 등 군대의 각종 물건을 주석으로 만든 미니에이쳐(소품)으로 만들어 기념품으로 팔고 있다. 참고로, '브르노'는 미국 맥주 '버드바이저'의 원래 고향으로 잘 알려져 있다. 맥주에 관한 체코인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그리고, '바그람' 전역지는 비엔나 근교에 있다. 오스트리아의 패전지라서인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그 지역의 한 레스토랑에 식사차 들렀는데, 천정에 온갖 종류의 병사용 휴대품이 장식용으로 수없이 매달려있어 묘한(?) 감정을 느꼈다. 필경, 전쟁터에서 산화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러시아 병사의 유품일 터인데... 아, 참고로 이 식당의 '비너 슈니첼'은 그 양이 매우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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