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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웅 Dec 31. 2022

조국을 위해 희생한 주민을 기억하는 오스트리아 교회

어느 군사외교관 이야기 (오스트리아, 제15화)

마을의 중심, 교회

쇠락하는 기독교 

주민의 희생과 헌신을 기억하는 교회



쇠락하는 기독교(로만 가톨릭) 교회 

로마제국의 국교였던 기독교는 제국의 황제나 귀족제도처럼 교황과 주교 등의 권위적 제도를 따랐다. 어느덧, 종교도 승리를 추구하는 십자가의 길로 들어섰다. 로마를 계승한 게르만에 의해 기독교의 신성(神性)은 무려 천년이상 서구를 지배하는 동안, 신의 존재는 절대적으로, ‘신성불가침(神聖不可侵)’이었다. 더불어, 종교는 인간의 모든 활동을 지배하였다. 마을을 만들더라도 항상 그 중심에 교회를 두었고, 교회를 지을 때도 그 첨탑은 항상 하늘을 향해 두 손바닥을 모은 채로 최대한 하늘로 향하는 모습이었다. 마치, '바벨 탑처럼 하늘로 향하고자... 그리고, 인구가 많을수록 교회의 규모는 엄청나게 커졌다. 


오스트리아는 기독교(로만 가톨릭, 천주교)가 국교이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큰 교회는 1160년에 건축된 비엔나의 중심에 있는 '슈테판' 대성당이다. 교회 건축은 장차 만들어질 건물의 기울임이나 균열을 방지하기 위해 바닥 다짐부터 시작하는데 여기에는 물로 다지는 것이 기본이었다. 그런데, 신을 향한 열정일까? 엄청난 규모의 바닥 다짐에 그들이 가장 아끼고 가족만 즐긴다는 포도주를 물대신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덕분에 지금껏 이 교회는 조그마한 균열조차 없다. 이런 겉모습 외에도 교회의 실내는 '프레스코' 화나 천정 벽화, 에코기술 등 등 미술, 음악, 건축 등 모든 장르의 예술을 동원하여 ‘신을 기쁘시게 하는 일’로 장식되었다. 


비엔나 슈테판 대 성당 내부

신 중심의 중세에서는 먼저 교회를 건축한 뒤, 통치기관인 궁이나 관청을 만들고 학교를 만들었다. 주민들의 공간은 그다음이었다. 그리고, 교회가 세워지면, 교회 앞에는 모두가 모일 수 있는 공간인 젠트룸(중심, zentrum)이나 플라츠(광장, platz)라는 커다란 광장이 형성되었고, 여기는 모두가 통과하여 가는 길목이었다. 광장의 이러한 도시의 중심적 기능을 이해한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황제는, 광장에서 시작하여 도로 좌, 우측에 홀 수, 짝 수 지번을 부여하는 도로명 주소를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사용하였다.  


이런 광장은, 또한 타인과의 만남을 연결하는 공간으로서 자연스레 삶의 터전이랄 수 있는 시장의 기능도 생겨났다. 시장이 있다 보니 분쟁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슈테판 성당의 입구 옆 벽면을 자세히 보면, 돌을 파낸 원형모양의 음각과 쇠로 만든 한 자 길이의 쇠줄이 붙어있다. 이들은 빵(옛날 빵은 효모가 없는 밀가루 반죽을 눌려서 만든 원형모양이었다)의 크기와 옷감 길이의 기준을 제시하는 용도로서 당시 권력의 상징인 교회가 그 기준을 ‘보증’하였다. 


이처럼, 신권이 압도하던 중세의 교회는 서민 경제생활 속까지 깊게 자리 잡았다. 또한, 교회 앞 광장은 각종 공시나 공고를 알리는 소통의 중심이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오스트리아에게 이슬람의 비엔나 침공은 전대미문의 공포였다. 천신만고 끝에 이슬람을 격퇴한 오스트리아는 바로 이 슈테판 대성당에다 터키군을 물리친 각종 기념물을 장식해 놓고, 이슬람 공포증을 극복하고 승전을 널리 알렸다.


종교개혁으로 인한 30년 간의 신교-구교 간의 종교전쟁을 계기로,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로서, 서구에서 종교는 더 이상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났다. 이제, 서구의 종교적 관심은 완전 소멸은 아니지만 예전 같지 않다. 건립되는 교회 수도 많지 않고, 교회에 가보면 예배나 미사 시간조차 좌석이 듬성듬성하다는 것이 그 반증이다. 자연스레, 서구인은 종교적 행위에 별다른 존중과 의미를 부여하지 않게 되었다. 서구가 한때 믿었던 기독교라는 종교는 그 영향력이 쇠락하였다.  


주민의 희생과 헌신을 기억하는 교회

 그럼에도, 서구의 교회는 여전히 주민과 동고동락하는 모습을 보인다. 특히, 전몰자에 대한 기림은 대단하다. 오스트리아, 독일, 영국 등 유럽 각지를 여행하다 보면, 국가급 박물관은 물론, 많은 시골마을 교회나 각급 학교 곳곳에도 거의 100여 년이 지난 제1차 세계대전 참전자로부터 2차 세계 대전 참전자 등 자기네 마을 출신 참전 용사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벽면에 새겨놓고 그 면면을 후손들이 기억하게 하고 있었다. "교회에서 전사자 명단을 보다니...!?" 필자의 상식과는 전혀 뜻밖이었다. 교회가 마을 사람과 함께 그들의 희생과 헌신을 기억하게 하는 모습은 솔직히 부러웠다. 당시 상황이 어떠했든지 국가의 부름을 받고 희생한 죽음이었으니...  


6.25 전쟁 3년 동안 전쟁으로 수 십만 명의 군인들이 산화하거나 불구자가 되었다. 전투현장 곳곳에 명예와 희생의 스토리가 점철되어 있을 터이다. 하지만, 정작 영웅으로 알려져 조국과 민족으로부터 추앙받는 사례는 그리 많지 않다. 그 긴 기간, 그 수많은 전투를 치른 국군 용사 중에 누구인지 영웅으로 기릴만한 사람이 없을 리 만무하지만, 그저 몇, 몇 '00 지구 전적비'와 '무명용사의 기념비' 정도로 이들을 기리는 데 불과하다. 


물론, 정부가 전사자 유족이나 생존자에 대한 예우를 하고 있지만, 기록 부실로 무명 전몰자에 대해서는 예우를 갖추지 못하는 실정이다. 더군다나, 전쟁으로 도시나 마을마다 참화를 입지 않은 곳이 없고, 전쟁 이후에 생긴 교회나 각 종교단체는 연륜마저 짧아 '그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이니 전몰자를 챙기는 일부 서구 교회의 모습은 우리와는 확연히 다르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우리도 망자의 희생과 헌신을 기억해야 한다. 


2023년, '천안함' 희생자 추모회는 과거와 달랐다. 감정에 벅찬 듯 울먹하던 대통령이 희생자 55인을 한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불렀다. 희생자를 "기억하고 예우하지 않으면 국가가 아니다"라며... 과거, 툭하면, "이게 나라냐?"라며 사사건건 비판하며 권력 쟁취에 혈안이 되었던 사람들이 정작 집권하자 하지도 못했던 일을... 비로소, 국가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을 기억하는 국가가 기억하는 정상적인 위치로 되돌아 온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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