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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웅 Jan 21. 2023

'통일 아랍 공화국'의 향수와 무산된 '아랍의 봄'

어느 군사 외교관 이야기 (이집트, 제12화)

통일 아랍 공화국의 향수, '아랍 연맹' 

무산된 ‘아랍의 봄’  

'민주화'와 이슬람 원리주의 

외세의 군부지원으로 ‘아랍의 봄’이 ‘아랍의 겨울’로

'아랍의 봄'을 다르게 극복한 UAE



통일 아랍 공화국의 향수 

거대 제국 ‘오스만 터키’가 서구 제국(帝國)주의에게 안일하고 무기력하게 대처하는 사이, 산업혁명으로 무장한 서구 제국주의가 약 200여 년에 걸쳐, 아랍 등 이슬람 지역을 침공하여 많은 식민지 확보에 주력하였다. 하지만, 주민의 생활에 대해 무지하였던 서구는 이 지역을 지배하는 동안 무자비한 박해와 탄압으로, 기존의 이슬람 공동체를 와해시키려 하였고,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인위적인 국경선을 그었다. 

그러나, 이렇게 ‘인위적인 주권을 가진 국가’는 ‘알라(신)의 통치권’과 ‘움마'의 우위에 대한 지역 부족민(혈연 중심)의 믿음과는 공존하기 어렵다. 1, 2차 세계대전이후 서구가 물러가자 아랍 각국은 그들이 그어놓은 경계선에 따라 22개국으로 나뉘어 독립하였지만, 여전히 양 떼를 몰고 유목생활을 하는 베드원족은 그런 국경선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의 조상이 하던 방식대로 사막의 목초지를 찾아 떠돌아다닌다. 


‘아랍’이란 말의 의미는, ‘아라비아 민족’을 지칭하는 용어로써, ‘우마이야’ 왕조로부터 ‘압바스’ 왕조까지의 AD 7-12세기간 중동,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에 걸쳐 거대한 이슬람 제국을 건설하였던 사람들의 후예를 지칭하였던 말이다. 지금의 이집트 사람들도 그 시기에 대량으로 이주하였던 아랍인의 후손이다. 그런 연고로, 이들은 같은 아랍 언어와 이슬람 종교, 그리고 아랍형제라는 동질성을 갖고 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국가로 나누어졌어도 통일의 바램을 가졌다. 


아랍 국가들 중, 아랍의 동질성을 가장 강조한 국가는 공화국인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 예맨 등으로 독립 당시에 모두 왕정국가였지만, 군부 쿠데타로 왕정이 사라져 버린 곳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 4개국의 국기는 똑같이 빨강, 흰색, 그리고 검은색 3색상의 줄 모양이다. 언뜻 보면 똑같아 보인다. 그만큼 동질성을 공유한다는 뜻이다. 굳이 차이를 들라면, 가운데 백색줄 바탕에, 예맨은 아무 표식도 없지만, 이집트는 독수리 모양을, 시리아는 별을, 이라크는 같은 위치에 국호를 그려 넣은 것이다. 이들의 국기에서 보이는 빨간색은 이슬람에서 순교의 의미를, 백색은 ‘우마이야’ 왕조, 그리고 흑색은 ‘압바스’ 왕조를 의미하므로 이슬람 원리주의를 따르는 ‘범아랍’을 강하게 의미한다. 


좌로부터 예맨,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 국기(가운데 상징물만 다르다)


이집트 ‘나세르’ 대통령과 시리아가 합쳐진 “통일 아랍공화국”은, 불과 2년 정도 이어지다 1961년에 시리아 군부 쿠데타로 무산되었지만, 백색바탕에 그려진 독수리 하나, 별 2개는 이집트, 시리아가 1958년도에 ‘통일 아랍공화국’이 되려는 국가 연합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아랍 국가들은 이집트-시리아의 국가연합을 이를 계기로 ‘아랍 연맹’을 결성하여 아랍어와 유사한 문화, 풍습, 그리고 이슬람 종교 안에서 형제애를 과시하며 일체감을 누리고 있다. 물론, '아랍 연맹'은 마냥, 평화롭지만 않다. 아무리, 형제애를 나눈다지만, 부족의 안위나 개인의 자존심이 걸리면 격렬히 반응한다. 매년, '아랍 연맹' 정상회의가 개최될 때마다, 각국 지도자들은 친미냐?, 반미냐? 혹은 부국이냐? 빈국이냐? 에 따라, 정치적 의도를 가진 지도자들은 자국의 국정활용 방안으로 십분 활용하였다. 예컨대, 실각한 리비아의 ‘카다피’ 원수는 그런 면에서 가장 다혈질로, 그는 TV 중계화면 앞에서 엄청난 감정표시로 동료 아랍국 정상들을 비난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무산된 ‘아랍의 봄’  

중동 지역의 '아랍 연맹'은 거의 대부분 왕정이나 군부 독재국가들이다. 국민의 문맹률이 높고 이슬람 율법에 따라 주어진 숙명에 순응하였기에 배만 부르면 정권이 누구든 관심이 적었다. 그런데, 지난 2011년 ‘튀니지아’에서 극에 달한 민생고, 청년실업, 정부의 무능과 부정부패에 반발하며 ‘아랍의 봄’이라는 '민주화'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는 곧바로 인접 군부 독재국인 이집트, 리비아, 예맨, 시리아 등으로 그 충격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튀니지아' 군부가 망하는 걸 보며 철통 같은 군부 독재 국가에도 민주주의 정권이 들어설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10여 년이 지나 돌아보니, ‘재스민 혁명’이라는 이들 ‘아랍의 민주화’ 바람은 실패하였다. 그토록 큰 국민적 지지에서 거대한 소용돌이를 일으켰지만 실패한 것은 무엇이 문제였을까? 


군부독재가 아닌 ‘민주화 열망’과, 세속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이슬람에 대한 회귀, 즉 ‘원리주의’ 간의 불일치성이 그 문제를 설명해 준다. 이들의 패턴을 보면, 처음에 군부 독재 정권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위협 -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정부 전복기도 등 - 을 사전에 제거하기 위해 국민들을 강력하게 통제하였다. 하지만, 이어진 민주화의 열망으로 대규모 군중 시위가 잇따르자, 철권통치의 독재자는 사태 수습을 위해 유화책을 내어 밀었다. 아마도, 무고한 시민을 탄압하는 현 독재 정부를 ‘민주화’를 지지하는 서구가, 타도 대상으로 삼지 않도록 하려는 유화책이었을까? 그런데. 이게 패착이었다. 독재자가 유약한 모습을 보이자, 시민은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요구하며 조직화에 속도를 냈다그러자, 보상과 억압으로, 독재정권에 충성하며 살아가던 엘리트들도 각자도생에 나서며 혼란의 도가니에 빠졌다


'벤 알리'(튜니지아), '무바라크'(이집트), '카다피'(리비아), '살레'(예맨) 정권 민주화 운동이 점점 거세어 지자 체제 수호를 포기한 측근들과, 독재정권과 정치적 공생 관계를 이어오던 군부마저  빠른 계산으로 중립을 지키거나 시민 편으로 돌아서자 차례차례 무너졌다. 이제, 독재자를 몰아내고, 민중의 염원대로 서구식 선거를 통해 정권을 창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정권을 장악한 일부 ‘민주화’ 세력은, 제도권 활동 경험조차 없어 서구식 민주주의(세속주의)를 지향하는 대신 ‘이슬람 원리주의’를 추구하였다. 이들의 미숙한 국정운영과 권위적인 자세는 민중을 실망시켰다. 여기에는, 이슬람에 충실하는 것을 '민주주의'로 착각하는 원리주의자의 외고집이 주도한 ‘이슬람이 해답’이라는 ‘이슬람의 부활성’을 알리는 ‘캐치프레이즈’에 환호한 서민의 ‘민주화에 대한 무지’도 한 몫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민주화’를 내세우며 정권 전복을 기도하였던 각국 반정부단체가 ‘이슬람 원리주의’를 지향한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이들 반정부 단체들은 힘이 미약하면 외세의 지원을 받기 어려웠다. 하지만, ‘무슬림 형제’를 앞세우는 이슬람 원리주의 단체는 어느 국가에서든 저항세력이 벌이는 내전에 개입해서 무기 제공 등 각종 지원을 약속하였다. 그리고, 강자(정부군)의 불의에 저항하는 약자의 모습을 보이며 저항세력을 위해 국제적 지지를 호소하며, 이들 반정부 단체에 적극적으로 접근해 왔다. 이처럼, 이들이 반정부 단체를 지원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영향력을 확장하자, 어느 순간, 민주화 운동을 가장하여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이슬람 원리주의 국가를 건설하고자 부추긴다. 결과적으로, 혁명의 목표가 '반정부'를 넘어서서 이슬람 원리주의 단체들이 추구하는 진정한 ‘이슬람 국가’ 건설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민주화를 기대하고 혁명세력을 지원하였던 서구는, 기대와 달리 군부 독재를 쓰러트린 새 정부가 민주화는커녕 이슬람 원리주의를 확산하고 정권의 무능이 드러나자 당황하였다. 이에, 서구는 서구식 '민주화'를 빙자하는 세력을 지원하는 대신, 차라리 서구식 민주화에 역행하였던 군부 등 수구세력을 지원하여, 이들로 하여금 '반이슬람' 원리주의를 외치게 하였다. 역설적으로, 독재국가가 자국 내 반정부 세력을 탄압한다면, 이는 서구의 안전을 지켜 주는 방파제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이런 모습은, 이집트, 리비아, 이라크 및 시리아 사태를 살펴보면 좀 더 확실하다. 어쨌든 서구 국가로서는, 주권국가인 이들 이슬람국가가 인종 청소 등 국제법 위반이나, 핵이나 화학, 생물학 작용제 공격 등 어떤 형태로든 반인륜적인 행위를 저질러진 않는 한, 내전이나 정권 전복 등의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개입할 명분은 없었기 때문이다. 


외세의 군부 지원으로 ‘아랍의 봄’이 ‘아랍의 겨울’로

이집트에서 ‘아랍의 봄’으로, 30년 군부 독재자 ‘무바라크’가 실각하자 민주화 세력은 그 여세를 몰아 국민선거를 실시하고 ‘무슬림 형제단’을 이끄는 ‘무르시’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하지만, '허니문' 기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년 반정도 집권하던 ‘무슬림 형제단’이 이슬람 원리주의 행보를 보이자, 위기의식을 느낀 군부는 이들의 급진적인 혁명주의 비판하며 쿠데타를 일으켜 ‘무르시’를 체포한 후, 곧바로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집트의 '무르시' 대통령 반대 시위(출처: 인터넷)

이후, 군부는 정국 안정을 내세우며, 민주적 행위를 탄압하며 다시 '철권통치'를 이어 간다. 독재를 물리친 세속주의자는 ‘민주화’를 내세웠지만, 원리주의자가 득세하자 오히려 군부의 야망에 ‘민주화’가 묻혀버렸다. 한편, 그동안 이집트에 스며든 원리주의자들은 잔존한 ‘무슬림 형제단’을 부추기며 정권을 위협하고, 한때나마 민주화를 맛본 세속주의는 좌절에 대한 반발로, 또 변화를 갈구하는 세력들의 일부도 이슬람 원리주의에 동조하고 있는 실정이다.


북아프리카 지중해에 접한 아프리카 최대 산유국, ‘리비아’ 독재자 ‘무아마르 가다피’ 국가 원수는, ‘테러 지원국’의 대명사였다. 그는 미국에 대해 항상 독설과 비난을 퍼붓고, 테러를 지원하였지만, 애독하였던 책이 ‘엉클 톰스 캐빈’이라고 스스로 밝혔을 정도로, 마음 한구석에는 미국에 대한 관심도 많았던 인물이다. 27세 때인 1969년 미국 유학 후, 귀국길에 사관학교 동료들과 쿠데타를 일으켜 왕족들을 축출한 뒤, 2011년 중동의 민주화 운동인 ‘아랍의 봄’으로 사망 시까지 42년간 리비아를 철권 통치하며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리비아 혁명 (출처: 인터넷)

카다피는 집권시절, 핵무기 개발설로 유럽 연합의 공습을 당하고, 서방의 강력한 경제제재를 받기도 하였으나, 자진하여 ‘핵 프로그램’을 포기한 뒤, 미국과 관계 정상화를 도모해 나가는 와중에 ‘아랍의 봄’을 맞이하였다. 그리고, 유화책을 펴다가 망했다… 그런, 이유로 북한 ‘김정은’은 ‘핵포기 프로그램’ 이야기만 나오면 “리비아가 핵을 포기하는 순간 망했다”는 교훈을 되네인다. 


어쨌든 서구에 사사건건 대립하던 ‘가다피’ 정권은 ‘알카에다’ 등 테러세력들도 철저하게 탄압하여 ‘원리주의’가 발도 못 붙이게 하였다. 하지만, ‘아랍의 봄’으로 민주화 운동이 벌어지자, 평소 ‘가다피’를  못마땅해하던 서구는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목적이 뭔지도 모르는 채, 독재 정권 타도를 외치는 민중만 바라보며, NATO 군의 공습 등 군사적 개입까지 불사하고 정권 타도에 일조하였다. 


“독재자의 실각으로 평화와 번영이 찾아오나…?” 했지만, ‘가다피’와 리비아 군부가, NATO와 반군에 의해 붕괴되고 무정부 상태에 놓이자, 각 군벌들은 지중해 연안의 원유 저장소 차지하는 등, 저마다의 방식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리비아는 곧바로 내전으로 유혈사태가 이어지며 지금까지도 혼돈 상태에 있다. 강력한 리더십이 붕괴되자 그 후폭풍은 더욱 거셌다. 


정치, 종교, 경제적으로 이해관계가 얽힌 리비아 사태를 해결하고자, 유럽과 아랍 각국 정상이 몇 차례 휴전 논의와 더불어 해법을 찾았지만 답은 없다. ‘민주화’의 길은 요원하고, ‘아랍의 겨울’이 되었다. 미국 등 서방이 ‘아랍의 민주화’를 지원한다며 리비아에 개입한 결과는 참담하다. 이제 미국이 방관자로 전락한 가운데, 이 지역 최대의 변수는 러시아와 터키의 각축이다. 리비아가 국가 기능을 회복하고 부족 간의 휴전, 무기 금수와 군벌 및 무장 세력 해체로 다시 ‘아랍의 봄’이 올 수 있을까? 외세 개입 금지와 부족들의 통합 의지에 달렸다.


이라크의 상황도 유사하다. 이라크의 ‘후세인’ 독재정권이 쿠웨이트를 침공하고, 독립을 외치는 '쿠르드'인을 화학무기를 사용하여 진압하자, 미국은 이라크를 대량살상무기 보유국가로 지목하고, 2003년 무력 침공을 가하여 정권을 붕괴시켜 버렸다. 결과적으로, 친미적 시아파 정권이 들어서긴 했으나, 이 과정에서 미국을 격렬하게 비난하던 ‘알 카에다’는 후세인의 지지세력으로 잘 조직화/세력화되어 있던 ‘바트’ 당 잔존 세력을 흡수하여 결국은 IS로까지 진화하였다. 이 지역은 ‘후세인’ 독재 정권 때보다 더욱 불안정한 상태가 되었다. 


사실, 이라크에서 ‘후세인’이 건재하였을 때는 ‘알 카에다’는 이라크에서 세력 확대 시도조차 하지 않았지만, 이라크 독재 정권의 붕괴되어 가는 과정에서 그 지부를 확대하였고, 이란의 지지를 등에 입은 시아파가 득세하였다. 이제 이라크에 남아있는 미군마저 위태로워지자, 미군은 곧바로 철수를 개시했다. 


시리아라고 다를까? 민주화 시도 실패 이후, 러시아가 지원하는 시아파 정부군과 미국이 지원하는 쿠르드 반군이 몇 년째 대립하였다. 수니파 이슬람 원리주의 ‘이슬람국가 (IS)’가 득세하자, 쿠르드를 앞세운 미국은 IS를 거의소탕하였으나, 이제는 쿠르드의 축출을 내세운 터키가 개입하였다. 교차되는 강국들의 공조와 갈등과, 내전으로 민심은 사분오열되고, 국가는 갈기갈기 찢어졌다. 그리고, 분쟁을 피해 수십 만의 시리아 난민대열이 서구로 향하고 있다.

시리아 내전 10년 (출처: 한겨레)

예맨도 유사하다. 이란의 지원을 받는 시아파를 몰아내고, 수니파 원리주의자 반군이 정권을 장악하여, 이웃 사우디의 지원을 받는 바람에, 예맨은 남, 북으로 나뉘어, 시아, 순니파의 대리전을 치르고 있다. 파괴 속에 양분된 국가는 '민주화'는커녕 끊임없이 전쟁 놀음만 하고 있다.

 

그런데, 걸프만 산유국들의 '아랍의 봄' 해법은 달랐다. 이들은 민주화 열풍이 몰아치자, 온정주의 국가관으로 복지정책을 확충하여 불만세력을 회유하였다. 당장, 혁명을 '길들이기'한다는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군부독재 정권이 무너진 후 오랜 내전 상태에 접어든 리비아, 예맨 등과 달리, 이들은 극단주의 테러 위협이나, 이란의 패권추구, 유가하락에 맞서, 실용주의 외교와 첨단 산업 육성, 여성인재 등용, 세금 징수와 보조금 폐지로 탈석유화 시대를 준비하면서 높은 수준의 국가역량을 제고하고 역내 안정에 기여하고 있다. 민심은 '배부른' 독재를 선택하였고 왕정은 이에 잘 대처하였다.


UAE 모습(출처: 인터넷)

최근 대통령의 UAE 방문과 사우디 왕세자의 방문으로 중동과의 경제협력에 대한 기대감이 극도로 고조되고 있다. UAE는 2011년이래 아랍인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나라이다. 우리가 석유 수출국 정도로만 알았던 이들 나라가 우리와 최고 수준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되었으니,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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