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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웅 Jan 18. 2023

이스라엘 사해바다와 2000년 恨이 서린 '마사다'

어느 군사 외교관 이야기 (이집트, 제11화)

이스라엘의 사해바다

마사다 요새 - 2000년의 恨

오늘날의 마사다 - 민족정기? 집단 자살의 광기?

역사는 내일을 보는 창이다. 우리의 마사다는?



사해바다(Dead Sea) 

과거, 일본의 총리와 그의 수하들이 독도영유권 주장이나 우경화된 과거사 발언으로 우리를 아프게 했고, 분노케 했다. "역사는 반복된다"라고 했던가? '과거를 잊어버린 민족은 또 다른 아픔을 맛볼 수밖에 없다'는 절박한 인식으로 우리는 이들의 무례하고 경거망동한 행동에 적극 대응해야 한다.  


필자는 이집트 국방무관 임기 종료를 얼마 앞두고 이스라엘 여행을 떠났다. 이집트에서 3년간 주재하다 귀국 시점에 가까워서야 이웃 이스라엘을 방문하게 된 것은 관심부족이라기보다 이스라엘과의 미묘한 업무상 관계로 인한 것이었다. 아랍연맹 22개국 중 전쟁 당사자 국가였던 이집트와 요르단 만이 1968년 6일 전쟁 (3차 중동전쟁) 당시의 실지회복을 위해 1978년 캠프 데이비드협정에 서명을 하고 이스라엘과 표면적으로는 화해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나머지 아랍 국가들은 4차 중동전쟁이 끝난 지 50여 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스라엘에 대해 적대적이어서 이스라엘 출입국 스탬프가 찍힌 여권을 휴대한 여행자에게는 자국 입국허가를 제한하고 있다. 따라서, 겸임국인 요르단은 문제가 없으나, 튜니지아 등 인접 아랍국들을 방문해야 하는 필자로서는 이스라엘 방문을 자제할 수밖에 없었던 탓이다. (물론, 이스라엘은 이런 점을 고려하여 여행자가 원할 시, 별도 문서에 출입국 스탬프를 찍어주기도 한다.) 


카이로에서 고속도로로 수에즈 운하와 시나이 사막, 그리고 이집트 최대의 휴양도시 샤름 엘 세이크를 지나 이집트-이스라엘 남쪽 국경지역인 ‘타바’ (2014년 2월 16일, 한국인 성지순례 여행단에 대한 자폭테러가 발생한 곳이다)에 도착한 뒤, 이집트 출입국 관리소를 지나 이스라엘 측으로 이동하였다. 이스라엘 출입국 관리업무는 비교적 신속히 진행되었는데 줄을 서서 기다리는 동안에도, 잠시나마 건물 바로 아래층에 있는 맑은 홍해 바다(아카바만)를 바라볼 수 있었다. 


사해바다의 소금 덩어리

이스라엘에서 머무르는 며칠 동안, 현지 유학생의 안내를 받아 성지순례를 겸해서 에일라트, 텔아비브, 하이파, 갈릴리호수, 골란고원 그리고, 예루살렘, 여리고 등 여러 도시와 사해바다를 둘러보았다. 사해는 그냥 소금 호수인데, 성경에서 영문 이름이 그러니... 사해는 해발 - 430m 정도로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지표이다. 요르단 강에서 물이 유입되는 양만큼 25~40도의 고온으로 증발되는데, 만약 물의 양이 부족하면 소금이 퇴적되어 버려 해수면은 늘 일정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에는 요르단 강 상류에 정착인구가 늘어나서, 유입되는 물량이 부족해지자 해수면이 매년 1m 이상 낮아져서 지금은 해수욕장으로 가려면 차를 타고 1~2Km를 나가야 한다고 한다. 

 

사해바다에 뜨서 신문 읽는 모습(출처: 인터넷)

필자가 갔을 때는 사막지역 가운데에 있는 사해 바다 주변 이스라엘의 5월은 그야말로 무더움과 황량함 그 자체였지만, 많은 관광객들 틈에 섞여 필자의 가족도 군데군데 위치한 사해 해수욕장(?)에서 몸이 뜨는 경험과 진흙마사지를 즐기었다. 물속 소금의 함유량이 30% 가까이 되는 짠물이라 얼굴이 물에 잠기면 매우 위험하다. 대신, 관절염과 피부병에는 좋다는 설도 있다. 그래서 머드 체험을 하는 거고... 상술에 능한 유대인들은 이걸 가지고 각종 화장품과 비누를 만들어 수출까지 한다. 사해를 떠나 이집트로 복귀하는 길에 마지막으로 마사다 요새를 방문하였다.


이스라엘의 '마사다' 요새 - 2000년의 恨 

‘마사다’는 히브리어로 요새라는 뜻이다. 서기 73년 제1차 유태-로마 전쟁 시 끝까지 로마에 항거하던 유태인 저항군이 로마군의 공격에 패배가 임박하자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 전원 자살한 곳인데, 현재 유네스코가 지정(2001년)한 세계 문화유산 중의 하나로 유명한 관광지이다. 이스라엘 남쪽, 사해(死海)에서 서쪽으로 4㎞ 떨어진 유대사막 동쪽에 우뚝 솟은 해발 434m의 분지형 바위산으로, 꼭대기는 평균 너비 120m에 길이 620m, 둘레 1,300m의 크기이다. 거대한 바위 절벽 위에 자리 잡은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없는 펑퍼짐 한 진흙땅의 거칠고 메마른 분지형 지역으로서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배(船) 모양 같이 생긴 고대 요새다. 산 아래 관광안내소에서 올려다본 마사다 요새는 그야말로 아마득하게 높은 곳에 있는 것처럼 보였고, 로프웨이(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면서 내려다본 먼발치의 사해와 황량한 정경, 그리고 발굴해 놓은 현장 풍경은 그 나름대로 일품이었다. 

 

마사다 요새

그런데, 요새를 방문할 때까지 ‘마사다’에 대한 나의 지식은, 사방의 적에 둘러싸인 유태인들이 국민적 저항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유대민족의 용기를 계승할 국민정신 도장으로 개발된 곳으로, 이스라엘 군인과 청년단체가 매년 이 가파른 산을 올라, “마사다의 비극을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말자”라는 각오를 다지는 곳 정도로만 막연히 인식하고 있었다. (우리 국군 해병대도 훈련 수료 시 비슷한 각오로 천자봉까지 행군한다) 


하지만, 안내인의 상세한 설명 가운데 그 유적지를 둘러보니, 주변 수십 배의 아랍 국가들을 압도하는 이스라엘 저력의 발원지를 찾았다고 할까? 뭐라 말로 형언키 어려웠다. 제3차 중동 전쟁(6일 전쟁)의 눈부신 전승은 '마사다'의 교훈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전쟁이 끝나자 많은 전쟁 후일담이 나왔고, 이 중 정신전력 문제가 특히 조명을 받았다. 당시, 이집트군의 초급장교들은 대학출신이나 귀족출신이었지만 전장 리더십이 없었다. 그들은, 불리하다 싶으면 부하들에게 돌격을 명하고 나서, 자신들은 대부분 소리 없이 도주해 버렸다는데... 공부를 많이 하였거나, 가문이 좋다고 해서 훌륭한 지휘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에 비해, 수십 배의 전력을 가진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등 아랍연합을 상대로 전 세계가 깜짝 놀랄 만한 대승을 거둔 이스라엘의 승리는 치밀한 작전계획과 장병의 투철한 군인정신과 용전분투가 조화를 이룬 결과로 평가된다. 그런 면에서, '잊지 말자, 마사다'로 무장한 이스라엘군의 정신력은 전쟁 이전부터 이미 이집트를 압도하였다고 볼 수 있다.


마사다 요새 전투

서기 66년 유태인들이 로마 제국의 통치에서 벗어나려고 반란을 일으켰을 때 갈릴리 지방의 유대군 지휘관이었던, 역사가 ‘요세푸스’라는 사람이 마사다 전투를 기록하였다. 그는 나중에 로마군에 투항한 배신자였지만, 어느 역사책에도 나와 있지 않은 마사다 전투를 그의 역사책 ‘유대전쟁’에 유일하게 자세히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였다. 그 덕분에 아이러니하게도 '마사다'를 오늘날 이스라엘에서 ‘영웅들의 성지(聖地)’라고 불리게 만들어 유대정신을 고취시킨 사람이 되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대제사장 '요나단'이 이 바위산을 처음 요새로 만들었다. 그 뒤 기원전 35년, 로마의 분봉왕(속국)으로 유대를 통치하던 '헤롯'이 유대의 반란 가능성과 로마의 배신(당시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로마 집정관 안토니우스에게 유대 왕국을 달라고 한 사실을 알게 되어)이 두려워, 성벽을 쌓고 무기와 식량을 저장하여, 만일의 경우에 대비한 피난처로 만들었다. 헤롯이 죽은 뒤 로마군이 잠시 머물렀으나, 서기 70년 유대전쟁으로 로마군이 유대를 진압하고 예루살렘을 불태우고 모든 유대인을 고향에서 쫓아내자, 유대인 중 일부가 마사다로 도망쳐 항거하였다. 마사다에는 헤롯이 저장해 놓은 옥수수, 콩, 대추야자가 엄청나게 쌓여 있었고, 포도주와 올리브기름도 건조한 날씨와 청정한 공기 덕분에 100년이 넘도록 잘 보관되어 있었으며, 물탱크에 물이 가득하고, 각종 무기, 장비류도 지구전을 벌일 수 있을 만큼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서기 72년, ‘플라비우스 실바’ 장군의 제10군단과 보조 병력은 마사다로 진군해 왔다. 이미 2년 전에 유대왕국을 무너뜨리고 ‘유대 정복 기념 동전’까지 만들어 쓰던 로마제국은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합쳐 1,000명도 안 되는 마사다의 유대인을 반란군의 잔당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였으나, 이들이 마사다를 기지로 삼아 로마군을 끊임없이 괴롭히자, 황제 '베스파시안'이 그대로 두면 유대의 반란이 재현될 까봐 이들을 완전히 제압하기 위해 현지 주둔군인 로마군 제10군단에 마사다를 함락하라고 명령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당시 ‘실바’ 장군이 지휘하는 로마군은 병사 9,000여 명과 노역자로 동원된 유태인 전쟁 포로 6,000여 명이었다. 


로마군 9,000명과 유대 반란군 수백 명 간의 대결. 마사다는 곧바로 로마군의 손아귀에 들어갈 것처럼 보였다. '실바'는 마사다를 빙 둘러 벽을 쌓고 곳곳에 망루를 세워 유대인이 한 명도 도망치지 못하도록 밤을 새워 물 샐 틈 없이 지키면서 낮에는 교전을 독려하였다. 하지만, 포위된 상태라지만 요새 안의 식량과 무기 또한 넉넉한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저항하였다. 로마군은 사막과 다름없는 광야에 위치한 바위산 아래에 주둔하다가, 공격 명령을 받고 솟아 오른 바위산을 기어오르느라 지친 상태인데, 가파른 벼랑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며 활을 쏘아대는 반란군을 이길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로마군은 먼 곳으로부터 물을 길어 왔고 보급품도 유대광야 너머에서 수송하여, 시간이 지날수록 유대 반란군보다 로마군의 작전환경은 점점 더 열악해졌다.


여러 차례 요새를 공격했으나 번번이 실패하자 포위가 소용없다고 깨달은 실바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서쪽 고원지대에 같은 높이의 거대한 성채를 쌓아 올려 공성하기로 하여, 유대인 포로를 동원하여 마사다 서쪽 벼랑 끝까지 흙과 돌을 다져 비탈을 쌓도록 했다. 이는 엄청난 시간과 인력이 동원된 대규모 토목 공사였지만 로마군은 이를 강행하였다.(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 비탈길 흔적은 남아 있다.) 이 공사를 내려다보는 마사다 반군은 활을 쏘아 공사를 막으려 했지만 사방에서 교전을 시도하는 로마군 때문에 서측성벽, 즉 좁은 전선(戰線)에 많은 병력을 투입할 수 없어서, 시간이 지날수록 로마군과 유대 군의 공간적 간격은 점점 좁혀져 갔다.


(요세푸스는 그가 기록한 다른 전투와는 달리 이 전투에서 유대 저항군의 반격을 기록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는 당시 마사다의 저항군이 로마군에 대항할 전력이 없었기 때문으로 보는 관점도 있고, 다른 역사학자들은 로마군이 성채를 쌓을 때 같은 유대인인 노예를 이용했기 때문에 민족주의성향이 다분한 유대인들이 동족에게 차마 활을 겨눌 수 없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비탈길이 어느 정도 완성되자 로마군은 망루같이 생긴 공성탑(攻城塔)을 비탈 위에 만들었는데, 공성탑의 높이는 마사다 성벽보다 오히려 조금 높아, 철판을 두른 이 탑에서 로마군 궁수들이 활로 엄호하는 사이에 다른 병사들은 투석기(投石機 : 최대 사거리 400m?)를 지근거리까지 끌어올려 20∼25㎏짜리 돌을 날려 보내자 성벽과 요새 구축물은 속절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유대인의 전투의지를 꺾기 위해 이 장비로 살아있는 유대인 포로를 날려 보냈다고도 한다.) 로마군이 투석기는 물론, 불화살과 불덩이를 투척하는 등 집요하고도 다양한 전술을 전개하는 가운데 비탈길 공사가 완료되고, 지근거리까지 다가온 로마군의 공격준비가 완료되자, 지난 약 3년 동안 로마군의 공격을 잘 방어한 유대 군에게 이제 최후가 임박해 오고 있었다.


이러한 암울한 상황에서, 성내에서는 로마군의 보복과 살아서 그들의 노예가 되는 것을 두려워한 마사다 유대인들은 집단 자살을 선택했다. 유대인의 율법은 자살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율법에 따라 생활하는 유대인은 제비를 뽑아 서로를 죽이고 최후에 남은 한 명만이 자살한 것으로 보이며, 그들이 다른 건물을 모두 불태우면서도 식량창고를 남긴 것은, 자신들이 노예가 되지 않으려고 자살한 것이지 식량이 없거나 죽을 수밖에 없어서 자살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세상에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보인다.


밤 사이에 유대인의 자살을 알 길 없는 로마군은, 날이 밝자 단단히 무장을 갖춘 선봉부대로, 파괴된 성벽에 걸쳐놓은 공격용 사다리를 지나 함성과 함께 공격을 개시했지만, 적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요새는 고요함에 잠겨 있었다. 아마도, 불탄 건물과 960명의 장렬한 주검이 펼치진 모습을 보면서 로마군은 순간, 마냥 기뻐하기보다 실망과 경탄 속에 당황하였을 것이다. 로마 병사들이 요새 전 지역을 수색하자 두 여자가 숨어 있던 도랑에서 나와, 간밤에 있었던 일을 자세히 말하자, 실바는 두 여자와 다섯 아이 모두 살려 주었다고 한다.


오늘날의 마사다

역사에 따르면, 유대왕국은 AD 70년에 로마에게 멸망하였고, 이후 유대인들은 이스라엘로부터 쫓겨나 1900여 년 동안 전 세계로 흩어져 '방랑'(Diaspora)을 하게 되었다. 당시 로마황제의 아들로 후에 로마황제가 된 Titus는 그 지역에서 유대의 그림자를 지우기 위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마저 Philistine (성경에서 이방인으로 나오는 ‘블레셋 사람들의 땅’이라는 의미, 오늘날 Palestine)으로 부르도록 하였다. 로마군인들이 마사다에 40년쯤 머물려고 떠난 뒤 수백 년 동안 수도사들이 그곳을 이용하였지만, 이슬람교도가 유대지역을 정복하자 그들마저 모두 떠났다. 그리하여, 유대인이 이스라엘을 세우기까지 약 1900여 년 동안 세계 여러 곳을 방랑하는 동안, 그들의 용기와 신앙을 상징하는 마사다는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않고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마사다 전투 이야기는 다른 역사 기록에는 일절 없었고, 역사학자 요세푸스가 쓴 ‘유대전쟁’ 속에서만 나오는데, 정작 '요세푸스'는 AD 73년에 있었던 마사다 전투에 참여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미 로마로 변절한 사람이었으므로 유대인들은 아무도 그의 이야기를 사실로 믿지 않았다고 한다.


팔레스타인 사람들로부터 ‘저주받은 땅’라고 부르던 황량한 바위산은, 1842년에 미국인 여행자에 의해 그 존재가 알려졌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점차 역사 속의 마사다로 바뀌어 가자 신생 독립국으로서 유대인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하던 이스라엘 정부는 이를 발굴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1963년부터 65년까지 이스라엘 고고학자들과 발굴 지원자 5,000여 명에 의해 진행된 발굴작업으로 헤롯 시대의 건조물과 거대한 수조, 로마식 목욕탕과 유대 반란군의 막사, 창고 등 마사다 요새의 2/3가 발굴, 복원되었고 로마군이 요새를 둘러서 쌓았던 성채와 그 외곽에 있었던 로마군 막사 유적도 발굴되었다. 험난한 지세로 지난 2,000년 동안 이 요새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았지만, 이제는 관광객을 위한 트래핑 샛길과 케이블카도 설치되어 있다. 


무덥고 황량한 사막 가운데, 그것도 분지형인 바위산 정상에서 포위된 상태로 3년을 버틴 유대 군이 땔감이나 피복 등의 생활 필수품과 급수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었을까? 특히, 급수에 대한 의문의 해답은, 고고학자들이 발굴기간 중, 때때로 시속 100㎞의 강풍과 더불어, 갑자기 쏟아지는 장대 소나기로 눈 깜박할 사이에 골짜기의 말라붙었던 개울(와디)이 강으로 바뀌는 등의 기후조건을 체험하면서, 산 정상에 헤롯 왕이 만든 거대한 물탱크에 물이 가득 차 있었다는 기록을 믿게 되었고, 그외의 의문에도 답을 찾았다고 한다.  


1960년대 중반, 발굴이 진행되자 1억 가까운 인구를 가진 적대적인 아랍국들에 둘러 쌓여 생존의 위협을 받던 이스라엘의 국방 장관 ‘모세 다얀’은 마사다의 신화를 이스라엘 국방군의 정신전력 고양에 활용하고자 모든 신병훈련을 받는 군인들은 부대에서 이곳까지 명예스러운 행진을 하며, 밤에 이곳을 올라 "다시는 마사다가 함락되게 하지 않는다!"는 맹세를 하며 군인정신 고양과 유대인의 불굴의 역사를 추앙하고 이곳에서 훈련을 끝마치게 했다. 하지만, 오늘날 이스라엘의 고고학계 일부 인사는 마사다가 ‘정치와 고고학이 결탁해 역사적 사실을 미화하는데 이용됐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으며, 어느 정도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고도 한다.


3차 중동전쟁 이전에도 일부 이스라엘 장교들은, “이스라엘의 정치·교육·군사 지도자들이 마사다를 이용했다. 그들은 군대 창설 과정에서 용기와 결사항전의 본보기로 마사다를 내세워, 국민에게 패배의 참혹함을 보여 주어 전쟁에 지면 모두가 죽는다는 생각을 심어 주려 했다”라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광신과 집단 자살 이야기를 어떻게 국가의 정체성으로 삼을 수 있는가? 마사다를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면서, “이제 마사다는 잊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수년 뒤에 벌어진 제3차 중동전에서 이스라엘군은 수십 배의 전력을 가진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등 아랍 국가들을 상대로 전 세계가 깜짝 놀랄만한 완벽한 대승을 거두었다. 


1967년 6월 8일 저녁, 이집트의 낫세르 대통령은 UN의 휴전 중재안을 수락하고, 침통한 표정으로 이집트의 전력 80퍼센트가 상실되었음을 공식발표하였다. 제3차 중동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이스라엘 군은 정신전력, 전술, 전기 등 모든 면에서 세계 군사 전문가들의 집중적인 연구 대상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이스라엘군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한 '마사다'가 자연스레 세계인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요즘도, 이스라엘의 중, 고등학교(7-12학년) 학생들은 ‘셀라흐’라는 프로그램으로 ‘나라사랑’ 교육을 받는다고 한다. 1주 1시간 강의와, 한 달에 6시간 및 1년에 2박 3일은 현장체험 교육을 하며, '마사다' 등 전적지의 방문도 포함되어 있다.


마사다 이외에 집단 자살사건

세계 전쟁사의 여러 곳에서 집단 자살사건 기록이 나오는데, 제2차 세계대전사에 따르면, 일본군은 사이판도를 포함한 여러 지역에서 군인, 혹은 군인과 일반 민간인이 집단 자결이나 옥쇄를 감행하였다. 전후, 일부 일본인은 이를 천황에 대한 충성심이라며 정신교육면에서 은근히 ‘야마토 다마시 (大和魂)’라는 일본정신을 미화한 측면도 있지만, 전체주의적 억압과 강요에 의한 인간성 말살 행위나 집단 광기로 보는 견해가 더 많다.


집단자결은 군국주의 일본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이런 모습은 오키나와는 물론 패전으로 버림받은 만주 지역 거주 일본 개척주민 사이에서도 일어났다. “살아서 포로의 굴욕을 당하지 말아야 한다”는 일제의 전진훈(戰陣訓)으로 가족끼리, 주민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비참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 집단자결은 “미군 포로가 되면 여자는 능욕을 당하고 남자는 사지가 찢겨 죽임을 당한다”라고 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반복학습이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침투한 결과였다.(출처 : 아틀라스뉴스)


어쨌든, 최후의 1인까지 저항을 독려하거나 최후의 순간에 그들이 자결을 감행하였던 것은 전장에서의 명예심이나 영웅심의 발로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는 개인의 이성적 의지에 따른 행동이라기보다, 다분히 집단이 결정한 행동에 아무런 저항 없이 따르는 행위에 익숙한 그들의 특성이기도 하다. 이 부분은 특히, 여자와 어린이의 경우, 정황 판단 능력이 미숙하여 그들의 적인 백인들에 대한 근거 없는 루머에 의한 막연한 공포감으로  포로가 되어 욕을 보기보다 차라리 죽음을 택한 것으로 보여 마사다의 자살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일본군 전사 기록 한 부분에 따르면, 동굴에 숨어 미군의 공격을 피하던 중 우는 아이가 있자 장교가 "소리를 내지 말라"라고 역정을 내자 아이의 엄마가 황급히 아이를 죽였던 사례도 있었으며, “죽어서도 조국을 돌보는 영혼이 되겠다...”는 다짐을 볼 때, 그들이 영웅시했던 여러 행동들은 인간적인 모성애보다는 미신과 무속신앙에 자라온 일본인의 동양적 미신관(일본은 무속신앙의 천국이다)을 극대화한 것으로 보는 관점도 있다. 최근에 군국주의 잔재 일부 인사들이 '가미카제' 특공대의 유품들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겠다고 까지 하니 전쟁 정신병자들의 망동은 그 끝을 가늠하기 어렵다.   


또 다른 자살의 유형은, 언론에도 자주 보도되는 이슬람권의 소위 자살테러인데, '지하드'(성전)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이런 무모한 행위는 “신앙적 가치관 달성을 위해 저항하고 순교하는 행위가 사후에 명예로운 보장을 받는다”는 종교적 신념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실제 이슬람권이나 중동 아랍권에서는 정치, 종교적인 이유로 이스라엘과 서구에 대한 분노와 혐오가 극심하여 이스라엘을 상대로 테러를 감행하였을 경우, 그 집안이 이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경향이 있으며, 사우디 등 일부 국가가 은밀하게 유족에 대한 경제적 보상도 해준다고 한다. 실제, 아무런 희망도 없는 암울한 미래에 좌절한 극빈층 젊은이들의 이스라엘 저주에 더해, 명예로운 종교적 가치관마저 더해진다면 자살테러를 감행할 전사는 줄을 이을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그렇지만 이 또한, 일본군의 옥쇄나 마사다의 광기 어린 전원자결처럼 종교, 군사적 원인에서 찾을 수밖에 없음으로 정신적인 지주로 승화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역사는 내일을 보는 창이다. 우리의 마사다는?

잘못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부끄럽고 아픈 역사를 묻어버릴 것이 아니라 들추어내고 반추해야 하는데, 마사다나 옥쇄 같은 집단 광기는 안 된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이념화' 하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아픔을 되살리는 교훈으로 삼아야 할까? 우리 역사 중에서 가장 큰 치욕적인 사건인 ‘삼전도의 비’와 ‘8월 29일 경술국치’였다. 그런데, 그 진정한 의미를 아는 이가 우리 젊은이 중에서 과연 얼마나 될까? 


서울시 송파구에 세워진 삼전도비(碑)의 굴욕은, 야만인이라고 상대도 않던 오랑캐에게 나라가 짓밟히고 왕마저 온갖 수모 속에, 목숨을 구걸하고자 오랑캐의 예법에 따라 음력 정월의 매서운 강바람을 맞으며 임금(인조)과 세자(소현)가 꽁꽁 언 땅 위에 세 번 엎드려 절하고, 아홉 번이나 이마가 피바다가 되도록 맨땅에 머리를 박았던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모욕을 감내한 것도 모자라서 그 자리에 그들의 목숨을 구해준 대청황제의 공을 기리기 위한 칭송비- ‘삼전도의 비’까지 세웠던 수모의 현장이다. 그런 아픔을 지닌 역사적 현장을 우리 선조는 어떤 식으로 처리하였던가? 지금은 복원되어 있지만 한때, 나라의 수치인 이 비석만 없어지면 오랑캐에 당한 능욕마저도 잊힐 줄 생각하여 한강변에 비석을 파묻었던 한심한 시간을 가진 적도 있었다.


치욕스러운 삼전도 비석. 굴종을 당하고도 감사하고 칭송하다니...

그런데, 그보다 더 큰 치욕은 일본에 의한 조선의 병탄이었다. 한때 식민사관에 의해 ‘한일합방일(韓日合邦日)’로 교육되었던 ‘국치일(國恥日)’ - 1910년 8월 29일 - 찬란하였던 5000년 역사를 지켜오는 동안 930여 회의 많은 외침을 받았고, 또 많은 모멸스러웠던 순간들 가운데서도 꿋꿋이 한민족의 면면을 이어 왔던 우리 민족이 나라를 송두리째 잃었던 한민족 최고의 수치스러운 날이다. 그런데, 우리 민족은 아픔을 잊기 위해 기쁨을 더 찾는 것일까? 우리는 일제의 침략에 나라를 송두리째 잃었던 국치일을 참으로 무심코, 아니 애써 무관심하게 지내면서도, 오히려 남의 힘에 의해 나라를 되찾았던 ‘광복절’을 더 크게 경축하며 기리는 것 같다. 


이스라엘이나 한국처럼 남의 지배를 당해 본 민족이 지배를 해 본 민족과 동등해지거나, 그들보다 앞서가려면 그들보다 몇 배나 더 강한 정신력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오늘날의 이스라엘에서 마사다가 존재하는 이유이고, 우리가 우리의 마사다를 찾는 이유이다. 우리 후손들의 민족정신을 북돋우기 위해서라도 우리 나름의 마사다를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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