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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웅 Jan 17. 2023

중동전쟁의 주무대 '시나이' 반도

어느 군사외교관 이야기 (이집트, 제10화)

이스라엘의 건국, 그리고 범아랍과의 대립

제3차 중동전쟁, 이스라엘의 선제공격과 속전속결

역사 속으로 흘러간 대규모 '전차전'의 주무대

4차 중동전쟁과 '사다트'의 개혁, 그리고 10.6일 승전 기념행사

캠프 데이비드 협정과 이집트 승전 기념 박물관



이스라엘의 독립과 중동전쟁 발발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아랍 각국은 독립하였지만, 곧이어 독재, 인권, 테러, 종족분쟁, 종파갈등, 팔레스타인 난민촌, 이스라엘 정착촌, 방벽 등과 같은 주제어가 중동과 동의어로 간주될 정도로 부정적 이미지들이 난무하였다. 분쟁의 원인은 다양하지만, 아랍 국가들을 결정적으로 분노하게 만든 것은 이스라엘의 건국이다.


예루살렘 '통곡의 벽'과 저 멀리 보이는 이슬람 '바위의 돔' 모스크(황금 지붕)

특히, 서구는 타 종교의 민감한 곳을 건드렸다. 이스라엘이 독립할 때 서구가 인정한, 팔레스타인과 예루살렘 지역은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3대 종교의 성지가 있는 곳이다. 무엇보다, 이슬람교에서는 예언자 무함마드가 승천하였다며 성스럽게 여기는 '바위의 돔'이 성전산 중앙부에 있다. 물론, 기독교는 기독교대로 팔레스타인의 예루살렘 지역에는 나사렛 예수의 탄생지가 있어 성지순례단이 몰려오고, 구약성경에는 선지자로 등장하는 ‘삼손’의 연정을 받은 ‘데릴라’도 ‘블레셋(‘팔레스타인’이라는 뜻) 여인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스라엘 내 팔레스타인 영토의 소멸 진행

유대인은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 전후 세계 최강국으로 등장한 미국, 영국 내 유대인의 강력한 지원으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건국하였다. 성경을 근거로, 많은 종교적인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조상의 땅에, 자신들이 그토록 그리던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운 것이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으로서는 약 2,000여 년간 자신들의 땅에서 대대손손 살아오던 곳이며, 조금씩 조금씩 이주해 오던 유대인과도 사이좋게 지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이들이 서구의 지원을 등에 입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건국하고, ‘성경에 의하면 그곳은 우리 땅’이라고 하며, 자신들을 내쫓았으니 그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독립하자, 아랍은 곧바로 ‘반유대주의’를 결성하여 서구와 이스라엘에 저항하였다. 신생국 이스라엘은 그 탄생과 함께 곧, 중동과 세계의 화약고가 되었다. 현재의 이집트는 출애굽기 시절 파라오의 이집트와 다른, 아랍인의 나라 이집트이지만... 과거, 로마의 억압에 2천여 년간 전 세계를 유랑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디아스포라'(방랑)에서 돌아와 나라를 세우고 정착하자, 이를 막으려는 이집트 등 아랍국가와 운명의 결전을 피할 수 없었다.  오랜 갈등을 반복하여 온 이슬람과 서구를 대변하는, 새로운 전쟁터가 되어 버린 것이다. 


아랍의 분노는 이집트가 주축이 되어 시리아, 요르단 등과 연합하여 이스라엘을 포위, 공격하는 형국이었다. 아랍은 약 1억이라는 인구와 소련의 지원을 받는 약 1백 만의 군대로 이스라엘을 압박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특유의 단결력과 미국과 서구의 지원 아래 매번 ‘일점양면’ 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며, 오히려 전쟁힐 때마다 그 영토를 확대하였다. 이스라엘이 오랜 방랑의 결과 체득한 다양한 문화적 배경으로 독립이라는 '생존 전략'을 철저히 구사한 데 비해, 아랍은 정체된 가운데 이슬람이라는 동질적이고 획일적인 사고에만 안주하며 '겉치레적인 체면'을 중시한 결과가 전쟁에서 그대로 반영된 결과이다.


제3차 중동전쟁, 이스라엘의 선제공격과 속전속결 

제1, 2차 중동전이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음에도 아랍제국들과 평화조약이 체결되지 않아 이스라엘의 국경선에는 여전히 전운이 감돌았다. 1967년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은 시나이 반도 남부의 이스라엘의 유일한 해상 통로인 ‘티란’ 해협의 봉쇄를 선언했다. 이스라엘은 곧바로 전군 동원령을 내렸고, 요르단과 시리아도 기다렸다는 듯이 즉각, 대이스라엘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스라엘의 국가존립 자체가 위협받게 된 것이었다.


6일 전쟁동안 이스라엘 군의 시나이 공략도

이스라엘은 국토의 종심이 얕아 선제공격을 당하면 전 국토는 순식간에 유린당한다. 아랍에 포위된 이스라엘로서는 ‘내선 기동’의 이점을 살려야 한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아랍의 주력인 이집트를 먼저 공격하기로 하고 공군력을 이용하여 주요 거점 제압과 제공권을 장악한 뒤, 일부 부대가 요르단, 시리아 군을 견제하는 동안에 주력인 기갑부대는 '시나이 반도'내 이집트 군의 주요 요충지를 격파하고 수에즈 운하까지 신속히 전진한 다음, 다시 병력을 돌려 '골란 고원'의 시리아를 격파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처럼, 이스라엘과 이집트가 벌인 '중동전쟁'은 시나이 반도와 골란 고원의 양면전이다. 제3, 4차 '중동 전쟁'간 대규모 '전차전'이 벌어진 이집트 쪽 전쟁의 무대는 ‘시나이’ 반도로 아직도, 모래 더미 속에 부서지고 녹슨 전차 잔해가 눈에 띌 정도다. 


전투력이 열세하고 포위에 처한 이스라엘은 기습작전을 구상했다. 공군은 250여 기에 불과한 가용 전폭기를 이용하여, 아랍군의 공군기지 28개소 중에서 미그 21기 등 이스라엘 공군에 위협이 될 수 있는 공군 기지 11개소를 우선 타격목표로 정하였다. 그리고, 6월 5일 아침 7시 45분에 이들 기지를 동시에 타격할 수 있도록, 비행거리와 이스라엘 첩보기관이 제공한 이집트 공군의 조기경보 체계가 잠시 중지되는 시간대와 아침 안개가 걷히는 시간을 고려하여, 각각 발진시켰다. 동시 기습 간 가장 어려운 레이다 탐지를 회피하기 위해, 각 기지당 4개 편대가 15분 간격으로, 약 50미터 정도의 저공비행으로, 지중해 상공으로 돌아, 이집트 공군기지를 제파식으로 폭격하여 비행장에 있는 공군기를 제거하였다. 이 초전의 기습공격은 매우 성공적이어서 공격개시 3시간 만에 이집트의 가용 전투기 340기 중 300여 기가 파괴되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공군의 우수성을 과시한 공격은 또 있었다.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이집트 주요 육군 사령부 지휘관들은 출근 길에 태반이 넘게 희생되어 개전과 동시 이집트군은 중추신경인 지휘계통이 와해되어 버렸다. 마치, ‘다웟’의 ‘돌팔매질’ 한 방에 거구의 ‘골리앗’이 쓰러진 것처럼… 사실상 전쟁의 승패는 결정 났던 것이다. 이 6일간의 전쟁 기간 중에 아랍공군은 416기를 상실하였으나, 이스라엘은 겨우 25기를 상실하였다. 그나마, 이들도 모두 대공화기에 의한 것이었다. 이 전쟁으로 이스라엘의 주력기였던 프랑스의 ‘미라주’ 전투기는 일약 세계적인 전투기로서 그 명성을 날렸다.


한편, 육군도 공군의 공격이 시작된 지 15분 후인 오전 8시에 이스라엘 육군의 3개 기갑부대가 세 방면으로 공격을 감행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사용되었던 미국제, 영국제의 이스라엘 전차는 이집트의 구소련제 T-54, 55에 비해 성능이 떨어졌으나, 이스라엘은 장갑 두께를 늘리고 주포의 구경을 키워 성능을 개선하였다. 한편, 시리아와 이라크가 제대로 협공도 못하고 허둥대는 사이, 시나이 전선의 이스라엘군은 이집트군을 격파하고 빠른 속도로 시나이 반도를 질주하여 수에즈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다시 방향을 돌려 반대편에 있는 시리아군을 격파하고 '골란' 고원마저 점령하였다. 그야말로, 전쟁사에 길이남을 속전속결이었다.


1967년, 제3차 중동전(‘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 공군기와 전차대의 속전속결로 몇 배 이상의 전력을 가진 이집트 아랍 연합군을 완전히 궤멸시켰다. 전쟁의 종결이 선언되던 1967년 6월 8일 저녁,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은 UN의 휴전 중재안을 수락하고, 침통한 표정으로 이집트의 전력 80%가 상실되었음을 공식으로 발표하였다. 이집트의 발표에 따르면 전사 12,000명, 포로 5,500여 명이었고, 900대 이상의 전차가 파괴되거나 포획되었다. 이에 비해, 이스라엘은 대이집트 전의 피해만 전사 275명, 부상 800명에 불과했고 총 61대의 전차를 상실하였다. 너무나 큰 전과와 함께, 6일 만에 끝난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느꼈을 승리감에 비해, 아랍이 느꼈을 열등감과 패배감은 깊은 상처가 되어 또 다른 분쟁의 씨앗이 되었다.


4차 중동전쟁과 '사다트'의 개혁, 그리고 10.6일 승전 기념행사

이에 비해, 이집트의 제4차 중동전쟁 승전은 '사다트' 대통령의 절치부심 노력의 산물이었다. 1967년 ‘6일 전쟁’ 이후, 아랍제국은 이스라엘에 패했다는 불명예와 자존심 실추로 국민적 사기가 말이 아니었다. ‘나세르’ 대통령은 이로 인해 화병으로 사망했지만, 뒤를 이은 ‘사다트’ 대통령은 집권하자마자 이스라엘을 철저히 연구하여, 과거의 전쟁과 달리, 6여 년 간 치밀하고 엄격하게 준비하며, 군 개혁으로 군대의 후진적 요소를 철저히 제거하고 군사력을 훌륭히 재건하였다. 예컨대, 이스라엘에 정보를 팔아넘긴 정보 조직과, 도망치기에 바빴던 무능한 부자출신 장교들을 모조리 숙청하고, 장교 임관은 출신이나 배경을 배제하고 철저히 실력 순으로 하는 등 부패한 군 장교 조직을 숙청하고 새롭게 개혁하였는데, 이게 일반 국민의 지지를 받고 먹혀들었다. 


수에즈 운하를 도하하고 바레브 라인을 돌파한 이집트 군

1973년 10월 6일 오후 2시쯤, 시나이 반도와 골란 고원에서 이집트, 시리아가 일제히 이스라엘에 대한 기습공격을 감행하였다. 이것이 ’ 10월 전쟁’ 혹은 ‘욤키푸르(속죄일, Yom Kippur)’ 전쟁이라는 제4차 중동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이집트는 작전적 측면에서, 완벽한 보안으로 과거 이스라엘이 감행했던 방식으로 불시에 기습을 감행하여 초전 3일 동안에 군사적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제 3차중동전, ‘6일전쟁’ 승리의 주역인 이스라엘 공군은 개전 초, 이집트의 SA-6 등 지대공 미사일에 순식간에 50여기가 격추당하였고, 전쟁기간 모두114기가 격추 당했다. 아랍 공군은 더 많은 442기를 잃었지만, 3차전에 비할 수 없는 성과였다. 지상군도 3차전에서 이름을 떨친 이스라엘 전차대의 250여대 전차가 ‘AT-3 Sager’ 대전차 미사일을 맞아 거의 괴멸되어, 현대전의 주력이었던 전차 시대의 종언을 고했다. 뿐만아니라, 스에즈 운하보다 15~20m가 높아 ‘난공불락’이라던 ‘바 레브(Bar Lev)’라인도 이집트의 물대포(고압 펌프)로 2시간만에 뚫렸다. 제4차 전쟁 초반 이집트의 성공적인 기습 작전으로 이스라엘은 국가 소멸의 위기에까지 직면하였다. 물론, 아랍 공군은 이스라엘보다 많은 442기를 잃었고, 전사자도 이스라엘이 2,700여 명이었는데 비해, 아랍은 19,000여 명을 잃었다. 하지만, 아랍의 초전 승리를 감안하면 크게 밀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집트군이 공격 작전을 전개할 때 발생된 1군과 3군 간의 간격을 포착한 (미국 첩보 위성이 제공한 정보로 추정) 이스라엘군이, 이 간격 사이로 기갑부대를 투입하여 이집트 제3군을 수에즈 지역에 고립, 포위하였다. 이 때문에 승리와 전과확대를 중지하고 순식간에 공세에서 수세로 전환된 아랍 측이 유엔을 통하여 정전을 요청함으로써 제4차 중동전은 종결되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스라엘의 승리였지만, 이집트는 미국이 위성장비를 이용하여 정보를 제공하는 등 서방 측의 개입 때문이었다며, 전쟁 자체는 자신들의 승리라고 주장하고, 지금껏 패배를 부정한다.


미국의 중재로 이루어진 '캠프 데이비드' 협정

제3차 중동전에서 워낙 일방적으로 이집트를 두들겨서 형편없이 당하던 이집트를 우습게 보다가, 하마터면 멸망할 뻔했던 이스라엘은 한숨을 돌렸다. '시나이' 반도에서 아랍과의 싸움을 '다웟과 골리앗의 싸움'이라며 죽기 살기로 싸운, 이스라엘은 제4차 중동전에서도 승리했다라고 주장하였지만, 그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반면에 패전으로 울상이어야 할 이집트가 제4차 중동전은 자신들의 승리라며 자축을 하였다. 


양측의 견해가 어떻든, 1973년 제4차 중동전 초기에 이집트가 보여 준 치밀한 전쟁 준비와 초기작전 그리고 이집트 군이 보여준 헌신적인 전투행동과 눈부신 전승은, 제1차 전쟁에서부터 제3차 전쟁까지 보여 주었던 이집트 군의 무기력한 모습과는 확연히 달랐다. 한때, 망국의 위기로 내몰렸던 이스라엘도 이집트를 더 이상 과소평가할 수 없었다. 이에 양국은 1978년 미국이 주선하였던 ‘캠프 데이비드’ 협정에 서명하여 이집트-이스라엘 간에는 형식적이나마 화해가 이루어졌다. 이들의 휴전과 국교 수립으로 이제는 수백 대의 전차끼리 대규모 결전을 벌이는 일은 역사 속에 사라졌다. 이 협정으로 전쟁의 패러다임이 바뀌게 되었다.  


종동평화협정의 주역, 사다트(이집트), 카터(미국), 베긴(이스라엘) 출처: 인터넷

'캠프 데이비드' 협정으로, 이집트와 요르단 두 나라는 구소련과 결별하고, 이스라엘과 국교를 수립하여 적대 관계를 종식하였다. 휴전의 항구화로 잃었던 영토의 회복, 그리고, 미국의 군사 및 경제 원조 수혜를 받게 되어, 명분보다는 실리를 택하였다. 1982년, 협정의 결과로써, 이집트는 ‘6일 전쟁’으로 불리는 제3차 중동전에서 대패하면서 이스라엘에게 빼앗겼던 ‘수에즈 운하’와 시나이 반도를 회복하였다. 


수에즈 운하는 연간 50~60억 달러 이상의 통행료 수익을 보장하며 국제사회 경제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집트의 황금 거위이다. 그리고, 이집트는 시나이 반도의 영토권을 보장받고도 군 주둔을 수에즈 운하 서쪽에만 국한하라는 국제사회의 요구로, 이스라엘과 접경지역에 군사력을 배치하지 않아도 되었다. 대신 미국 등 13개국의 병력 2,000여 명과 연 5,000만 불의 예산으로 운영되는 ‘다국적 감시단(MFO: Multinational Forces Observers)’이 주둔한다. MFO는 이 지역을 시나이 반도를 4개의 소구역으로 나누어 양국군의 동향을 감시한다. 이제, 시나이 반도에서 대규모 열전(熱戰)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덕분에, 이 지역은 중동의 새로운 관광 명소가 되었다. 또한, 이집트는 이스라엘과 국교 수교와 상호 승인의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매년 20억 달러 군사원조와 10억 달러의 경제원조를 받는다. 


이처럼, 이집트는 군사, 경제적으로 큰 이득을 얻었지만, 결과적으로 미국의 원조는 독이 되었다. 미국은 이집트와 이스라엘에 각각 군사 및 경제원조를 제공하였는데, ‘약자에게 더 큰 떡을 주는 건가?’ 항상 이스라엘에 조금 더 많은 원조를 제공하였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대외 군사무기 판매 대상국에도 이스라엘은 항상 최우선적으로 고려되었지만, 이집트는 늘 후순위에 있었다. 미 의회가 이스라엘에는 판매를 승인하면서도 이집트에게는 판매를 거부하거나 인도를 지연시킨 무기도 있었다. 그리고 40여 년이 지났다. 야생 동물도 인간이 주는 먹이에 맛들이면 야성을 잃어 버리듯이, 이집트는 이제 더 이상 군사적으로 이스라엘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그리고, 외교적으로도 '캠프 데이비드' 협정 이후 요르단을 제외한 전 아랍 제국 등 아랍연맹으로부터 '변절자'로 낙인찍혀, 더 이상 아랍제국의 종주국 역할을 하지 못한다.


종전 후, 이집트는 해마다 ‘10월 6일 전승기념일 행사’를 국가와 군의 주도로 성대하게 거행한다. 우리의 일산 신도시처럼 새로 건설된 도시 이름도 ‘6th of October City(10월 6일 도시)’라고 명명하여 제4차 중동전의 전승을 기념하고 있다. 이집트는 ‘왜, 확고하게 자신들의 승리라고 주장할까?’ 이집트는, 만약, 이스라엘이 이겼으면, "미국이 왜,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강요하고, 다국적 감시단(MFO)을 시나이 반도에 두냐?"라고 반문하며...  “또, 만약 미국의 도움 없는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승리였다면, 이스라엘이 수에즈 운하와 시나이 반도를 순순히 양보했을까?”라고 반문한다. 이것이 아랍의 관점이다. 실제로 전쟁 초전 3일간의 이집트와 시리아의 파죽지세는 이스라엘을 국가소멸의 위기까지 몰고 갔었었고, ‘6일 전쟁’의 영웅이었던 이스라엘의 ‘모세 다얀’ 국방상도 초전 실패의 책임으로 해임되었다. 이스라엘도 이집트의 승리를 인정해 준 셈이다.     


이집트 제3군의 군사박물관

카이로에서 시나이 반도에 가려면,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가르는 수에즈까지 약 100Km는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차량으로 약 1~2시간이면 갈 수 있다. 수에즈 시에는 이집트 제3군 사령부가 주둔하고 있다. 이 부대가 4차 중동전 당시에 포위를 당했던 부대인데, 사령부 본청에는 북한 화가들이 4차 중동 전쟁 승전을 그려 준 대형 걸개벽화가 여기저기 걸려있어, 바라보는 필자로서는 약간 어색하고 거북하였다. 이집트는 무바라크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했을 정도로 북한과 가까워 북한 기술자와 그 가족이 많이 거주한다. 그리고, 북한군 대좌급이 무관으로서 상주하며 주재국 공식행사에 자주 참여하여, 필자와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수에즈운하 하안의 제3군사 박물관 조형물

제3군 사령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신들이 고립되는 바람에 패전하였다는 생각 때문인지, 이집트군에게 다소 유리하게 과장해 놓은 게 흠이긴 하지만, 4차 중동전 당시의 상황을 잘 유추해 볼 수 있도록, 실지형에 맞추어 이집트군의 초소와 ‘바레브 라인’으로 유명한 이스라엘군의 진지를 묘사한 야외 군사박물관을 만들어서 방문객에게 보여 준다. 이곳에는 여전히 우리 군의 ‘초전박살’과 비슷한 당시의 ‘구호’들이 이집트군의 초소와 진지는 물론, 이스라엘군의 각 진지의 벽면에도 많이 쓰여 있다. ‘구호’는 후진국 군대가 적에 대해 ‘허장성세’로 과장하는 수법으로, '빈 수레가 요란한 법이다'. 약하고 무능한 군대일수록 정신력을 북돋우기 위해 온갖 말로만 하는 구호가 난무하지만, 정작 전장에서 이런 구호가 전투력 강화에 일조를 하였을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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