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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웅 Mar 06. 2023

가문과 종교가 지배하는 이슬람 공동체 '움마'

글로벌 다양성 이해 (이슬람과 부족주의, 제6화)

이슬람 공동체 '움마' - 가문 (부족)과 신앙이 결합된 집단주의 

이슬람 제국의 확장과 '부족주의' 통치방식 - 일상생활의 규범과 이슬람 원리주의

서구 제국주의 침공과 부족 단위 '움마'의 국가화

사회공동체 '움마'의 축소형 '가족 공동체'



이슬람 공동체 '움마' - 가문 (부족)과 신앙이 결합된 집단주의 

중동과 아라비아 반도, 그리고 북아프리카를 아우르는 아랍 지역은, 농경 사회인 서구나 동양과 달리, 덥고 황량한 지역이다. ‘유목민’들은 건조한 기후 탓으로 오아시스나 간간히 나있는 풀을 찾아 함께 이동하며 살아간다. 가족과 떨어지면 죽을 수밖에 없는 곳이다. 그런 특성상, 자기가 속한 부족이나 가정에 충실하였다. 또한, 물자가 부족한 사막이나 초원에서는 약탈과 전쟁 문화가 지배하였다. 때문에, 유목민 부족과 부족 사이에는 협의와 평화가 중요하다. 따라서, 이들은 형제를 자청하였고, 만날 때마다 관습에 따라 서로 '허그'하며 빰에 가볍게 키스를 하고, 차를 나누는 등 진하게 형제애를 나눈다. 


이처럼, 형제애나 충성의 대상은 부족이나 확대된 가문이다 보니, 자연스레 각 부족의 족장들은 더욱 강력한 통합력으로 주민을 결속하게 만들어 전통적인 ‘부족주의(혈통주의)’가 확립되었다. 유목사회가 가부장적 사회구조와 남아 선호사상, 그리고 가족과 가문 중심이 되는 배경이다. 때문에, 유목 위주 아랍은 왕국이나 국가보다 가문이나, 부족이 훨씬 더 강한 유대감을 가졌다. 

 

급격하게 확산되는 이슬람(출처: 네이버 포스트)

역사상 가장 거대한 이슬람 제국은 아랍의 한 유목민 부족에서 출발하였다. AD 620년경 아라비아반도의 ‘메카’에서, 아랍 유목민의 지도자인 ‘무함마드’가 이슬람을 창시한 이후, 그의 추종자들에 의한 ‘정통 칼리프’ 시대에는 이슬람을 믿는 아랍 세력들이 급격히 팽창하였다. 


또한, ‘우마이야’(AD 661-750) 왕조는 최초의 아랍계 중심의 세습왕조로서 서쪽으로는 ‘지브롤터’를 지나 711년에는 이베리아 반도까지, 동쪽으로는‘펀잡’, ‘발루치스탄’ 지역 (현재의 파키스탄)까지 진출하였다. 그리고, 이를 이어 AD 750년에 건국된 ‘압바스’ 왕조는, 아랍계와 비아랍계가 이슬람 안에서 더불어 사는 ‘무슬림 평등’ 원칙이 확립되었고, 사실상 ‘아랍’이 ‘이슬람’으로 진화하여 이슬람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리고, 이슬람은 두 제국에서도 항상 이들의 중심에 있었다.


이처럼, 제국의 확장으로 기존 부족사회에 어느 날,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들어섰다. 무함마드 이래, 사회, 정치, 문화, 경제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이슬람'이 부족사회에 도입되자, 복종과 헌신의 대상은, 자연스레 ‘기존의 부족’과 '이슬람' 종교를 결합한 ‘움마’ 즉, ‘이슬람 사회 공동체’가 되었다. 이슬람의 '움마'는 모든 무슬림의 공동체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아랍어의 '국가' 또는 '국민'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나왔다. 


즉, 모든 무슬림이 서로 형제자매이며, 종교적, 인종적, 문화적 배경이 다르더라도 '움마'의 일원으로서 연대를 이루고 있기에, 모두가 알라(신) 앞에서 평등하며, 서로 사랑하고 배려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또한, 이슬람의 역사적 발전과 흐름에서 '움마'는 다양한 문화와 언어를 가진 다양한 지역의 무슬림들이 서로 교류하고 협력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이슬람은 ‘인간과 신의 수직적 관계’를 강조하는 종교적 교리를 강조하였지만, 특이하게도, 국가에 대한 소속감이나 충성심을 내세우는 ‘국가적 정체성’을 강요하지 않았다. 자연히, 사회적으로 개인 간의 대인관계는 서로를 독립적인 요소로 생각하였고, 느슨한 수평적 관계를 유지하였다. 


한편, 제국을 다스리는 소수의 아랍인들은 광대한 정복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서 화합과 평등의 통치 철학을 도입했다. 그들은 새 점령지의 기존 토착세력 (부족)들을 그대로 활용하여 통치하되, 세금 징수와 군사적 통제로 제국 운영하였다. 이처럼, 기존 부족의 정치 문화나 행태를 점령지의 법규로 인정해 준 ‘부족주의’ 결과로, 각 부족들은 ‘이슬람’ 안에서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고, 이는 곧 큰 확장성을 제공하여 부족 중심의 유목사회인 북아프리카, 아랍,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이슬람이 급속도로 확산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이슬람은 곧 광대한 지리적인 간격에도 불구하고 각 부족들을 하나로 묶는 거대한 정신적인 주체가 되었다.  


이슬람 제국의 확장과 부족주의 통치방식 - 일상생활의 규범과 이슬람 원리주의

제국이 급속하게 커져 가자, 이슬람 세계를 지배하였던 무함마드를  계승한 자 - 즉, 선출된 정통 칼리프들(아부 바크르, 오마르, 오스만, 알리 등 4명)은, 이슬람 종교의 '이상 실현'에 필요한 세속적 권력을 장악하고, 제국의 구성원들에게는 구성원 상호 간에 가져야 할 윤리적, 법적 규범을, 현실사회의 생활 규범으로 적용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강하게 가졌다. 그리하여, 정치적 신앙공동체로서 ‘정교일치 (政敎一致)를 앞세우며 이슬람을 국교로 지정하였다. 뒤이어, 경전인 ‘꾸란’과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하디스’에 의해, 종교가 이상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세속적 권력’을 장악하고 제국의 구성원들에게 ‘일상생활의 규범’을 요구하려는 정체되고 완고한 사상이 형성되었다. 이른바, ‘이슬람 원리주의’(지식백과, ‘이슬람 원리주의’ 요약)이다. 


이슬람 원주의자들의 반민주 시위

이처럼, 이슬라 원리주의는, 1,400여 년 전 무함마드가 ‘메디나’ 시절 세속적인 권력과 종교적 권위를 갖춘 ‘정교일치’의 국가를 건설할 때, 알라(신)께 구한 사회적 계시인, ‘움마’ (이슬람 ‘사회 공동체’)를 모방한 것으로서, 이상적인 ‘이슬람적’ 인간과 사회를 구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무슬림 개개인은 이런 종교적 사상의 틀속에서 오랫동안 대를 이어 살아오는 동안, 의식 구조, 신념, 가치관, 사고체계, 관습이나 행동 등 삶의 모든 분야에서 이 사상과 동화되었다. 그 결과, 이슬람 종교는 자연스레 서민 생활의 기준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사상은 20세기 초까지 이슬람권을 깊숙하게 지배하였다. 덕분에, 서구의 신성과 달리 무슬림의 ‘알라(신)’에 대한 ‘신성’(神性)은 오늘날까지 강하게 유지되어 왔으며, 이슬람이 국교인 많은 국가에서는 전 국민이 '경건한 삶'을 추구하며 마치, 수도생활을 하는 것처럼 6신과 5행을 준수하며 꾸란과 율법에 따라 살아간다.


따라서, 종교적 권위를 가진 종교경찰은 율법에 저해되는 행위를 단속하고 심지어는 체포하여 구금하기도 한다. 신정체제를 갖춘 일부 국가에서는 꾸란이나 '샤리아' 등 이슬람 율법이 헌법과 법률에 우선하기도 한다. 예컨대, '모든 인간은 법 앞에 평등하다'면서도 '샤리아' 율법에 따라 여성은 남성의 1/2의 증언권만 가지며, 무슬림 여성이 백인 등 무슬림이 아닌 사람과 함께 호텔로 들어가려면 종교경찰의 제재와 검문을 받는다.   


그런데, 종교나 도덕(율법)이 앞서는 이런 류의 통치체제는 우리 역사에서도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고려는 불교를, 조선은 유교사상을 건국이념으로 내세웠고 왕조의 통치이념에 접목하였다. 종교와 부족(민족)이 결합되어 완고한 정치체제를 형성하였던 면에서는 이슬람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이슬람을 믿고, 아랍어를 하고, 아랍의 풍속을 존중하기만 하면 피부색이나 출생에 무관하게 아랍 형제가 되는 포용적 자세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고, 관점의 차이에 따라 본질이 흐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말 유교적 이념에 따라 고종의 '단발령'에도 죽음을 불사한 유학자들의 결기는 오늘날 이슬람 원리주의자의 완고함을 초월한다. 


서구 제국주의의 침공과 부족 '움마'의 국가화

근세 들어, 산업혁명으로 무장한 서구 제국주의가 약 200여 년에 걸쳐, 아랍 등 이슬람 지역을 침공하자, 거대 제국 ‘오스만 터키’는, 서구 제국 (帝國) 주의에게 안일하고 무기력하게 대처하여 많은 영토를 상실하였다. 이렇게, 정치권력이 바뀌어도 이들의 이슬람 중심 율법주의는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식민지 확보에 주력하던 서구 열강들은, 정작 현지 주민들의 생활에 대해 무지하였다. 서구는 이 지역을 지배하는 동안 무자비한 박해와 탄압으로, 기존의 공동체를 와해시키려 하였고,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인위적인 국경선을 그었다. 


그러나, 이렇게 ‘인위적인 주권을 가진 국가’는 ‘알라(신)의 통치권’과 ‘움마의 우위’에 대한 지역 부족민들 (혈연 중심)의 믿음과는 공존하기 어렵다. 서구가 그어놓은 경계선이 아랍 각국의 국경선이 되었지만, 베두인 등 많은 유목민은 부족장의 통제아래 여전히 양 떼를 몰고 국경선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조상이 하던대로 '알라(신)'을 따르며, 사막의 목초지를 찾아 떠돌아다닌다. 이 또한, 일종의 이슬람 사회 공동체 '움마'이다.


아랍 각국은 이런 '움마'의 확대된 모습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만 터키’와 서구가 물러가자, ‘압바스’ 조 멸망 이후 ‘오스만 터키’에 복속하던 '아랍' 각 지역 주요 부족들은, 각각 독립을 추구하였다. 이들 중 ‘이븐 사우드’는 사우디아라비아를 건국하였고, ‘하세미트’ 가문의 형제들인 ‘파이잘’은 이라크를, 그리고 ‘압둘라’는 요르단을 각각 건국하였다. 이어서,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모두 22개의 아랍국가가 건국되었다.


이슬람 사회공동체 '움마'의 축소형 '가족 공동체'

부족 단위 '움마'가 '국가'의 의미로 '국가'로 확장된 반면에, 역시 '국민'의 의미를 지닌 '움마'도 개개인의 가정과 '소가족 공동체'로 '움마'의 일종이 된다. 이집트 수도 '카이로' 시내에는 짓다만 건물이 무수히 많다. 그런데, 이런 건물에 대부분 3대가 기거한다. 주로, 1층에는 조부모가, 2층에는 부모가, 3층에는 아들이 산다. 이들 가정은, 가문이나 부족을 의미하는 대가족 제도도 아니고, 도시화에 따른 핵가족도 아니지만 소가족 제도의 형태로, 이슬람적 율법에 충실한 가족들이다. 그러니, 부모와 같이 살며, 부모를 봉양하는 것은 당연한 '불문율'이다. 자식은 조기에 사회에 진출하려 애를 쓰지만, 그 목적이 돈을 벌어 독립 가정을 이루겠다는 게 아니라, 부모가 꾸려가는 살림에 보탬이 되기 위해서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탓인지, ‘카이로’는 인구가 2,000만에 가까운 대도시이지만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원룸 등 1인용 숙소는 별로 없다. 이들은 가족과 분리되어 독립세대로 홀로 사는 개인이 거의 없는 탓이다. (극히 일부지만 지방에서 홀로 올라와 자취하며 학업이나 경제활동에 나서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도심의 이런 모습은 자타가 공인하는 아파트 공화국인 우리의 가정과는 전혀 다르다. 


‘가족과 함께’ 사는 저들과 달리, 우리의 아파트는 말뜻 그대로 분리된 공간으로 '나'를 위한 곳이다. 6.25 전쟁으로 ‘마을’이 폐허가 되자, 기존의 사회 공동체가 완전히 무너졌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피난민이나 무작정 상경 인파로 도시의 좁은 공간이나, 슬럼화된 판자촌에서 서로 부둥켜 살던 ‘우리 가족’은, 새 장소의 새로운 아파트를 찾아 거듭났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사촌도 잃고, 형제와 부모 등 가족조차 잃어버렸다. 


한국은 고령 사회로 나이 많은 노인의 삶은 고통스럽다. 이른바, 노후 준비가 덜 된 탓이다. 많은 노인이 은퇴로 경제력을 상실해 가는 동안, 젊은이들도 가정을 꾸리기 위해 부부가 맞벌이를 하는 경우가 보편화되었다. 맞벌이 부부는 아이를 키우기가 쉽지 않으니, 일부 젊은 한국인들은 아예 아이를 낳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데, 젊은이 중에는, 손주를 돌보는 부모에게 매월 일정 금액을 드린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다. ‘편안하게’ 사시라며, ‘나이 든 부모에게 용돈 드리기’를 내세우는데, 노인을 존경하는 우리의 좋은 관습이다. 하지만, 돈을 받는 부모들은 돈 안 받고 아이 돌보지 않겠다는 생각이 주를 이루고, 무슨 용돈에 조건이 붙나?” 라며 서운해한다. 또, 최근 정부가, 손자 돌봄 하는 조부모에게 일정액을 준다지만, 나이 든 조부모는 아이를 돌보고 싶어도 ‘육신이 힘들어서’ 못하는 경우도 많다. 몸만 성하면, 용돈이나 장려금을 주든 말든 '손주 사랑'에 무슨 일인들 못하랴! 조부모의 '손자 사랑'은 정량화하지 못하며, ‘사랑의 척도’는 돈이 아니다. 


무슬림이나 동남아인은 과거의 우리처럼, 부모 봉양은 당연한 일이니, 돈으로 사랑을 환산(?)하는 우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니, 이들 앞에서 이런 ‘용돈 드리기 자랑’은 금물이다. 뿐만 아니라, 역시 이슬람 국가인 튀르키예 등에서는 ‘노후대책’이라는 단어 자체가 아예 없다고 한다. 설령, 자식이 없어도 마을 공동체가 거두어 준다 하니... 그게, '움마'일까!? 과거 우리 조상들처럼, 마을 공동체가 노인들을 보살펴 주는 건데... 


경제논리로 가족마저 외면하는 ‘우리’ 공동체는 너무나 차갑고 얄팍해졌다. 이게, 우리가 바라는 선진국의 모습일까? 진정한 선진국은, 노추(老醜)에 찌드는 노인을 보다 ‘편안하게’ 남은 여생을 헤쳐나가도록 도와주는 것을 '복지의 기준'으로 삼는 성숙한 사회다. 북유럽의 복지는 말할 것도 없고, 미국만 하더라도 수많은 호스피스 병동에 자원봉사자들이 줄을 잇는다. 허울 좋은 경제성장으로, 도시화로 우리의 가치관은 어느새, ‘금전 지상주의’로 바뀌었다. 이를 보면, 우리보다 저들에게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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