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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사람

소소한 일상

by 앤노트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학교 친구들과 함께 여름 방학을 맞아 정신지체 장애인들이 모여있는 시설로 봉사활동을 갔었다.

시설 입구로 들어가는 긴 길은 여름의 울창한 나무들로 푸르고 아름다웠다. 전에 이곳을 와보았다던 친구가 [처음에 가면 무서워서 울지도 모른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땀을 흘리며 제법 걷고 나니 시설입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시설 입소자들이 활짝 웃으며 뛰어나와 반긴다.

악수를 청하고 껴안기도 하고 손가락으로 몸을 찌르고 도망가기도 한다.

외부인들을 만나기 힘든 그들에게 우리는 호기심과 반가움의 대상이었다.

우리는 도착해서 짐을 풀자마자 바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자원봉사자 분들을 도와 식사와 간식을 나르고 노래나 율동을 가르쳐주고 시설 안과 밖을 청소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우리의 임무는 그들과 즐겁게 놀아주는 것이었다.

그들은 어른의 몸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린아이들처럼 순수했다. 그들의 눈을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청소를 하고 있는데 어떤 아저씨가 조심스레 다가와 오늘 손을 다쳤다고 아주 조그맣게 상처가 난 부분을 나에게 자꾸만 보여준다. 잠깐 고민하다가 호- 하고 불어주면서 이젠 괜찮아질 거라고 했더니 너무나 좋아하면서 갑자기 다리 한쪽을 번쩍 내 눈앞에 들어 올린다.

순간 깜짝 놀랐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다리 한쪽에 모기 물린 자국이 있다.

나는 약간 긴장한 상태로 조금 떨어져서 작게 호- 했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입소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여러 명이 달려들어 본인의 사소한 상처 부위를 어필했다(!)

그 모습이 참 귀엽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그러던 중 20대 중반쯤 정도로 보이는 여성이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내 앞에서 자꾸만 모자를 만지작댄다.

진한 분홍색의 야구모자였다.

[모자 참 예쁘네요] 한마디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남자친구가 준거예요!]라는 말이 되돌아온다.

옆에 그녀의 친구들은 [**는 남자친구 있어요! 그거 남자친구가 준거예요~] 라며 부러운 듯 큰소리로 떠들어냈다. 그녀는 수줍게 웃으며 내 손을 잡고는 공중전화박스로 갔다. 그리고는 손에 꼬깃꼬깃 접힌 메모지의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신호가 계속 가도 받지 않는지 그녀는 실망 한 표정으로 말했다.

[남자친구가 전화를 잘 안 받아요. 며칠 있다 다시 온다고 했는데. 계속 기다리고 있어요.]

정기 자원봉사 하시는 분께 여쭤보았더니 잠깐 자원봉사를 하러 왔던 남자 대학생 얘기인 것 같다며 봉사를 와서 선물도 주고 그녀에게는 특히나 내 여자친구라고 하면서 잘 대해줬다고 한다. 정기적으로 오는 사람은 아니고 그냥 일회성 봉사활동이었던 모양이다.

어찌 되었던 이 남학생의 하루간의 친절은 평온했던 그녀의 마음에 파도를 일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녀는 내가 집에 가려고 짐을 꾸리는 그때까지도 그 모자를 만지고 또 만지고 그 메모지 한 장을 손에 쥐고 공중전화박스 앞을 계속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그 남학생의 친절은 결국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었을까 아프게 만들었을까.

사람들은 누구나 친절한 사람을 좋아하고 나 자신이 타인에게 친절한 사람으로 비춰지길 바란다.

하지만 모든 친절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나는 그녀에게 [기다리지 마세요. 이제 여기 안 올 거고 전화도 안 받을 거예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물론 그녀의 애틋한 눈을 보고 차마 입 밖으로 꺼내놓지는 못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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