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각의 픽셀을 책임지는 내 것이었던 하루의 총 합
내 책상 앞에는 알록달록한 나의 세계가 붙여져 있다.
막 복잡하지는 않다. 아주 심플하다.
갈색에는 내가 가장 이루어야만 하고 이루고 싶은 목표, 귤색에는 갈색 목표를 이루기 위해 매일매일 끊임없이 해야 하는 굵직한 행동 목표, 오렌지색에는 이것을 이루기 위한 방법들, 연분홍색에는 현재 꾸려 나가고 있는 사업에 관한 일정과 달성 목표, 흰색에는 하루 고정 일정표...
그리고 맨 왼쪽에는 노란색으로 매일매일 각오해야 하는 것들과,
빨간색으로 피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빨간색에는 어느 누구나 적을 법한 나태, 게으름, 미루기, 침대 등등 등이 하나씩 핸드메이드 볼드체로 적어져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겐 없지만 나에게만 있을 수 있는 피해야 하는 것이 딱 한 가지 있다.
카페지기의 카페.
카페지기가 있는 카페를 다녀오면 오랜 시간 따라다니는 후유증이 생겨버렸다.
그것은 바로 매일매일 가고 싶은 마음의 후유증. 왜 매일 가면 안 되냐고? 그곳에 가면 내가 정해놓은 나의 루틴을 제대로 이행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나에게 카페를 가는 이유는 정말 심플했다.
오랜 시간 동안 나에게 카페란 작업공간, 또는 작업을 시작하기 위한 준비공간,
아니면 베이커리와 커피 방울로 내 미각에게 설렘과 짜릿함을 주는 공 간정도였다. 장소를 많이 타는 편은 아니어서 항상 다른 카페들을 부러 찾아가 나만의 카페 취향을 형성해 가던 참이었다.
예를 들면 공간이 탁 트인 느낌과 통창으로 들어오는 빛의 산란의 정도라던지, 적당히 투박한 맛이 있는 조금은 한적한 느낌이라던지, 1-2인용 테이블의 수와 콘센트라의 위치 테이블 사이의 간격이라던지.
그러다가 카공족이라는 단어와 이를 비난하는 분위기가 떠오르면서(공부는 아니지만... 나도 거의 그에 속한 종족이었으므로) 카페에서 지출하는 카드값은 점점 커져갔다.
'작업하기 좋은 곳 = 카페'라는 체화된 지식이 내 몸에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누가 알았을까?
분명 그 정도에 지나지 않았던 카페였는데 이제는 매일 가고 싶은 동네 카페가 생겨버린 것이다. (동네 카페라기엔 꽤나 먼 동네에서도 부러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은 드립커피 맛집이지만)
그곳에 가면 이전에 나의 카페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들은 모다 사라져 버린다.
그냥 카페지기와 대화할 수 있는 바테이블로 절로 발이 움직일 뿐, 다른 행동일랑 나오지 않는다. 일부러 책이나 노트북을 두둑이 가방에 넣어 간다. 하지만 마치 명절에 할머니댁에 갈 때 이것저것 공부할 책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갔다가 결국 책 한 장 펴지 않고 집으로 돌아오는 그런 것처럼 의미 없는 가방은 늘 그대로 돌아온다.
공간 중독일까 사람 중독일까? 로컬에 오면 사람이 이렇게 변하나? 안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편해질 수 있나? 언제부터 내가 굳이 사람 보고 대화 나누는 걸 좋아했다고?
로컬에 들어와 사업을 준비하면서 현재에 이어져 있는 인연이 딱 둘 있다. 카페지기를 소개해준 비슷한 류의 사업을 준비하는 G와 카페지기. G는 이 카페를 모든 자신의 사업적인 고민을 포함에 육아, 개인적인 고민까지도 털어놓게 하는 재주가 있는 곳이라며 나를 데리고 갔었다. G는 남편 따라 로컬에 들어온 케이스인데 남편의 직업 때문에 미국 캘리포니아에 살다가 이곳으로 들어와 이제 막 7년 살이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 언니도 참... 자기 개인사를 왜 굳이 카페 사장님한테 풀어?'
이런 생각으로 나는 바테이블의 유혹에 절대 넘어가지 않으리라는 조금은 비장함을 가지고 들어섰더랬다.
남편이 커피를 좋아해 덩달아 나름의 커피 취향이 생겨버린 G는 사장님과 반가운 인사를 주고받으며 나를 소개했다.
"하하... 안녕하세요..." 어색한 웃음과 함께 앉았고, G는 에티오피아니 파나마니 콜롬비아 따위를 논하며(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무엇을 마실지 고민했다. 아메리카노나 라테정도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커피지식으로 그곳에 있자니 도통 뭐가 뭔지스러움에 입을 다물게 됐다.
사실 나는 커피를 '맛'으로(전문가들은 커피노트라고 표현하더라) 디테일하게 음미하고 느끼는 즐거움을 알고 찾는다기보다는 그냥 커피라는 '액체'를 마시는 것에 의미를 두는 편이었다. 그게 뭐든 상관없고 그냥 까만 콩을 분쇄해서 내리는 저 커피 냄새, 그 안에 있는 카페인과 커피라는 것의 공통적인 맛이면 되었다.
이런 나에게 G는 갑자기 물었다.
"너 좋아하는 음식이 뭐야? 너 좋아하는 맛이 있어? 너 좋아하는 빵이 뭐야?"
이 일련의 질문들은 취향의 문제로 넘어갔다.
"너는 취향이라는 게 있어? 그런 게 없는 사람 같아, 너."
나의 지난 삶은 좋은 것을 따라가는 삶이라기보다는 '생존'을 위한 삶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내 취향을 따질 선택지라는 것이 그다지 없던 시간들이었다는 뜻이다. 정말 말 그대로 있어서 먹었고, 없어서 안 먹었달까...
20대 후반에 갔던 아프리카 동부권 지역은 길거리에 망고 리어카, 코코넛 자전거, 바나나와 파파야, 아보카도 노점상이 즐비해 있었지만 전기가 자주 나가고, 물도 사서 씻어야 할 만큼 환경적으로는 취약한 곳이었다. 물탱크를 6개월에 한 번 청소해 주지 않으면 그야말로 세균물로 몸을 씻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엄청난 모기떼들이 인정사정없이 빨 때를 꽂고 말라리아균을 간에 집어넣는 곳이었다. 나는 그곳에 간지 6개월 만에 말라리아게 걸렸다.
말라리아에 걸렸을 때 겨우 입에 넘길 수 있었던 것이 수박, 파파야 같은 과일이었는데 다른 음식일랑 정말이지 넘길 수 없었다. 기술이 없어서 약의 세기를 조절할 수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모든 말라리아 약이 정말 지독해서 그런 것인지, 약을 먹음과 동시에 헛구역질이 시작되고 결국에는 속에 있는 것을 게워내어야 했다. 기진맥진해져 이후에는 음식을 넘길 힘조차 남지 않아 널브러져 있던 것이 5일이었다. 그래서 약을 먹는 매 순간이 두려웠던 기억이 난다.
그곳에서는 내가 자주 먹던 내장과 함께 폭 삶아진 순대, 파와 고추를 송송 썰어 넣은 달콤 매콤한 떡볶이, 돼지고기를 함뿍 넣어 끓인 얼큰한 김치찌개 같은 것은 기억에 없었던 듯 사는 것이 더 도움이 되는 편이었다. 굳이 음식에 까다롭지도 않은 나는 그냥 내가 있는 곳에 있는 것을 쉬이 좋아하고 만족하는 탓에 '이게 좋고 저건 싫어.'를 형성할 틈을 나 자신에게도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주기적으로 세일하는 과일 요거트와 바게트빵 사 먹는 것을 즐겼다. 이곳은 유독 빵이 저렴하면서도 외국스러운 맛이 있어서 잠시 해외뽕에 젖어들게 하는 마력이 있었다.)
그렇게 나는 두루두루 만족하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까다롭고 디테일한 취향을 가진 사람이 보기엔 밍숭맹숭한 취향의 소유자가 되어버렸다. 있는 것에 잘 적응해 버리는 넘나들기 쉬운 취향. 그것이 G에게나 카페지기에게는 취향 '없는' 사람으로 비칠 만큼 나는 그런 것에 무심한 채로도 그럭저럭 잘 살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게 꼭 있어야 하나...?'
꼭 취향뿐이 아니라 나를 관통하는 삶의 줄기 전반에 무심하면서도 경계 없이 흐느적거리는 옅은 생각의 가지들이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보기에는 좀 쉬워 보이는 사람으로 비춰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자기의 생각이나 취향을 명확하게 알고, 표현하고, 요구하는 사람에게는 함부로 하지 않는다고들 하더라.)
드립커피점이라 커피 가격대가 일반 커피와 같지 않아 나에게는 부담스러운 가격이다. 그래서 나의 지갑사정으로는 컴포즈나 메가커피나 가서 죽치고 있는 것이 나에게는 여러모로 가성비와 효율을 챙길 수 있는 선택이다.
하지만 나는 카페지기와 대화하며 나누는 대화의 온도에 중독돼 이것을 끊으려고 혼자서 나름의 노력을 하는 중이다. 자기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게 좋아 일부러 바테이블을 만들었다는 카페지기의 소신답게 그는 어떤 대화라도 다 환영한다. 정말 시답잖은 푸념마저도. (이런 카페지기가 나로선 너무 신기하다.)
내가 평가하는 나는 '무난'이다. 어떤 것이는 어느 곳에 가든 무난하게 적응하고 곧잘 대응하기도 한다. 까다롭지도 않다. 특별할 것 없는 편편한 시간이 나와 함께 했다. '이런 사람도 있는 거지. 이게 살기에도 편한 거지.'라는 생각이었는데 유병욱 작가의 책 '인생의 해상도'를 읽고 나니 조금은 다른 태도를 취해야겠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어왔다.
[매혹의 영역으로 자꾸 나를 데려가고, 좋은 감각을 가진 이들을 따라 해 보세요. 존중하는 시선으로 사람들을 바라보고, 나를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고, 감각을 예리하게 다듬는 노력도 틈틈이 해보시고요. 그리고 가끔씩은 제가 말씀드린 '악필의 순간'을 만나는 행운을 누리시길 빕니다. 다신 앞에 더 선명하게 드러날 세상을 기대하며... 유병욱, 인생의 해상도 中 ]
유병욱 작가는 어떻게 하면 인생의 해상도를 높일 수 있는지에 대해 말한다. 특히나 인상 깊었던 문장들은 책 앞부분에 포진되어 있었는데 그에 따르면 '사람의 입체성은 그 사람이 매혹당한 세계의 수 또는 그 세계를 파고든 깊이에서 온다.'는 것이다. 매혹당한 세계든 그 세계를 파고든 깊이든 그것이 취향이라는 것과 통한다면?
밀대 아래 편편하게 펴진 입체성이랑 한 개도 없는 얇은 밀가루 반죽 같은 나의 모습이 그려졌다. 취향이라는 것도 좋아하는 것, 관심 있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니까. 취향이 없다는 것은 나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이 그만큼 별로 없다는 것과도 같이 느껴지니 나도 서서히 내 곳에 그러모을 수 있는 취향이란 것을 탐색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들어가는 길에 조금만 방향을 틀어서 가면 카페지기의 카페를 지나칠 수 있다. 통창 너머로 보이는 카페에는 항상 바테이블에 앉는 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인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생각한다.
'아, 어찌 됐든 오늘도 커피를 내리고, 누군가에게는 커피를 추천하고, 커피콩을 볶으며, 누군가의 삶을 들으며 카페지기의 인생의 해상도가 조금은 높아졌겠구나.'
나도 오늘 나의 손을 거쳐갔던 일들과, 생각들을 정리해 본다. 그 속에서 나의 해상도를 높일 무언가를 찾겠다는 일념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