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름이지만 한편으로 마음껏 사랑하기 어려운
나에게 엄마를 만난다는 것은 그리움의 잠시 멈춤과 쇠사슬의 조임 같은 양면성이 있다.
엄마의 말을 듣다 보면 가끔씩은 숨이 막히고 나를 부정당하는 것 같을 때가 있다. 엄마가 밉거나 싫다는 것은 아니다.
엄마와 내가 항상 부딪치는 포인트.
오랜 시간 떨어져 있다가 만날 때면 엄마는 꼭 이야기하는 게 있다.
“네가 하는 건 하나도 없다. 다 하나님이 해주는 거야. “
그럼 나는 바로 반박한다.
“시람이 아무 준비도 없이 뭘 할 수 있겠어. 일단 내가 최선을 다한 노력이 있어야 그다음 한 스푼이 그분 몫일 수도 있고. 운의 영역은 반드시 있으니까. “
“이번에 우리 교회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 모집사님 딸이 의대를 지원했는데 0.04 차이로 떨어졌대.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목사님이 의대 말고 다른 곳 쓰라고 했다던데 기어코 거기 썼다더라. 기도도 마다하고! “
엄마 말속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엄마의 교회에 나가지 않은 나를 설득하고 싶은 마음이 항상 엄마의 말에는 묻어져 있고, 나는 우리의 대회가 종국에는 그런 식으로 흘러가는 것이 항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엄마는 꽤나 신앙이 깊은 사람이다. 엄마의 인생을 전반을 돌아보면 엄마가 사실상 의지할 곳이 보이지 않는 환경에서 그 존재뿐이었음을 생각하면 이해가 가면서도 나는 그 삶을 살아보지 않았기에 나에게 이런 뉘앙스를 강요할 때면 답답해지기 시작한다.
맡은 프로젝트가 잘 되거나 좋은 일이 생겨 엄마한테 전화했을 때 '다 하나님이 도와주셨다. 엄마가 기도 정말 열심히 했다.' 이런 말들이 나에게는 '네가 하는 것들 그분 없이는 절대 잘되지 못하는 일이야.'라는 말로 들린다. 그럴 때면 공기가 빵빵한 풍선이 푸시쉬 쪼그라들듯 내 마음도 함께 쪼그라들고 만다. 그 마음에도 표정이 있다면 근육을 한데 모아 잔뜩 찌그리고 있을 테지.
요즘 큰 발표를 앞두고 있어 마음이 불안하고 왠지 하루가 정리되지 않은 느낌이 든다. 이럴 때 이런 불안을 내 보이는 것이 어쩐지 나의 약점을 내 보이는 것 같아 쉽게 누군가에게 터놓기가 어렵다.
"다음 주 발표네? 와."
"응. 맞아."
말은 무덤덤하게 별 신경 안 쓴다는 듯이 답해도 나는 그 발표가 끝날 때까지 다른 어떤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할게 분명하다.
어떤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덤덤하게 마음 잘 다스리며 헤처 나가는데 나는 왜 이렇게 엉망인지. 나의 일정한 일상이 있고 이런 이벤트들이 한데 엉켜 움직이지 말고 평행으로 움직였으면 하는데, 나의 신경을 그러기에 너무 얄팍하고 집중을 분산할 수 없는 탓에 점점 더 곤두선다. 이런 마음을 엄마에게 말한다면 분명 평범하게는 흘러가지 않을 것이 뻔하기에 들었던 전화기도 다시 내려놓는다.
우리 집 막내의 둘째의 100일이 되던 날, 다 함께 외식을 하고 돌아오던 차 안에서 엄마는 막내가 애 키우다 보니 살이 많이 빠졌다고 했다. 그 말에 둘째는
"그래도 걔는 자기 잘 챙기면서 살아. 걱정 마. 자기 먹고 싶은 건 꼭 챙겨 먹더라."
엄마는 웃으며 엄마 때는 정말 없이 살아 너희들한테 다 양보했다며 요즘 젊은 엄마들은 옛날 엄마와 다르다는 걸 막내를 보면서 많이 느낀다고 했다. 아이를 키워내는 방식도 많이 달라졌다는 걸 막내를 통해 보고 배운다고 했다.
엄마도 모든 것이 처음이었을 그 시절. 나는 엄마의 처음이었다. 그리고 엄마는 그 처음에게 무척이나 애틋했다. 그 시절의 엄마의 따듯함은 저 기억의 골짜기에 꽁꽁 언 고로쇠 수액처럼 봉인되어 있다 이따금 날이 풀릴 때면 흘러내려 내 눈가를 데우고 만다. 소중한 그 시절의 엄마. 그런데 어쩌다 지금은 우리의 관계가 이렇게 되었을까? 우리 사이에는 많은 어긋남의 계기들이 존재했다.
중학교 때부터 교우 관계에 트러블이 있었던 나는 불안한 시절을 보냈고, 그런 불안한 나를 잠재우기 위해 엄마는 나름의 노력을 했더랬다. 완벽했던 초등 생활을 지내다가 덜컥 마주한 중학시절은 내가 믿어왔던 많은 것들을 깨지게 만들었고, 깨진 파편에 다친 내 마음은 아물지 못하고 곧 격렬한 사춘기로 이어졌다. 나의 반항기는 무척이나 삐뚤어지고 뾰족해서 엄마를 비롯한 가족들의 마음에 상처를 냈고 지금도 동생은 그때의 나를 회상하며 "진짜 누나 재수 없었어."라고 말하곤 한다. "응, 인정."
내가 간 고등학교는 10시까지 의무적으로 야간 자율학습을 해야만 하는 학교였다. 전남 각지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모여드는 학교였는데 그 사이에서 공부하는 것이 퍽이나 숨 막히고 적응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 학교에서 조금 덜 있어볼까 하다가 말도 안 되는 떼를 써 2학년 때부터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물론 미술학원의 내 코 앞에 있는 수많은 재능아들에 의해 내 길은 이 길이 아니다 싶었지만 그래도 학교에서 빨리 벗어나는 정당한 이유라는 핑계로 나는 미술학원을 3학년 수능을 보기 전까지 다녔다. 나의 배려 없는 이기심이었다.
엄마에게 미술 학원이란 그 어떤 것보다도 큰 의미였던 것 같다. 말 그래도 '희생'의 낙인을 찍어버린 시간. 형편이 좋지 않았던 그 시절, '미술을 해야겠다. 미대를 가야겠다.'는 나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엄마는 이곳저곳에서 돈을 빌려가며 학원비를 결제했다. 그렇게 어렵사리 학원비를 대던 엄마의 노력 끝에 그 시간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나는 전혀 미술과는 관계없는 학교와 전공을 선택했고, 그 이후로 미술의 미자라도 외면하며 살았다. 엄마는 그 시절을 회상하며 첫딸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기억한다. 나는 그 시절을 회상하며 버틸 수 없었던 고통을 기억한다.
이렇게 다른 마음을 품고 한 시절을 통과했던 우리는 지금 역시 다른 마음을 품고 지금을 살아가고 서로를 마주한다. 우리의 같은 마음은 먼 이야기인 것 같지만, 그런 엄마를 가지고 싶은 건 나의 이기심인 걸까? 그래도 엄마라는 이름은 나에게 숭고한 구슬 같은 이름이다. 절대 깰 수 없는 소중한 빛을 가진 이름. 어떤 이유에서라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