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가스라이팅이라면

순진하게 당해서도 안되지만 맞서기 어려운

by 김린

“얘, 너는 왜 그렇게 생각이 짧니? 한 번만 더 생각해 보면 좋을 것을.”

“얘, 너 정말 경험 없는 것이 딱 티 난다. 다른 곳 가면 어떻게 살아갈래?”

“얘, 너 일하는 게 지금 대수니? 네가 하는 일 얼마든지 다른 사람이 대체할 수 있어.”

“얘, 너 한국 되돌아가면 대단한 사람이라도 될 걸로 생각하는 모양인데, 정신 차려. 다 널 위해 해 주는 말이다.”

“나만 너를 이렇게 생각하는 줄 알아?”



브런치를 먹고 있는 어느 아침이었다. 내가 머물렀던 중동의 땅은 과거 신의 백성이라고 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토록 가기를 원했던 가나안 땅, 사람의 위용도 대단하고, 땅이 풍요로워 나는 곡식마다 과일마다 알이 튼실하고 맛이 좋다고 했던가?



대형마트인 스피니쉬에서 파는 수박을 보며 ‘이 땅은 정말 가나안이 맞구나.’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수박이 너무 커 항상 1/4을 잘라 달라고 해서 샀었으니까. 수박 외에도 많은 과일들이 맛도 좋고 가격도 한국에 비하면 정말 저렴했다. 레바논을 떠나면 매일 먹던 과일이 가장 아쉬울 것 같다는 생각까지 할 정도로.



그날 아침에 먹은 사과의 크기는 작기만 당도가 높아 달짝지근하고 아삭아삭 신선한 것이 딱 나의 취향이었다. 사과를 한 입 베어 물고 그 상큼함에 나도 모르게 ‘아 너무 맛있다!’라는 감탄사가 나올 정도였다. 그때 내 맞은편에 앉은 보스가 갑자기 나를 쳐다보더니



“내가 먼저 맛있다고 했는데? 이제 맛 평가하는 것도 따라 하니?”



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이게 무슨 상황인 거지?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맛있다고 말하는 것도 금지어인가? 자기가 했던 말은 내가 하면 무조건 따라 하는 건가? 왜 사람들은 그러지 않나? 너무 맛있으면 맛있다고도 말하고 너무 추우면 춥다고 더우면 덥다고 말하고! 이게 심리적으로도 건강한 사람 아닌가? 내 보스, 완전 빌런 아니야?!!!



“쟤는 그렇게 연락할 사람이 많은가? 길거리에서도 핸드폰질만 하고 있네. 저러니까 일을 못 하지. 저러니까 적응을 못하지.”



현지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된 A와 함께 업무상 필요한 외출을 할 때였다. 자꾸 핸드폰을 확인하는 A. 내가 딱 그랬었기 때문에 A가 왜 괜스레 문자를 확인하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길을 같이 걸으면서도 아직은 어색한 사이여서 그런지 괜히 핸드폰을 확인하는 20대의 A. 핸드폰만 하며 자꾸 걸음이 뒤처지는 A가 못마땅한 40대의 보스. A의 모습에서 나를 발견하는 30대의 나.



이후로도 보스는 A에 대해 ‘쟤는 계속 한국 사람들하고 연락을 주고받고 있더라. 한국이 그렇게 좋은가? 그럼, 한국에 돌아가지 왜 여기 있어?’라는 둥, ‘그러니까 여기에 정을 못 붙이지. 언제까지 저러고 있을까?’ 등의 A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생각했다.



‘어떻게 누구랑 연락하는지를 저렇게 잘 알지?’



그리고 나중에야 알게 됐다. 보스는 항상 남을 세세하게 관찰하고 있다는 것을. 보스의 관찰력은 나도 모르는 새 컴퓨터에 켜진 메신저를 흘끗흘끗 보며 나의 웬만한 인맥까지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개인 보안이 철저하게 필요한 때였다.



미안한 얘기지만 A는 나에게 적절한 방패막이이자 생존 방법을 터득하게 하는 간접적인 선생이었다. A에게로 쏟아지는 화의 원인이 되는 행동을 안 하기 위해 노력했다. A에게로 쏟아지는 화의 대상이 내가 되지 않기 위해 상황과 사람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보스의 입에 오르내리는 주인공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어느 날은 분명 나인데 내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 행동과 말투 심지어 생각까지도 다 내가 아닌 것 같은 느낌. 가공된 느낌. 내가 살아있는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이 밀려왔다.



왜 이렇게까지 되어버렸을까. 좀 모나면 어떤가, 좀 특이하면 어떤가? 그것도 지금까지의 시간을 살아올 나의 흔적인데. 하나하나 다른 사람의 기준에 맞춰 행동하려다 보니 내가 지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최악이었다. 소리 내서 웃는 것조차 눈치를 봐야 할 때가 많았다. 눈치를 보느라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졌다. 포댓자루에 덮여 다른 사람의 눈 , 코, 입을 붙이고 살아가는 느낌이었다. 숨이 턱턱 막혔다.



오늘도, 내일도 앞으로도 이렇게 하고 있을 나를 생각하니 내가 불쌍했다. 왜 내가 나로 살지 못하니…. 나로 살지 못하고 잠이 들고 눈을 뜨면 다시 나로 살지 못하는 시간이 시작된다. 이게 이렇게 괴로울 줄이야. 주말조차 일을 마다하지 않던 결과였다. 그것이 나의 미래와 발전을 위해 잘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온전하게 나로 살고 싶은 욕구가 솟구쳐 올랐다. 나에게 다시 '나'라는 평범하지만 가장 편한 옷을 입혀주고 싶었다. 때론 거칠고 무식한 모습도 괜찮으니 그냥 살아라. 그냥 있어라. 그런 나의 모습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 나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방법 중 하나라는것이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었다. 그냥 힘들어하고만 있었고 그걸 견디지 못해 마침내 환경을 바꾸기로 선택한 것이다.



나의 상황을 알고 있는 친구들은 하나같이 이것을 가스라이팅이라고 불렀다. ‘설마 이런 일이 나에게?’라고 생각했다.. 구글에 가스라이팅을 검색해 봤다.




뛰어난 설득을 통해 상대의 마음에 스스로 의심을 불러일으키게 하고 현실감과 판단력을 잃게 만들어 그 사람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는 행위

가스라이팅의 피해자는 스스로 신뢰감을 잃어가게 되고 결국 자존감을 잃게 됨

친밀한 관계에서 이루어지거나 또는 비대칭전 권력으로 누군가를 통제하고 억압하려 할 때 나타남

착함을 강요하는 것도 가스라이팅이 될 수 있음

《위키백과》




부정하고 싶었지만 정말 내 상황인 것 같았다. 보스가 나를 가스라이팅 한 것인가, 나는 내 스스로를 가스라이팅 한 것인가? 실제에서 이런 사례를 명확하게 구별해 내기는 어렵다.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이 피해자를 자신의 목적대로 움직이려는 악의적 의도의 여부에 따라 가스라이팅인지 아닌지를 판단 한다고 하는데, 그걸 어떻게 안다는 말인가? 실제 보스는 아무렇지 않게 원래 자신의 방식대로 말하고 행동할 뿐이었는데, 내가 너무 의식해서 나 스스로를 가스라이팅 한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결국에 내가 나를 못 믿고 있는 것, 내가 나에게 자신이 없고, 나의 생각 하나 말 하나 결정 하나에도 이것이 맞을까 그렇게 해도 될까를 몇십번씩 고민하게 되는 것, 무엇보다도 혼나지 않기 위해 구설수에 오르지 않기 위해 보스를 관찰하며 싫어할 만한 행동이나 말들을 피하는 것. 이 모든 것이 결국 내가 만든 결과라는 생각이들었다. 내가 애초에 자존감이 높았으면, 나를 제대로 알고 행동했으면 누가 뭐래도 그런 것에 영향을 받지 않고 상황에 맞게 대처하고 배워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됐든 이미 일어난 일. 지나간 나의 과거는 과거로 매듭짓기로 했다. 이미 내가 자존감이 바닥이며 더 이상 일을 해낼 활력이 없다면? 반드시 충전이 필요하다. 그리고 다시 다가올 시간을 설계하면 된다. 해서 나는 지나온 시간들을 교훈삼아 재기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더 생각하기로 했다. 더이상 누군가에게 또는 회사에 매이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 나의 무기를 하나씩 장착해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무엇이라도 배울 수 있다면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성장이라고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또한 사람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하고 싶은 것만 할 수 는 없다는 것도 마음에 잘 새겨넣었다.



사람에게 과거는 중요하다. 하지만 계속해서 아픈 과거를 핑계로 피해자처럼만 굴고 있다면 결코 나를 발전시킬 수 없다. 어떤 과거든 나를 한 계단 성장시키기 위해 있어야만 했던 것이고, 그 일이 결국은 더 좋은 곳으로 이끌 것이라고 믿기로 했다.



누구에게나 인생에 처음 있을 수 있는 수 많은 아픈 경험들, 고통, 번뇌. 그때는 너무 아프고 미움만이 가득하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그때의 일을 회상해 보니 나는 과거의 일들을 거름 삼아 나를 더 이해하게 되었다. 사람을 함부로 내 생각에 가두면 안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누구든 살아온 인생이 있고 그에 맞게 선택하고 행동할 권리가 있다. 내가 그것을 함부로 판단할 수는 없다. 단 그것이 나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게 나를 건강하게 가꾸어나가는 것, 무엇이든 여유와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쉽지는 않지만 이런것들을 갖추기 위해, 마음을 양식과 환경을 만들기위해 노력하는 하루를 살고 있음이 나에게 응원의 메세지를 보낸다.



'김린, 잘하고 있어.'


분홍색 및 남색 간소한 패션 책 표지 (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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