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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령 Aug 03. 2024

1장 1945년 8월 15일

1화   방장산이 품은 연월리


산맥을  타고 남도에서 넘어온 실구름이  방장산 꼭대기에  고고하게 걸터앉는다.  산 아래 저수지에 비친 구름을  실지렁이로 착각한   떡붕어가 힘차게  튀어 올랐다가  물결파를 남기고   맥없이   물속으로 사라진다.  중천 해는 여전히   높은 곳에서   펄펄 끓고 있다.  그러나  눈이 밝은 이들은  기세를 잃어가는 태양이  구름을 나르는  바람을 막아내지 못했음을   감지한다.  천년만년  여름일까. 만물은 변한다는 변치 않는 진리 아래 기울어진 자전축 위에서  허리를 굽혀야만  살아지는  처지라도   막바지 더위임을   어렴풋이 직감한다.  


언제부터  이곳에  큰  저수지가 있었는지는  모른다.  손바닥만 한 웅덩이 하나에도 이름을 지어주고  전설  갖다 붙이기를 좋아하면서  이렇게 큰 저수지가 이름이 없다.   옛날에 어떤 아무개가  저수지라  파라고 했을 테고  다른 아무개는   땅을 팠을 테고  또 다른  아무개는  땅 판  자리에서 나온 흙으로 둑을 쌓았을 텐데도.  한날한시에  아무개들이 다 사라져 버린 것도 아닐 텐데.  왜 이름 하나 남아있지 않은가.


 다들 그저 마지못해 '아. 그. 거시기. 연월리 저수지'라고  한다.   이곳 사람들에겐   거시기란.  '너도 알고 나도 아는디  굳이  히서 멋 헐 것이여.'라는  의미가  있는 듯 하다.  그리고   누가  그런 것을   알려고 할까.  사시사철  그냥  거기  있어왔고  앞으로도 사라질 리 없는 것들.  사라지기 전엔   존재조차 모르는 것에게.  


누군가  저수지에 대해 묻는다면.


"거시기하게(특별하게) 거시기하지 않아도 (이름을 지어 부르지 않아도)    그 뭐시냐 거시기(해월) 양반이 오셔서  아랫녁이  좀 거시기 헌 게( 가뭄에 물 대기가  어려우니) 다 같이 힘을 합쳐서  거시기(저수지)를  파라고  하신지  한 팔십 년 되았지. 아마. 글지.  이 근방 사람들은  다 아는 그런 고래적 이야기를...  무슨... 타관서 왔단가요?"


"그러니까 그 거시기가 뭐예요?"


"아! 참.  이렇게  젊은 양반이 거시기도 모르나벼. 참 거시기한 사람이여. 글씨."


이런 식이다.


여하

저수지  아래는   야트막한  평야다.   다닥다닥 기워붙인  논 밭 사이로  청라 같은  샛강이 흐르고   오손도손 모여 앉은   초가집들을  살피는  듯한   기와집   한 채가    의젓하게  서 있다.   들판엔 흩뿌려진   백미처럼   흰 옷을 입은 사내들이  나락꽃 사이의 피를 뽑고   머리에  흰 수건을  쓴  여인들은  미영해일    돛단배같이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하며 김을 멘다.  대대로 문전옥답이기도 하고 사시사철  방장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가둔  저수지 덕분에 연월리 아랫녘은  가뭄에도 농사를 망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윗녘에 자리 잡은 연월리는  푼수에 넘치도록  큰  저수지를  앞마당에  품었으나   그 물은 하나도 쓰지 않고   모두 아래로 흘려보낸다.  연월리 사람 중엔 저수지 아래 넓은  땅을 가진  이가  없거니와   산에서  내려오는  물만으로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살림의  규모가 작기  때문이다.  


아!  법으로 연월리의  지명은 해월이다.   반월, 신월,  월곡,  월송  그리고 해월,  이렇게 다섯 마을을 묶어 연월리라고 하나  이 고장  사람들을 응당  해월을 연월리라고 부른다.  해월.  이십여 가호 남짓한  방장산 왼쪽 자락에서 비켜난 숨은 촌락,  들보다  산이  가깝고  인구가 제일 적고  가장 가난한   곳을  다섯 마을의  대표 격으로 삼은 셈이다.    이는 은연중에  해월이 연월리의 원류라고  믿어서일 수도,   해월이라는 마을을 연월리라는 이름으로 덮어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일 수도 있겠다.


 이 고장 사람들은  은근히  연월리 사람들을  도외시한다.   가진 것이  없어 빼앗길 것 마저 없는 가련한 사람들의 동네라 그러는 것일까.  저수지 아래, 드넓은 평야에  태어나  골  빠지게 거둔  곡식들은 제 자식 입에 한 톨도 넣어주지 못하고  다  내주는 주제임에도  말이다.  아니  기름진 땅에 태어나  오히려  더 착취 당하고  굶주리면서도  연월리 사람들은 없수이 긴다.  아마도   빼앗긴 것은 쌀뿐만은 아닌 것 같다.


그러거나 말거나 연월리 사람들은 된서리를 맞고   땅에 떨어진  도토리처럼  춥고 어두운 날들을  죽은 듯 살아낸다.  작은  생명이  할 수 있는  최고의 투쟁은   목숨을 보존하는 것이라는 듯이  머리에 쓴 모자를   벗어버리고  다람쥐의 눈을 피해  검은 흙 속으로  깊이 파고든다.  



 

연월리  마을 입구  새암 옆,  처질 곳은 처지고 휠 곳은 휘며 적당하게   뻗은  아름드리 뽕나무 아래 그늘에 십여 명의  어른들과   참새 같은  아이들이  모여든다.   어린이들의  머리 위에 드리워진  뽕잎이  마침 불어온 실바람을 핑계로 자그마한 머리통을 살살 쓸어준다.   손등의 혈관처럼 불거진  그물맥을  가진 까슬까슬한  잎사귀가  칡뿌리 빠는  아이를  건드리자  대문짝  앞니를 활짝 내보이며  웃는다.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풀물 든 손톱,  마디가 곱은 채로 굳어버린  늙은 손가락의 거친  손이  만들어내는 손길은 간지럽고 부드러우니까.  외할머니처럼.   '보자 보자. 어디 보자.'  여덟자 주문을 외며  흐릿한 기억의 항아리 속을 더듬어 자식들의  자식들 이름들 중에  골라낸 하나가  틀리더라도 촉감으로 전해지는 애정은  기분을 좋게 하니까.



마을 이장 만일이  어제 소재지에서  오늘 정오에 라디오로  중요한 발표를 한다는 벽보를 보고 왔다며 동네에서   전파가  잡히는 새암으로  성일  집의   라디오와 발전기를 끌고 나왔다.  아들  물건이라면   광기에 가까운 집착을 보이는 노망 난 성일의 아버지를 어떻게 구슬려서 라디오를 끌고  나왔냐며 다들 혀를 내두른다.


"시상으나. 등천 반이 라디오를 내줍디여."


"아무리 산골에 살아도 상 돌아가는 것을 알아야지라.  아재가 연세를 잡솨서 왔다갔다 하시지만도   아들 소식이  얼매나 궁금허것소.  징용간지 년이 넘어가는디.   고 동네에  라디오가 있으면 내놓고 써먹어야지.  오래 묵혔다가   고아먹을 것도 아니고.  아이고. 어제께  면에서 벽보를 본 게 오늘  뭔  발표를 헌다고 라디오를 꼭 들으라고 힜는디. 뭔 발표를 헐랑가.  으미 .  더워라.  이 놈의 더위는 언제쯤 수그러질랑가."


"하여간. 젊은이가 수완 좋소."



만일이 발전기를  돌리자 라디오에서  폐병  앓는 늙은이가  마지막 유언을 하는 듯 가래 끓는 소리를 한다.   

쉴 새 없이 짹짹거리는 아이들, 구시렁대는 어른들, 귓구멍을 쑤시다가 헛기침을 하는 노인들이  일제히  소리를 멈춘다.


유심히 들어보니 책을 읽는 듯  일체 감정이 배제된 일왕 히로히토의 목소리다.


'크르르르흐 크르르르크........... ...........


세계 대세와 일본 제국이 처한 조건을 깊이 숙고하여..... 상황을 해결하기로 했다.......


짐은....선언 조항을 수락하기로 했다.....



짐은 일본의 자존과 동아시아의 안정을 확보하려는 진심 어린 바람에서.... 전쟁을 선포했을 뿐 다른 나라의 주권을 침해하거나 영토를 확장하려는 생각은 없었다.....'



"임병허네."


"쓰읍... 사설허지 말고 개소리 한번 들어봅시다."


.......


'전쟁은 근 4년을 끌어왔다 그동안 짐의 육군과 해군은 전쟁터에서 용맹하게 싸웠고, 국가의 종복은 근면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세계의 대세 또한 일본의 이익과 반대로 돌아가고 있다....



더욱이 적은 잔인하기 짝이 없는 폭탄을 새로이 사용해 무고한 생명을 무시로 빼앗기 시작했으니 그 피해가 실로 어디까지 갈지 헤아릴 수 없다....



 이 이상 교전을 계속한다면 일본 한 나라의 파괴와 소멸로만 끝나는 것아 아니라 인류 문명 전체의 멸절로 이어질 것이다.....



전쟁에서 다쳤거나 죽은 장교와 사병뿐만 아니라 그 유족을 생각하면 짐의 가슴은 밤이라 낮이나 고통을 가눌 길이 없다.....



짐이 가장 염려하는 바는 부상자와 전쟁 피해자, 집과 호구지책을 잃은 사람들의 후생복지다.....



금후 제국에 닥칠 고난과 시련은 분명히 녹록지 않을 것이다....



.......시운의 지시를 받아들여 어차피 불가피하다면 아무리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이라....



........형제끼리 의견이 달라 갑론을박하며 소요를 조성해 정도에서 벗어나 헤매다 끝내 세계의 신의를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유의하라.....



장래를 건설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라.....'



오래 식민 지배를  받으며 일본어에 능통한 이가 여럿 있었으나 다들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정용도 사람들 틈에서 팔짱을 낀 채  일왕의 말뜻을 생각하느라  늘 웃는 반달눈을 찌그러뜨리고  미간에  주름을 잡은 잡고   서 있다. 그때 정용의 곁에 다가온 단곡댁이  정용의  팔뚝을  쿡쿡 찌르며  묻는다.  



" 저그. 독바우 양반.  아따.  팔뚝이 바우같소잉.  히힝.  근디 저 의뭉스러운 놈들이  능구랭이 담 넘어 가득기 허는 소리가 뭔말이요?   읍내서 핵교까지  댕겼으면    알 거  아뇨?"



정용이  매우 난감한 표정으로 몸을  움츠리며   뭐라 대답을 하려 하자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정용에게 향한다.  정용은  딱붙은 마른 입술을  떼며   우믈쭈물한다.


"아... 그 거시기.... 그 일본이 전쟁을 그만 헌다는 말 같은디... 그것이..."



그러나 얼굴에 하얀 버짐핀 아이들은  단박에 해방임을 알아챈다. 언제나 아이들의 번개 같은 직관은 바위 같은 어른들의 생각을 초월하므로.



동네 아이, 몽이  춘향전의  어사출두  한 자락을  우렁차게  뽑아낸다


"아~암행어사 출또요. 출 또 요 오. 암행어사 출또 하옵신다.    우리 고을 큰일 났다. 하하하하.  우리나라  만세여. 우리나라 만세요. 만세여. 만세랑게."



그러자 몽의  소리에  신바람 난  아이들이   덩달아  만세를 외치며 뛰어다닌다.   어른들이 기겁을 하며 아이들을 뒤쫓아가 입을 틀어막아 보지만   달아오른 아이들은 어른들의 손을 뿌리치고  몽의 노래를 따라부른다.


"암행어사 출두요. 암행어사출두요.  우리 고을 큰일 났당게. 조선 독립 만세여. 만세요!  독립 만세란 게요!. 하하하하하  크크크흐흐"



제일 앞서 덩실덩실  춤까지 추면서 달리던 몽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개구리마냥  땅바닥에  달라붙는다. 그리고  몸을 부르르  떨며 한참 동안 일어나지 않는다.  놀란 어른들이   일으켜 주려  다가가보니 몽은  납작 엎드린  채로 온몸을 떨며 웃다가 울음이 터졌는지 흙바닥에 얼굴을 마구 비벼댄다.


동네 아낙과 입씨름을 하느라  아들이 넘어진 것을 뒤늦게 본  단곡댁이  몽에게 촐랑촐랑 뛰어가서  여기저기 살피더니 다친 곳이 없음을 확인하고  얼굴에 묻은  흙을 닦아주며 주절댄다.


"초랭이 방정이 같은 소자냥반.   뭐 헐라고 배 꺼지게  메뚜기 겉이 폴짝폴짝 널을 뛰믄서  영글도 않은 나락을  훑어 잡술라고 허시는가.  남아일언이 중천금이라 허는디 이렇게 입이  가벼워가꼬  어뜩헐라고 그러시는가. 허어어.   허긴 중천금이 있으면 한두 푼짜리도 있어야지.  히잇.  울지 말어. 울긴 왜 울어. 웃기만 허기에도 짧은 생이여."


"나  아.. 안 울었는디요. 눈물이 아...아닌디요. 눈...눈에  흙이  들어간 것인디. 어.. 어머니 봐 보 오라니까요. 봐 보란 게."



몽은  두 손으로 얼굴을 비비며  장난스럽게 변을  했지만   한쪽 얼굴이 풍  맞은 노인처럼  몹시 실룩거린다.  어쩌면  자신을 추기 위해 일부러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하고 싶은  말을 창으로 대신하는  아이.  오직 곡을 하기 태어난 사람처럼   오늘도 역시나  말은 더듬거린다.   


"어어어.. 어머니... 저는 개... 괘안찮당게요."


단곡댁 모자가   벌린 광대판의  바로 옆,  무리 중에 유난히  키 작은  사내아이 하나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소리 없이 눈물을 뚝뚝 떨군다.  라디오 주인  성일의 아들, 지만이다.   성일의 처인 동경댁이  말없이 지만를 일으켜 세우고  눈물을 닦아준다.  지만은 삼 년 전  징용에 끌려간 아버지 생각이 난 것이다.  


동경댁이  아들 지만을 다독이고 있는데  단곡댁이  그 사이에 쏙 끼여 들며  묻는다.


"동경댁, 이게 뭔 소리여?  일왕이 뭐라고 하는 것이여?"


"저도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으므니다. 자르  알아들을 수가 없으므니다."


"이잉.  일본 사람이  일본 말을 못알아들으면  어쩐당가.  허긴 일본 사람은  이리 빙빙 저리 빙빙 둘러서 이야기를 헌 게 둘리기가 십상이것지만. 히히힛."


"제 생각엔 큰일이 생긴 것 같스므니다. 제가 주재소에 가서 직접 물어보고 와야 되겠스므니다."


"그려. 얼릉 댕겨와."


동경댁이 주재소 가본다는데도 여전히  이 사람 저 사람을  붙잡고 열심히 문답을 하는  단곡댁에게 왕심댁이 부드럽게 타이른다.


"단곡댁, 수십 년을 기다렸는데 며칠을 더 못 기다리것는가?  아찔라고 그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동경댁은 지금 밖에 나가면 안 되는 것을 모르것는가. 어지러울 때일수록    서로의  마음을 붙잡고  다스려야지. 그리야  더 몽이도 점잖어지지 않것는가."


"암만요. 성님.  자슥이 미 탁어지 누굴 탁어것어요.  안다생이 자슥은 초랭이 방정이고  마음이 임금님처럼 넓은 왕심댁 성님 자손은  왕자지라.  히잉.   성님은 마음을 수련허고  우리네는 셋바닥을  수련허고.  따로따로 수련히도 만나는 곳은 한 자리가 어니것소이.  우리네  종자는  배고픈 것은 참아도 입 근지런 것은 못 참소.  시상 깝깝히서.   아.  소고깃국에 쌀밥  먹으러 가자. "


"예. 우우우우....우와! 맛있것다. 야. 나는 고오오....깃국에 사알....쌀밥 묵으러 간다잉.  야들아. 밥 먹고  낮잠  자아아아....자지말고  금방 보오오...오지."



오늘따라 더  말라비틀어져 보이는, 그야말로 가볍디 가벼운  단곡댁과 몽의 뒷모습이 보인다.  바늘 하나 꼽을 땅 없이   하루하루  품팔이로 살아가는 가난한 모자.  헤진   옷 섶 사이로 드러난  앙상한 발목과  마른  나뭇가지 같은 두 팔을 휘적휘적 저으며 제 집으로 돌아간다.  이빨 사이  고춧가루같이  어디든 끼어들어   불장난을 벌여야  속이 후련한  사당패.  단곡댁과  이  제 집으로 돌아가자  새암에 남겨진 사람들은 통통 튀다 일순간에 바람이  빠진 돼지오줌보처럼  피식 탄력을 잃고  하나 둘  흩어진다.


동경댁과 지만은 왕심댁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결국 주재소에 가기로 한다.  동경댁의 모국에서 일어난 일이기도 하고 징용 간 남편의 생사가 걸린 문제라  도저히 견딜 수가 없나 보다.



"제가 무스은 일인지 사알펴보고 오겠스므니다."


동경댁과 지만이  곧바로 주재소로 향한다.


그러나 그전에 이미  새암을 뜬 이가 있었다.  잠자는  라디오와 발전기를  새암에  끌고 나온 마을 이장  만일이다.   들뜬 아이들이  만세를 부르자 일순간  어수선해진 틈을 타서 자전거를 타고  면소재지로 간다.  그러나 열심히 자전거 페달을  밟아도 속도는 나지 않고  온 세계가   정지해 버린 듯이  눈으로 보이는 한 장면 한 장면이  활동사진처럼  머리에 각인된다.  멈춘 세상에서 저 혼자 달리는 것처럼  아무리 달려도 풍경은 변하지 않고 헛바퀴만 도는 것 같다.



'분명 큰일이 일어났다.'



너다섯시간 후에 주재소에 갔던  동격댁과 지만이   상기된 얼굴로  돌아왔으나 새암에는  두 사람만 남아 있다. 한 사람은  이제나 저제나  동경댁을 기다렸던 왕심댁이고 다른 한 사람은 애야다.  동경댁이   왕심댁에게 조심스럽게 말한다.


"성님, 주재소 문을 닫았스므니다. 그러나 문지기 말을 들으니 천황이  일본은 패망해서 전쟁이 끝났다고 발표했다고 해쓰므니다."


"잉?  뭐시라고?  주재소가 문을 닫어. 일본이 망해.  이게 뭔 조화인가 모르것네."


"저도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지만 일본이 물러날 것 같습니다.  주재소에 일본인이  한 명도 없으므니다."


"뭔 일인가 모르것네.  동경댁.  아직 뭔지 모른 게로    당분간 장사는 나가지 않는 게 어쩌것는가.  일단 우리 집 콩 밭이나 같이 메자고.   동경댁 말이 사실이믄  개벽이디.  조선 사람이믄  일본 사람 죽이자고 댐빌텐디  동경댁을  가만 두것는가.  동네 사람들이야 동경댁 사정을 안 게로  거시기 허것지만.  지만아.  니가 어머니를  잘 지켜라잉."



지만이 끄덕 고개를  숙이며  결연하게 짧은  대답을 한다.



"예."



두 여인은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주고받은 듯 은밀하게  주위를 둘러본다.  야가  물을 길어  물동이를 채우더니  꾸벅 인사를 하고  제 집으로 간다.  세상의 격변을 모르는 만삭의  귀머거리 새댁이다. 지금 당장 아기가 나올 것처럼 막 기우는 보름달 같은 배,  머리 위에서 찰랑대는 물동이,  그러고도 산나비처럼 작은 체구가 산들산들 가볍다.   해지럼 때가 되니 밭일을 마치고 이른 저녁을 지을 모양이다.  


사실 애야는 아침부터 엉치 뼈가 빠지는 듯하고 아랫배가 묵직하다.  곧 아기가 나올 것  같아  일을 일찍 끝내고 집에 돌아와   물을 길어 정지 한가운데 항아리와 큰 솥에 물을 가득 채운 뒤 작은 솥엔   미리 불려 놓은 보리쌀에  웃쌀까지 얹어  밥을 앉힌다.   잔솔잎으로 작은 솥에 밥을 하고 잔솔가지로는  큰 솥에 아기 받을  물을 끓인다.  밥이 끓어오르자 아궁이를 닫아 불을 줄이고  뒤란으로 가서 어제 길어온  미지근한 물로 몸을 씻는다.   


한바가지를  몸에 끼얹자  배꼽이 불거지도록  부푼 배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애야는 배를 쓰다듬으며 웃는다.  아기를 낳는 것은 무서우나  혈육이 주는 따뜻함이 어렴풋이 기억나  절로 미소가 나오는 것이다.  소변이  마려워 앵두나무 아래에 가서 오줌을 누려고 하니 다리 사이로 뜨끈하고 걸쭉한  양수가  흐른다.



옷을 갈아입고 바로 앞집 원천댁 집으로 간다. 원천댁은 저녁을 짓다가 애야를 보더니 불붙은 부시깽이를 들고 벌떡 일어난다.


"아가, 왜 그려. 배 아프냐?"


애야가 배를 만지며 고개를 끄덕이니 다급해진 원천댁은 큰딸 정애를 큰 소리로 부른다.


"정애야! 정애야!"


원천댁의 큰 딸이자  애야의  동무인  정애가 굴 속 같은 뒷방에서  부스스한 몰골로  튀어나온다.   눈을 크게 뜨고 양 볼에 손을 올려  얼귤을 가린 채로 두려운 듯 어머니를 바라본다. 원천댁 또한  큰 딸의 이름을  크게 부르는 것에 스스로 놀라  방금 전 뱉은 소리를  호호 불어 없애듯이 소곤소곤 속삭이며 자신과 큰딸을 단속한다.


"아가. 누가  불러도 절대 나오지 말어. 알쟈? 밥 다 됐응게 너 먼저 먹어. 엄마는 애야네 갈 것잉게.  애기가 나올랑가벼. 누가 오면  얼릉 숨어라잉."


원천댁은 불붙은 부시깽이를 정애에게  꼭 쥐어주고  애야를 따라나선다.

야의 집 부엌에 들어선 천댁은 애야가 벌써 큰 솥에 물을 끓여 좋은 것을 보고  기특한 듯이  젖은  귀밑머리를 쓸어준 후  귀화를 데리러 나가며 혼자 중얼거린다.


'괜찮여. 괜찮여. 귀는 안 들려도 저렇고 야무지고 건강헌게  애기도 잘 낳을 것이여.  애기를 귀로 낳가니. 뱃심으로 낳지. 아이고.    귀머거리도 저렇게 시집을 가서 애기를 낳고 사는디 우리 정애는  어짰으까. 불쌍한 거.  친구는  시집가서  식구 늘려가며 사는디 우리 딸래미는...  시상에나.  그 불쌍한 것을 어짰으까.'



딸 동무의  출산을  보는 원천댁은 저도 모르게  헛헛해지는  마음을 어쩌지 못한다.  불행의 새장에 갇혀 버린 새가   아무리 날갯짓도  해도 바람만   일으킬 뿐 날아 오르지  못하듯이.



그러나  금세  마음을 고쳐먹기로  한다.  정애를 구해준 이가 누구인가.  애야의  남편과  애야의 어머니,  귀화다.  그리고 애야는 얼마나 애를 썼는가.  삼 년도 넘게 고맙다는 말은커녕   아는 체 한번 안 하는  정애를 위해  먼 산길을 오가며  식량과 옷가지를  날라준 아이가 아닌가.



'괜찮혀.  괜찮여. 다 잘 될 것이여.'



입으로는 연신 괜찮다고  외면서도 두 다리는 파발마보다 빠르게 귀화의 집으로 달려가고 있다.   집에서 빠져나와  마을 입구 새암을 지나 언덕 위, 귀화의  신당으로  난 뱀 길을 올려다보니 멀리서 귀화가 보퉁이를 들고  내려고 있다.  귀화도  산 쪽으로 올라오는  원천댁을  벌써 보았는지  잰걸음이다.  원천댁을 만나자  귀화는 쌔근쌔근 숨을 몰아쉬며  긴장된 표정으로 묻는다.


"동상. 무슨 일이여.  애기 나온단가?"


"예. 성님.  곧 나오신답니다. 우리 성님 손지가요. 이럴 대 보믄  무당은 무당이여라."


"무당이라 알것는가. 자네 얼굴을 보믄  지나가던 삼척동자도 뭔 일인가 다 알 것이네."  


두 여인은  서로를 바라보고 애써 웃지만 몹시 떨고 있다.  여자가 아기를 품고 낳은 것,  때가 되면  당연한 일 같아도  막상 그 일에 관계된 사람들은  지축을 흔드는  섭리를 향한 경이감에  몸을 떤다.   알거나 모르거나 우리 모두는 그렇게  태어난다.



원천댁이 집을 나간 뒤에 애야는  미리 챙겨 둔 깨끗한 지푸라기를 바닥에 깔고 그 위에 홑겹 이불을  정성스럽게 피고 속속곳을 벗는 채 그 위에  눕는다.  진통이 오는지 허리를 깊이 숙였다가 한참만에 다시 핀다.  그러다  뭐가 생각난 듯  예사롭게 부엌에 가서 아직 닳지 않은  대나무 주걱을  깨끗한 물에  적셔  작은 솥의  밥을 정성스럽게 뒤집어 놓는다.  어릴 적에 들었던 누군가의 목소리가  다시   귓가에 맴돈다.



'아가. 물과 밥이 생명의 근원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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