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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령 Aug 04. 2024

1장   1945년 8월 15일



3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연월리 이장 만일은  라디오를 듣자마자  예삿일이 아님을  직감하고  도둑고양이처럼 사람들 틈을 몰래 빠져나와  면장을 만나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달린다.    더위에 지친 것인지 맥이 풀린 것인지 무거운 몸이  급한 마음을 따라가지 못한다.  허걱대며   면장실에 도착하니  면장 비서 김양은 보이지 않고 족제비 눈의 여자가 김양 자리에 앉아 있다.  만일은  낯선 여자에 대한 신상 파악은 제쳐두고  숨을   몰아 쉬며  급히 면장을 찾는다.  



"허억 허어억. 면장님 기십니까?"



"누구세요?"



"연월리 이장 장만일인데. 그러는 댁은 누구쇼?"   



"보시다시피. 음.."



"보시다시피? 일본 이름이요. 성명이 희한하오?"



"어휴. 촌사람들 진짜.  아니 면장실 앞에  있으면 누구겠어요. 면장님 비서죠."



"에? 김양은 어디 갔는가요?"



"몰라요.  와카라나이.  오나가나 김양 김양.  왜요?"



만일은 여자의 대답에   화가 났으나   금세  태도를 바꾸어  공손하게  묻는다.



"그러지 말고 알려주쇼이.  아주 중요한 일이란 게요.  면장님을 직접 뵙고 말씀드려야 허는디. 저는 연월리 이장 장만일입니다. 면장님  아들 친구기도 허고. "



"아드님? 누구요?"



"민수요."



"아하. 둘째 오빠?  연월리라고요?  거긴 사람이 몇이나  살죠?"



"한 사오십 명 됩니다."



"뭐요? 리 인구가 사오십 명이라고요.  장난해요?"



"아.  해월이요.  여기선 해월을 연월리라고 부른 게."




"아아. 해월?  호호.  그 방장산인가 방정산인가  밑에 코딱지만 한 동네?"



"예, 그렇소이."



"그럼 해월 이장이라고 해야지.  근데 왜요?



"......"



" 왜요?"



"아. 왜요는 일본 노래고. 아주 중요한 일인디   면장님께 보고 드려야 헐 것이 있어서 그러는디."



"으응. 환송식 가셨어요.  장면리에. 이번에  자원 입대한 청년이 열명이나 나왔잖아요.  마을 이름이 뭐였더라.  구면?  거기 가봐요."



"고맙소."


 

급하게 나가는 만수의 뒤통수에 대고  젊은 여자가  들으란 듯이 혼잣말을 한다.



"참나. 해월이면 해월 마을 이장이라고 해야지 왜 연월리 이장이라고 해?  쥐뿔도 없는 주제에...."



만수는  뒤돌아서   천연덕스럽게 대꾸한다.



"젊은 냥반!  다 들리오. 젊은 냥반은 쥐뿔 있소?  그거 있으면 어디에 쓰는 거요?  개뿔 필요도 없을 것 같은디."



'아.  그 년이로구나. 읍내서 온 면장 조카딸.  면장이 김양을  건드리서 면장 부인이 비서 자리에 조카딸을 앉힜다더니. 성질 한번 고약허네.  씨도 창시를 다 내놓고 사는디도 드럽게 아니꼽고마이.'



만일은  씩씩대며 자전거를  타고  구면으로 달려간다.  구면에 도착하니   마을도 더위를 먹은 듯 조용하다.   마침 지나가는 노인에게 묻는다.



"어르신. 안녕하십니까. 오늘 여기서  군인들 환송식이 있다고 들었는디  거기가 어딥니까?"



"군인들? 뭔 군인들?"



"오늘 일본 군대에  자원 입대하는 청년들이 있다는디.  환송식을 헌다고 들었는디요."



"환송식은. 얼어 죽을 환송식이여?  임병헐. 장례식이것지."



"어딘지 아십니까?"



"환송식은 몰라도  조손 청년 초상집은  어딘지 알지."



"어딘디요?"



"구면은 아니고... 신면에서 헌다고 듣긴 들었어."



"신면이오?  신면은 어디에 있는디요?



"신면이  신면에 있것지."



"어르신 그러지 말고 싸게  알려주시란 게요. 혹시 압니까. 빨리 가믄 청년들 안 보낼 수도 있을란가도 몰르지요."



"참나. 젊은 사람이 성질도 급어지.  저그 동네 입구서 읍내 쪽으로 가믄 신면이여. 한참 가야혀.   옛날에는  거기까지 다 온면이었는디. 일본 놈들이 신면 구면 나눠 놓고......"



"고맙습니다."



노인의 말허리를  자르고 만일은 서둘러 자전거에 타고 신면으로 향한다.  노인은 만일에게 말을 비튼 것이 미안했는지  등 뒤에서 소리친다.



"천천히 가드라고. 그러다 자네 초상 치르것네."



"임병. 시상 변한지도 모르고  하나같이  하세월이여.  일왕이 전쟁을 안 허것다고 선포를 힜는디도  군인들  환송식을 헌다고. 어디서 싸울라고  그러는가. 진즉에 간 사람도 여태  안오는디.  아이고 더워 죽것네."



만일은 노인이 알려준 대로 신면으로 달려간다.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턱 밑까지 숨이 차오른다.  신면에 도착하니  일본 군인 제복을 입은 청년들이  일렬로  도열한 채 읍내 쪽으로  향한 고개를  넘어가고 있는  모습이 멀리 보인다.  환송식은  끝이 난 모양이다.  


마을 입구 정자나무 그늘 아래에   술에 취한  뚱뚱한 면장이  잔칫상에 코를 박다시피 하고  기울어져 앉아 있다.   군인  환송식에  기생을  불렀는지 면장   옆엔  기모노를 입고 가부끼 화장을 한  기생도 앉아있다.  면장은  같은 상에 앉은 동네 유지들의  말을  듣는 것 같았으나  잔칫상 밑의  왼손은 기모노 자락을 헤치고 기생의 멘살을 주물럭거린다. 그러다 이내 지루한지 기생의 얼굴을  바라보고  노래 한 자락을  불러보라고 한다.



기생은 취하도록  자신의 음부만 탐하다가 이제야  처음으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말을 걸어오는 면장의 면상을   바라본다.  육십에 가까운  면장의 얼굴은 소름이 끼치도록 선량하고 자비로워 보인다.


'저런 얼굴로  젊은이들을 사지로 내몰고   사람들 앞에서    가랭이를  주물럭거린다니. 참으로 역겹다.'   


기생이란  본디  술자리에서   별 짓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런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백주 대낮에  평범한 마을 사람들이  다 모인 동네잔치라면 다르다.  수치심의 한도를 넘어  시꺼먼 바다에  던져질 제물로 선 것 같아 서글프고 처량하다.  기생은 그런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구슬픈 목소리로  마음이 가는 조선 노래를 부른다.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 되면 못가아리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 되면 못가아리



녹두꽃 만발한  얼룩진 붉은 땅


양친 봉분 없이  묻혀도



우리네  가슴엔  이렇게  남았네


앉으면 죽산 인나면 백산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 되면 못 가리.'



첫 소절이 시작되자마자 술에 취하지 않은 면서기의 얼굴이   붉어지다가 노래가 끝날 때쯤엔 거의 잿빛이 되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노래를  중단시키고 기생을  흙바닥에서  팽개친 다음 두들겨 패고 싶겠지만  상관인 면장이  가만히 있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다. 면장은  다시 머리를 푹 숙였다가  노래가 끝나자  고개를 들더니 아주 나직한 목소리로 짐짓  슬픈 듯  말한다.



"좋았지.  기미년이었던가.  죽은 줄 알았던 동학 불씨가   살아나서  들불처럼 번졌단다.  다 같이   맨몸으로  총칼에 맞서  만세를 불렀지.   학생, 농민,  백정, 너 같은 기생들까지. 옛날 일이다.  숨  끊어지기  전의 조선이었지.  흐흐.  수십 년 전이지.  그때 태어난 아이는  벌써 애  아범이 되었겠지. 난 조선이 죽고 나서 태어난 사람이 부러워.  아무 기억도 없을 거 아니냐. 그때가 어땠는지.  애초에  황국 시민으로 태어났으니 말이야.  이등 국민이지만.  얘야. 조선은 잊어라.  이미 오동나무 관에 들어가 썩었어.   우리 조국은 일본이야.  의심의 여지가 없어.  세계를 주름잡는 강대국 일본을 따라야 해. 너는  폭탄 두어 방에  일본이 무너질 것 같으냐.  겨우? 잠시 주춤했다가  한 여름 오동나무처럼 다시  쑥쑥  자라날 거다.  한양에 가보거라. 이런 촌구석에만  있으니 정세를 모르는 것이지.  거진  다 일본이야.  살려면  시대의 흐름을 따라야지. 응? "


면장은 안경을 벗고 선수건으로 이마와 눈물을 닦는다.


"그래.   이름이  무엇이냐?"


"꽃님입니다."


"꽃님이. 그래. 얼굴만큼이나  예쁜 이름이구나. 이제 너의 이름은  이제 はな 다. 게이샤 하나.  얘야. 이런 촌구석까지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힘들게 살지 말고  부잣집  소실로 들어갈 궁리라도 하거라.  한 살이라도 젊고 예쁠 때 좋은 값에  팔아야지.  내가 소개를  시켜줘야겠구나.   아예 이 길로 나갈 거면  일본 군대에 딸린 술집에  일자리 하나 알아봐 주랴.   좋은 일자리는 얼마든지  소개해 줄 수 있어.  이 일이 싫으면  내일 당장 만주에 보내줄 수 있어.  만주 군수 공장에 처녀들을 많이 필요하거든.  내가  많이 보냈지.  아마 지금 쯤엔  돈 푼 꽤나  벌었을 게다.   거기 가면 돈 많은 일본 사내를 만나 시집도 갈 수 있을지 모르지.  일본 사내는 조선 사내와 달라. 진짜 남자라고.  아내가 혼인 전에 무슨 일을 했는지 개의치  않아.   대범해. 하지만 결혼 후엔   완전히 아내를 정복하지.  조선 남자처럼 빌빌대지 않아.    흠흠.  하나야. 기미가요를  불러라.  그깟 철 지난  조선 타령 따윈  잊어버려.   고운 얼굴에 어울리는 노래를 불러.  너무 고와서 눈이 시리다.  니 앞 일은 걱정 말거라. 내가 사람들 앞에서 약속하마."



 하나는 혼란스러워서 현기증이 난다.  크게 혼이 날 줄로 예상했는데  부드럽게 타이르는 권력자의 말을 듣고 나니   체념이 되며 평안함이 밀려온다.  그리고  이토록  현명한 이에게 복종하면 자기 앞에 놓은 망망대해가  갈라지며  갯길이 훤히  드러날 것 같다.  그리고 그 길엔 값비싼 진주를 품은 조개가 무시로 널려있을 것 같은 확신이 든다.   슬프고 처량한 마음이 온데간데 사라지고   구름바다 같은 희망에 몸을 싣고 싶어 진다. 하나가 기미가요를  간드러지게 부르자   험악한 잔치 분위기는 금세  좋아진다.   다 같이   군가를 합창하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날 때부터 일본인이었듯    충성 맹세를 한다. 면장은 한 모금의 술도  더 먹지 않았고   물론 하나의 가랑이를 탐하는 짓도  하지 않는다.  젊은이들은  앞다투어 면장의 인품과 처세를 칭송하고 노인들은  면장으로만  계시기엔  품이 크신 훌륭하신 분이라며  찬양한다.



멀찌기서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만일은 오염된 해변을  부유하는 더러운 물거품을 보는 듯  눈살을 찌푸린다.  그러나 추접스러운 것에  익숙한 만일은  금세  따분한지 연신 하품을 하며    라디오에서 들은 일왕의 발표를  보고  기회를 살핀다.  날이 저물 때까지 그럴 겨를이 없자  내일 이야기를 할까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으나 족제비 눈이  떠올라 기다리기로 한다.  마냥 기다리는 만일을  위해  마을  노인이  빈방을 하나 내준다. 방에 들어앉은 만일은   어느새 깊은 잠이 든다.



날이 어두워지자  면장이 면서기에게  오늘은  집에 가지 않고  관사에 잘 것이니  하나를  불러들이라고  지시한다.  면서기의 말을 전해 들은 게이샤 하나는 정말 그럴 줄 몰랐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놀란 듯   두 손으로   가린다.  이를 본 면서기는 매우 비위가 상한 듯  우웩 침을 모아  흙바닥에  뱉는다. 면장이 동네 사람들과 면면히  악수를 하고  관사로 떠나자 면서기가 남아  잔치 마무리를 한다.


 


잠이 들었던  만일이  조용해진 분위기를 감지하고  번뜩 눈을 뜨고 밖으로 나온다.  날은 이미 한참 어둡고 면장이 보이지 않는다. 면서기에게 면장의 행방을 물으니  관사에서 주무실 것이라  대답하여 만일은  또 자전거를 타고 관사로 향한다. 해가 진 후라 더위는 조금 사그라들었지만   이젠  허벅지가 터질 것 같다.



만일이  면사무소 뒤  관사에 도착하여  절뚝거리며 관사문을 두드리자  방금 목욕을 하고 나온 면장이 유카타를 입고  환하게 웃으며 직접 문을 열어준다.  면장은 만일을  보고 좀 당황을 한 기색이다. 하지만 만일은  겨우 찾아온 기회에 대한 반가움 때문에 면장의 얼굴을 보자마자  천황 발표에 대한 내용을 자세하게 늘어놓는다. 만일의 보고를 받는 면장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진다.  심각하게 이야기를 들어주는  면장의 반응에   신이 난 만일은 자신의 소견까지 곁들인다. 


그러나 면장의 표정이 어두워진 것은 천황의 발표 내용이 중해서도 미래가 걱정스러워서도 아니다.   만일의  이야기가 두서없이 지루했고  관사에 기생을 부른 것을 만일에게 들킬까 봐  겁이 났던 것이다.  만일이 알면  아들에게 전해질 것이고  그러면 언젠가는  성질 사나운 부인의 귀에 들어가는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알겠네. 그만 돌아가게. 일본이 물러간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알겠으니 가보게."



만일은 침통한 표정을 지은 면장에게   숙제 공책을 넘겨준  아이처럼   달빛을 받으며  자전거를  끌고  연월리 집에 돌아간다.   그러나  임무를 완수했다는 홀가분함과  뿌듯함도 잠시,   피로와  식민지 백성의  서러움에   젖어들며  몸과 마음이 무겁게  진다.



만일이  돌아간 직후,  게이샤 하나가 관사에 도착해 문을 두드린다.  면장이 짜증스러운 얼굴로  관사문을 확 열었다가 금세 환하게  웃는다.  하나는 그새  어디서 목욕을 하고 분까지  새로 발랐는지 온몸에서  꽃 냄새가 진동한다.


면장은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 하나를 방으로 들여  새색시 다루듯  이부자리 위에 앉힌다.  하나 또한 면장이 하자는 대로 고분고분하다. 면장이 하나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다가  양볼을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잡아 하나의 입을 벌리더니 잽싸게  다른 한 손으로  유카타를 여민 허리띠를 푼다.  앞섬이 풀어지고 훈도시를 찬 면장의 알몸이  드러나자  하나가 자연스럽게  면장 사타구니 쪽으로 벌린  입을 가져간다. 그때   면장이  하나의 입에 허리띠를  잽싸게 쑤셔 넣는다. 하나는 숨이 조금씩 막혀오지만  변태적인 놀이를 하자는 줄로 알고 일체 저항을 하지 않는다. 허리띠가 목구멍까지 들어가 하나가 아무 소리도 못하게 되었을 때 면장이  하나 위에 올라타 하나의 얼굴을 주먹으로 치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한다.



"꽃님아.   그나마 봐줄 만한  낯바닥도  이제 완전히 끝났어. 갈보년이 감히 나를 욕보여. 그것도 영광스러운 장행회에서.  미련한 년.  눈치가 있어야  몸도 파는 거야. 어디   팔아먹는 건 뭐 쉬운 일인 줄 알아.  그 따위  동학패 노래를 내 앞에서 해.  내가 너를 가만둘 줄 알았냐.  내가 망친 조선년이 수백 명은 될 거다.  얼굴도 다 기억나.  점순이, 점례, 미자, 영순이, 미향이. 갑순이, 영자,  순자, 을례...... 그리고 너, 꽃님이.  히히. 어떻게 망쳤는지 알려줄까.  힛힛잇.  너 같은 년이 제일 망치기 쉬어. 헤프고 어리석은 년.  이젠 이 짓마 저도 못하게 해 줄 테다.  팔다리를 자르고 눈깔을 뺀 다음에  돼지우리에 던쟈 버릴까.  재미겠다.   너 같은 년 하나 없어진다고  누가 너를 찾을 줄 아느냐.  뜨내기 놈팽이랑 눈이 맞아 도망간 줄로  알겠지. 겁도 없이 여길 오다니.  뭘 얻어먹겠다고. 내 주먹맛을 보고 싶어 온 거지."



'퍽퍽.'



하나는  저항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정신을 잃는다.


한밤 중에  하나가 눈을 떴을 땐  입을 막았던   허리띠로 자신의 손발에 묶여 있고  온몸이 조각조각으로 부서진 듯 아프다. 팔다리를  자르고 눈깔을 뽑겠다는  한 면장의 말이 떠올라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이니  예상외로 허술하게  묶여 있던   손발이  풀린다. 그리고 방 윗목에   알몸으로 드러낸  면장이 대자로 뻗어서 자고 있다.    면장을 두고  몰래  나가려다  다시 울컥  저 짐승을 지금 죽이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팔다리가 잘릴 것 같은  두려움과  당한 일에 대한 복수심이 일어난다.



한편 면장은 하나를 실컷 두들겨  패고  욕구를 채운 뒤에  잠에 빠져 극락 같은 꿈을 꾸고 있다.


검은 옷을 입은 면장이  아주 크고 화려한  문 앞에 서 있다.   겁이 나서  문을 열고 들어갈까 말까 고민을 한다.  왠지 불길하다.  돌아서 가려다  문틈새로  안을 들여다보니  수평선 멀리   붉은 태양이 떠오르는 것이 보인다.   그것은  아침마다 충성을 맹세하는  욱일기다.   태양이 떠오르자  뿌연  해무 같은 불길함이  걷히고 작은  희망이  윤슬처럼 반짝인다.  대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간다.   모두 황금빛이다.  


"역시 오길 잘했다. 안 왔으면  큰 손해를 볼 뻔했다."


떠오르는 태양 앞에 고귀한 신분으로 보이는 이가 황금 의자에 앉아있다. 빛이 너무나 밝아 얼굴조차 보이지 않으나 분명 일본 천황으로 짐작된다.  면장이  그  앞 납작 엎드리자  아름다운 사쿠라 꽃잎이  사방에  흩날린다.


천황이  의자에서 일어나 면장에게 걸어온다.  면장이 고개를 살짝 들어  천황을 알현한다.  손가락이 긴 천황의   두 손엔  오동나무 잎이 그려진 아름다운 황금 허리띠가 들려있다


'앗. 저것은 귀족에게만  하사한다는 황금 띠다.'



천황이 다가와 면장 앞에 멈추다.  면장은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일어나자 천황이 몸소 면장의 허리에  황금 허리띠를 채워주려고 하는데  면장의 허리가 너무 두꺼워서 허리띠가   채워지지 않는다.  면장이  아무리 배를  홀쭉하게 줄여봐도 안된다.  이에 천황도 허리엔  안될 것 같은지 면장의 목에  황금 띠를 걸어주고 찰칵 잠근다. 면장은 황금 허리띠를 목에 차고 자랑스럽게 사방을 둘러본다.



'허리가 아니면 어쩌랴. 목에라도 걸면 다 내 것이지. 일본 귀족만 된다면야 아무 상관없다.'



아름다운 게이샤들과 용맹한 사무라이들이 줄지어 서서   존경과 부러움이 가득한 눈으로 박수를 친다.   천황이 눈짓을 하자 시종 둘이  아주 크고 무거워 보이는 궤짝을 들고 와 면장 앞에 놓더니  뚜껑을 연다. 궤짝 안는 영롱하게 반짝이는 우윳빛 진주가 가득하다. 상금이다.


그것들을 보자 면장은 미치도록 그 안에 들어가고 싶다. 황금 띠를 목에 두른 채  진주로 가득한 궤짝에 몸을 담그고 싶다.


면장은 홀린 듯 그 안으로 들어간다.  너무나도 황홀하여 괄약근이 스르르  풀리며 똥오줌이 흘러나온다. 그리고  끝도 없이 궤짝 안으로 몸이 빨려 들어간다.  그러다 점점 목에 찬 허리띠가 숨통을 죄어오고 진주가 턱 아래까지 차오른다.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들린다. 진주 한 알 한 알이  가슴을 치며 원한에 찬 듯 운다.  언젠가  들었던 목소리들. 점례, 영순이, 영자, 미자, 선이,  순자, 갑순이, 순례, 을례, 갑례, 을순이, 판돌이,  선태, 갑돌이, 을수, 병수, 정팔이, 순돌이, 병태, 만복이...............  자신이  전쟁터로 보낸 처녀들과 총각들이 진주에 갇혀  울부짖고 있다.  허우적거리며  벗어나려 해 보지만  그럴수록 더 안으로 빨려 들어가  결국 콧구멍 한쪽으로 쉭쉭  숨을 몰아 쉰다.  그때 사쿠라 꽃잎 하나가  날아와  면장의  콧구멍을 사뿐하게 막는다.


하나가 면장 뒤에 앉아  허리띠로 면장의 목을 조르고 있다.  덩치만 큰  면장의  무른 은 하나에게 치명상을 입히지도 못했고  하나의 손발을 단단히 묶지도 못했다.  하나는 면장의 몸이  처지자  알몸으로 방 밖으로 뛰쳐나온다.  그때  대문 밖에서 어떤 여자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야. 이 새끼야.  문 열어. 할아범한테  다 듣고 왔어. 관사로 기생을 불러. 네가 감히 나를 또 배신해.  쪽발이 시다바리 새끼야.   이 죽일 놈의 새끼. 기생년이랑 너를 홀딱 벗겨서 자근자근 씹어 줄테다.  너희들은  오늘  내 손에 죽었어.  우리 아버지가  니 새끼 관상이 아주 배신상이라고 한 거 알지. 그 노인네가  사람 하나는 아주 기가 막히게 본다니까.  일본 놈들 밑에서 게다짝 끌고  다니는 것은 봐줘도 기집질하는 건 더 이상 못 봐줘. 더러운 새끼."



하나는  면장 부인으로 짐작되는  여자의 우렁찬 목소리를 듣고 어찌할 바를 몰라 급히  숨을 곳을 찾는다.  하필  눈에 보이는 것이 대문 옆 변소다.  하나는 변소 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잠시 후 도끼로 문을 찍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담을 넘어와 대문을 연다. 하나는  똥이 가득 찬 변소통 안으로 들어가  가슴까지  몸을 담그고   기다린다.  금세 구더기들이 하나의 몸에 기어오른다.


집 안에서  짧은  여자  비명소리가 들린다.  면장을  발견한 면장의 부인과  젊은 남자가     면장을 살리기 위해 가슴을 압박하다가 이내  멈춘다. 그리고  면장 부인에게 말한다.


" 돌아가신 것 같습니다."


" 뭐라고?"


"돌아가신 것 같습니다."


"안돼."


"냉정하게 생각하세요. 어머니.  해방입니다. 일본이 물러난다고요."

 

"그래서?"


"모르시겠습니까.  아버지는  자살하신 걸로 해야 합니다."  


"뭐라고? 어떻게 그런 말을... 그래도 니 아버지야. 얼른 의사를 불러. 아직 몸이 따뜻해. "


"어머니, 정신 차리세요. 아버지가 살아계시면 우리 식구  다 죽어요."

 

"어떻게 그런 말을..."


"아버지는 친일한 것을  반성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신 겁니다."


면장 부인이  힘없이  방에서 걸어 나와 마루에 털썩 주저앉는다.  


똥물에  들어간 하나는  변소 문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똥통에서  기어 나온다. 그런데  옆구리가 몹시 쓰리고 아파 옆구리에 손을 가져가 대보니  못에 찢긴 배에서  창자가  빠져나오고  있다.  하나는 튀어나온 긴 창자가 손에 잡히자  소리를 지른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하나 목소리를 듣은 면장 부인이 아들을 부른다.


"민수야.  변소 간에 누가 있어."


민수가  변소 문을 열어보니 온몸에 똥을 뒤집어쓰고 자기 창자를 손에  쥔  여자가  똥물에서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사태를  파악한  민수가 변소 간 옆, 똥지게를 받쳐둔 작대기로  하나의 머리를 여러 차례 내리 친다.


정신을 잃은 하나가  깊은  통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내  똥물의 너울  정수리를  쓸고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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