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암에서 라디오 방송을 들은 후, 단곡댁과 몽이 무너져가는 싸리 울타리가 양팔로 끌어안은 작은 오두막으로 들어간다. 소고기 국에 쌀밥을 먹을 거라 허풍선을 떨었지만 모자의 점심 상에 오를 것라곤 푸르스름한 찐 감자 대여섯 알 뿐이다. 단곡댁이 이 빠진 소반에 식은 감자를 내오자 몽이 얼른 일어나 그것을 받아 들며 말한다.
"어....어머니. 무... 무엇을 이렇게 많이 차리셨단가요. 사...앙 다리 부러지것네요."
"우리 아드님이 이 더운 날에 고생이 많으신디 이걸로 될랑가 모르것네요."
"허... 추.. 추웅분 허지요. 어....어머니가 주시는 거믄 뭐시라도."
"누굴 탁이서 이렇게 말도 이쁘게 헐까."
"어.....어머니 탁했것지요."
단곡댁이 가장 큰 감자를 집어 아들의 손에 쥐어주자 몽이 받은 감자를 쪼개 어머니 입에 넣어준다. 아들은 어머니가 감자를 받아먹는 보고 나서야 한입 베어 물며 웅얼거린다.
"어.....어머니. 고오오기가 좀 질기고만요. 잘 씹어 드셔요."
"그러냐. 미안허다이. 다음엔 더 푹 삶아야것다."
꼽추처럼 기울어져가는 오두막 덧마루에 앉은 모자는 서로에게 감자를 더 먹이기 위해 홀쭉한 배를 한껏 부풀려 보이며 과장스럽게 웃는다.
"어어.... 어머니, 이.... 번에 아아아 아아아.... 버지 오시믄요. 저도 따라갈라고요. 허락해주시믄 아아아아.....버지 따라 댕김서 창도 배우고 춤사위도 배우고 싶은디. 유우....유명한 명창이 돼 가꼬 어어........머니 비단옷도 지어드리고 거....문고를... 꼭 사드리고 싶구만요.
그러자 단곡댁이 벌써 비단옷을 입고 거문고를 타는 듯 흉내를 내며 어깨춤을 춘다.
"어어매 좋은 거. 손가락이 뒹뜅띵딩 춤을 춘 게 거문고가 저절로 노래를 허네. 뜅뜅띵. 띵띠 띵딩어딩어. 티이티이이딩 팅어팅어이디. 널 받아준 할마씨가 갓난이 목청이 이리 좋은 게 필시 소리 명창이 될 것이라 했느니라. 아무렴. 아버지 오시면 타읍히 봐야지. 언제 오실랑가. 여름이 다 가믄 오시것지. 지금은 어디서 뭘 허고 계실까. 일본이 망한 것 같은디 이 소식을 알고는 계시것지."
단곡댁과 몽은 한 사람을 기다린다. 연월리 저수지에 빠진 달이 기러기 자취를 그리워하듯 한결같이 한 남자를 보고 싶어 한다. 일찍 철든 어린 남자와 철들기엔 너무 나이 먹은 여자는 가난과 소망 사이에서 세월을 먹으며 가난의 구차함과 희망의 천진함이 이어지는 갈림목에서 가락과 춤을 지으며 살아간다. 언젠가는 세 사람이 손을 잡고 넓은 세상에 나아고자. 세상이 무대이고 삶이 극이나 아무도 봐주지 않는 독주를 펼치는 외로운 광대처럼.
아들과 감자를 먹은 단곡댁은 자리에서 일어나 왕심댁 집으로 간다. 떨어져 가는 양식을 구할 궁리를 하다 보니 번뜩 왕심댁 집 콩밭을 멜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직 품팔이로 살아가는 단곡댁의 머릿속엔 동네 아낙들의 농사와 대소사 일정표가 거의 다 들어있다. 아들에게 나가서 놀라고 하고 단곡댁은 왕심댁 집으로 간다.
단곡댁이 살살 웃으며 우물에서 풋성귀를 다듬는 왕심댁 옆에 앉는다.
"성님. 이 동상이 뭐 도와드릴 것 없어라우? 성님네 콩밭을 멜 때 안되었는가 히서요. 혼자 다 허시기엔 많은 것인디. 글고 우리 집 양식도 거진 떨어져서 가고요. 히잇. 너무 더와서 일거리가 없응게. 나는 괜찮은디 우리 몽이 굶길깜시 걱정이 되어 가꼬요."
왕심댁은 아까 새암에서 단곡댁이 한 말 때문에 다소 유감이 있는 듯하다. '왕자지라.' 본디 유아적이고 철없는 단곡의 성품을 알고 있지만 또 심기가 불편하다. 열여섯에 시집와 시동생과 시누이, 제자식까지 포함하여 아홉 번의 혼례, 시부모 친정부모 네 번의 장례, 봄에 두 번, 여름에 두 번, 가을에 네 번 도합 여덟 번의 제례, 그리고 한식과 추석, 설까지 치러내는 왕심댁에게 단곡댁의 살림은 코흘리개 소꿉질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그걸 어쩌지 못해 힘겹게 살림을 꾸려가는 단곡댁을 보면 은근히 부아가 치민다.
"이보게. 단곡댁. 내 본디 자네가 타고난 예인인 것은 아네만도...... 이런 말이 무슨 소용이것는가. 대우탄금이지. 미안허지만 이번에 콩밭은 동경댁이 멜 것이여. 동경댁 사정이 아주 딱 허지. 노망 난 시아버지에 허리병 있는 시어머니까지. 지만이는 또 어떻고. 자네는 딸린 식구가 적응게."
"거문고요? 나도 그것만 그냥 있었으믄 좋았을 것인디. 에엣, 하필 그것을 팔아먹어 가꼬. 허긴 그땐 그것밖에 팔 것이 없었응게. 그것만 있었으믄 잔치에 가서 연회도 허고 창도 허고 그랬으믄 우리 몽이 굶길 걱정은 안헐텐디. 우리 몽이는 시방도 감자 몇 개 먹고 또 창 연습하러 폭포로 가는 것 같은디. 가르쳐주는 스승도 없이 저렇게 수련을 헌 게. 얼매나 힘이 들것이여. 참말로 안쓰러라. 내 새끼. 몽이 아버지 오시믄 인자는 딸려 보내야지. 쟈가 없으면 나는 뭔 재미로 살 꺼나. 쯧. 그것은 그때 걱정 허고. 저렇게 아버지를 따라가고 싶어서 애닳아 허는디 안 보낼 수도 없고. 몽이 아버지가 나도 데리고 가셨으믄 좋것지만..."
"또 남의 남은 듣지도 않고 자기 헐 말만 허지. 예끼. 이 사람아. 만일이한테 이야기 좀 히줄까. 만일이야 이 동네 저 동네 다 다닌 게 손 모지란 곳을 알지 알것는가."
"만일이요? 됐어라우. 나는 그런 사람이랑은 말허기 싫어라우. 미련한 척 허믄서 결국 자기 잇속 챙기느라 눈깔이 삘기 가꼬 맨날 허걱허걱 이 동네 저 동네 자전거 끌고 댕김서. 똥 마려운 개 같어라. 지금도 그러고 있것지요. 이장 자리 하나 허기를 재상 자리 허는 것 같이 허고. 천치같이. 됐어라우."
"자네는 만일이가 참 고까은가벼."
"사람이 하도 등신 같은 게요."
" 어휴. 만일이가 등신이면 시상에 온전한 사람이 몇이나 될랑가 모르것네. 쯧쯧. 방금 모시 개떡 쪘응게. 몽이 갖다 줘."
단곡댁은 만일이 이야기가 나오자 발끈하여 평소 하지 않던 험담을 늘어놓다가 금세 잊어버린듯이 뜨거운 모시개떡 세장을 품새 없이 손가락으로 들고 덜렁덜렁 제 집으로 간다. 이번에도 만일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마을 밖에서 품을 파는 것은 안될 것이다. 그러나 도움을 받으면 받을수록 만일에 대한 감사함보다 반발심이 먼저 고개를 쳐든다.
십여 년 전, 만삭의 몸으로 떠돌아다녔던 단곡댁을 연월리에 데리고 와 터를 잡고 살게 해 준 사람이 만일이다.
단곡댁은 만삭의 몸으로 요릿집과 기생집을 전전하며 거문고 연주를 하였지만 말을 가리지 못해 욕을 먹고 쫓겨나기 일쑤였다. 그날도 단곡 마을의 환갑 잔칫집에서 연주를 하는 도중에 만삭의 연주자를 희롱하는 동네 청년들과 싸움이 나서 매를 맞았다. 음식과 돈은커녕 두들겨 맞은 단곡댁은 가야금을 메고 단곡 마을 입구에 쓰러졌다. 길가에 쓰러진 단곡댁을 발견한 만일이 집에 데려왔다. 만삭의 몸으로 거문고를 멘 여자를 본 만일의 어머니, 독바우댁은 아들이 기생과 사고를 친 줄로 알고 여러 날 가슴앓이를 했다.
단곡댁이 며칠 만에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자 만일은 오래 목수 일을 나가 비어있는 새막산 큰 집 형의 집이 있으니 갈 곳이 없으면 거기서 지내라고 하였다. 단곡댁은 그날로 빈집에 들어가 반나절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거문고를 탄 후 방 밖으로 나오니 마당에 만일이 서있었다.
"여긴 또 왜 오셨소?"
"어머니가 밥을 갖다 주라고 히서 왔다가. 들을라고 들은 것은 아닌디. 악기 소릴 들으니 발바닥이 땅에 붙어가꼬 옴싹달싹을 못허고 있었는디. 어디서 그런 재주가... 곡 명이 뭐요? 바람? 막 휘몰아치다가 머물 자리를 찾은 바람같소. 맞소?"
"밥은 거기 두고 가시오. 나는 볼 일이 있어서."
단곡댁은 거문고을 등에 메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그 길로 읍내 기생집들을 하루 종일 돌고 돌아 악기를 팔아 미역과 보리쌀을 사서 저녁에 연월리로 돌아오는 길에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었다. 그런데 우는 여자를 앞질러 갈 수 없었던 만일이 뒤따라 오며 우연히 그 모습을 다 지켜본 것이다. 만일은 안타까운 마음에 보따리라도 들어주려고 싶어 단곡댁을 불렀다.
" 저그요."
그러자 단곡댁은 아주 무서운 눈으로 만일을 째려보며 소리를 질렀다.
"또. 그쪽이요. 나를 그냥 죽게 내버려 두지. 왜 날 살렸소. 아버지 없는 자식을 혼자 어떻게 키우것소? 나는 내 연장 하나도 못 지키는 사람이요. 분명 내 손으로 아이도 팔아먹을 거요. 나를 왜 살렸소."
"참나. 살려달라고 하지 않았소? 간곡하게 매달리는데 내가 어쩌것소. 나도 그쪽을 데리고 오느라 죽는 줄 알았소. 악착같이 등짐을 지고 배는 만삭에. 어디서 맞았는지 얼굴은 피범벅이고. 비쩍 말라서 곧 죽게 생긴 사람을 어떻게 모른 체하것소? 살려달라고 히서 살려줬더니 이제와 왜 살렸냐고 원망하는 거요?"
"내가 살려달라고 했단 말이오. 말도 안 되는 소리 허지 마시오. 그럴 리가 없소. 거짓말하지 마시오."
"내가 왜 거짓말을 헌단 말이오? 내 아버지 함자 장동수를 걸 수도 있소."
"......"
" 등엔 멘 것은 뭐였소? 그리고 이름이 뭐시요?"
"거문고, 내 이름은... 내 이름은... 내 이름은..."
"이름이 거문고요? 이름 하나 알려주는 것이 그렇게 어렵소. 어디서 뭘 하다 왔길래. 그러믄 그냥 단곡댁으로 헙시다. 인자부턴 연월리서 단곡댁으로 살면 되는 것이오. 근디 지금 어디 갔다 오시오? 등에 진 것이 없는 것을 본 게 그걸 처분히서 곡식을 팔아오는 모양인디. 거 참 잘했소. 그리고 걱정허지 마시오. 길바닥에 거문고 지키듯이 허믄 자식도 잘 키울 것인 게. 그것이 뭐요? 거문고 대신 애기를 업어 키우면 될 것 같은디."
"남의 일이라고 쉽게 말하는 거요? 곡식을 샀지만 어떻게 끓여먹는지도 모르고 보리밥은 먹어 본 적도 없소."
"자랑이오? 이 시절에 쌀밥만 먹고살았다는 것이 자랑거리는 아닐텐디. 이전에 뭘 했든지 간에 다 잊어버리쇼. 여자든 남자든 날 때부터 밥 하는 거 배우고 나온 사람 없소. 궁하니까 죽이든 풀이든 끓여서 먹는 거지. 모르면 우리 어머니한테 물어보시오. 우리 어머니는 아버지 없이도 우리 형제를 키우셨으니까. 그리고 말 조심 허시오. 뱃속에 아이가 다 듣겠소."
"......"
"아이 아버지가 꼭 필요하면 지금 말하시오. 내가 아이 아버지는 해주것소."
"흥. 뭣이 어째고 어째요. 듣자 듣자 하니까 이 사람이. 내 자식을 모욕하지 마시오. 나를 모욕하는 건 괜찮아도 내 자식은 아니오. 그리고 나는 고운 얼굴을 좋아합니다. 그쪽은 그런 축에도 못 끼고. 나보다 나이도 밑인 것 같은데."
만일은 실실 웃으며 단곡댁의 손에서 곡식 보따리를 빼앗아 자전거에 싣고 간다. 몸이 가벼워진 단곡댁은 울음을 멈추고 연월리에 들어갈 때까지 만일의 말들을 곱씹었다. 모두 여태 살면서 들은 말 중에 가장 위로가 되는 말들이었다. 한 달 후 단곡댁은 왕심댁과 귀화의 도움으로 새막산 집에서 몽을 낳았다. 만일이 데려온 여자가 아들을 낳자 동네에선 만일이 아들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몸을 푼 단곡댁이 아기를 안고 살살 웃으며 이렇게 관옥처럼 잘 생긴 아들의 아버지가 그 사람일리가 있겠냐고 능청스럽게 받아쳤다. 그리고 그 말이 꽤나 설득력 있게 들려서 만일 아버지설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그 소식을 들은 만일의 모친이 가장 기뻐하였다.
아기의 첫 돌 즈음에 아이 아버지, 백안이 찾아왔다. 그리고 매해 늦가을에 찾아와 겨울을 나고 봄에 떠났다가 다시 돌아왔다. 몽은 소리꾼 아버지를 닮아 말문이 트이기도 전부터 스스로 노래를 지어 불렀다. 백안도 아들의 재능을 알아보고 사랑하였으나 모자 곁에 아주 머물지는 않았다.
단곡댁은 왕심댁 집에서 돌아와 방에 누워 자신의 처지에 관한 생각을 한다. 떨어져 가는 양식보다 아버지를 따라가겠다는 아들을 걱정하며 눈을 감는다. 옅은 잠결에 자신이 지난 십 년 동안 수련하여 얻은 귀한 작품이 몽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미소가 번진다. 그리고 곧 자신의 창작품을 세상에 내놔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예감한다.
'세상이 몽이를 받아줄까. 그 소리를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을까. 쳇...내가 어쩌다 이런 겁쟁이가 되었을까이.'
단곡댁이 눈을 떴을 땐 밤이 어두워졌고 몽은 옆방에서 잠이 든 것 같다. 단곡댁 머리 옆엔 왕심댁 집에서 얻어온 개떡 두장이 굳은 채로 있는데 하나가 줄은 것을 보니 몽이 한 장을 먹은 것 같다. 자신도 굳은 개떡을 하나 먹고 자려고 했으나 너무 오래 잤는지 좀이 쑤시고 목이 말라서 잠이 오지 않는다. 집에서 나와 마을 입구 새암에 가서 물을 마시고 머리와 옷섶이 축축하게 젖도록 거칠게 세수를 한다. 세수를 하고 새암 경계석에 앉으니 낮에 들은 라디오 방송이 생각이 난다.
'일본이 망했다믄 무슨 세상이 올지는 모르것지만 나는 뭐 똑같것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하루 안 벌면 하루 굶고 늦가을이 되믄 몽이 아버지가 돌아오실 것이고 이번엔 몽이를 데리고 가시것지. 그러믄 나는 여기서 기다리지 뭐. 까짓 거. 나도 데려가면 좋것지만. 그거야 세월이 더 걸릴 것이고. 그나저나 몽이 아버지는 어디에 계실까나.'
이때 감상에 빠진 단곡댁을 향해 달빛을 받으며 걸어오는 이가 있다. 왈칵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보니 또 만일이다. 만일은 옆구리에 자전거를 끼고 매우 지친 기색으로 까딱 고개를 한번 숙이고 지나친다. 단곡댁은 왠지 심한 무시를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만일을 불러 세운다. 내일 품을 팔 곳을 알아봐 달라는 용건을 빌미로 말을 붙일 작정이다.
"저그요. 음음. 이 밤에 어딜 다녀오시오?"
"내일 얘기 헙시다. 오늘은 너무 되서."
단곡댁은 건성 대답을 하는 이장의 태도가 다소 분하다.
'이전엔 몽이 아버지도 해주겠다고 했으면서 이젠 본 둥 만 둥이다. 이거지. 허긴 니가 아무리 나를 우러러본다고 해도 눈길조차 주지 않겠지만. 몽이 아버지에 비하면 치다만 떡판이지. 암만. 비할 바가 아니다."
단곡댁은 멀어지는 만일을 미련 없이 보내고 앉았던 자리에 도로 엉덩이를 붙인 후에 반달을 바라보며 춘향전의 이별가를 흥얼거린다.
'이별이야 이별이야 임과 날과 이별이야 인제 가면 언제 오리요 이내 한을 일러주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만경창파에 배 띄워라 새벽 서리 찬바람에 울고 가는 기러기야 가지 마오 가지 마오 이별일랑 두고 가지 마오....'
그때 누군가 한 단곡댁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단곡댁이 놀라 뒤를 돌아보니 하얀 모시 한복에 갓을 쓴 옥골선풍 선비, 백안이 신선처럼 서있다.
"몽이 아버지. 어찌 오셨소. 가을도 아닌디."
"신태인 환갑 잔칫집에서 사랑가를 허다가 중요한 전갈이 와서 중간에 흐지부지 끊어 불고 뒤도 안 돌아보고 입은 채로 뛰어 왔네. 일본이 망했다는 소식 들었는가. 여긴 별일 없지?"
백안은 단곡댁이 한밤에 마을 새암에 나와 자신을 그리워하며 온 얼굴이 젖도록 울었다고 짐작했는지 단곡댁의 두 손을 꼭 잡는다. 단곡댁은 암행어사처럼 돌아온 백안의 두 손을 붙들고 자기가 성춘향이가 된 것 같다고 히죽댄다.
"우리 걱정돼서 곡을 끊어 불고 온거지요? 히잇. 살다 본 게 이런 일도 다 있고. 그러믄 부르다만 사랑가는 나랑 같이 부르면 되것네요. 히히히히힛."
"밤이 늦었는디 어서 집에 가세. 노래는 다음에 허고."
다음 날 아침 백안이 읍내에 나가 정오가 되기 전에 거문고를 들고 집에 돌아왔다.
"오래전부터 수소문을 해놨는데 어제야 찾았다는 기별을 받았구먼. 몽이 낳느라 이것을 팔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꼭 찾아주고 싶었는디 어제사 기별이 왔어. 열어봐. 옛날 그대로여. 이걸 구해준 사람 말이 옛날보다 낡았어도 소리는 더 좋아졌다고 허드만. 몽이는 인자 나한테 맽기고 자네는 거문고를 히야지."
"예? 누가 이것을 찾아다 달라고 힜어요? 형... 아니... 몽이 아버지... 나는 몽이만 있으믄 족헌 사람인디. 왜 이렇게 나한테 모질게 허는 것이요. 내가 그렇게 밉고 싫소. 세월이 이렇게나 흘렀는디도."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한번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여. 자네 짝은 거문고여. 이것이 자네 자식이여."
"싫어라우. 나는 소리꾼 허기 싫소.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허요. 이것을 곡식으로 바꿔온 날에 내가 슬프기만 힜는지 아시오? 속이 후련힜소. 그래서 더 울었소. 근디 누가 그럽디다. 아주 잘 팔았다고. 거문고 대신 자식을 업어서 키우라고 힜소. 내 평생 그렇게 따순 말은 처음 들어봤소. 근디 인자 와서 뭐라고요. 몽이를 넘겨주고 술대를 다시 잡으라고요. 싫소이."
단곡댁의 악악거림에도 한치의 흔들림 없는 백안이 낮은 목소리로 몽이를 부른다.
"몽아. 가자."
몽은 미리 싼 짐보따리를 들고 아버지를 따라나선다. 울먹이는 몽이 대문을 나서며 단곡댁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입술을 달싹거리자 뒤돌아보자 백안이 가로막는다.
"몽아. 돌아보지 말어. 어머니는 소리꾼이여. 어머니를 위해 우리가 가야 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