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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령 Aug 06. 2024

1장 1945년 8월 15일



5화  개벽을 기다리는 마음

마을 입구  새암에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을 본  애야가  흠칫한다.   사람들이 모이면   큰일이 일어났거나 곧 일어날 것이고  대개가  나쁜 일이었다.   

함께 산속에서  살았던 사람들,  애야의 아버지를 접주이라고 부르는  작은 아버지와 작은 어머니, 이웃들이 사라져 가고   아버지와 어머니까지 끝내는 혼자만  산에 남을 때까지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엔  이별이 있었다.

떠나는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눈꺼풀로  덮어도   끝없이 솟아나 흐르는  눈물로 입술을 축여가며   두 손을 모아 잡고   스물한 자를  뇌었다.


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

누가 처음에 들려주었던  말이었을까.
어머니였을까.
아버지였을까.
한울님이었을까.


'산실아.   
한울님은 이미 우리 안에 계시다.  
동학은 믿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이다.
우리 안에 계신 천주님을 알고  행하는 것이 동학이니라.

남긴 밥을 먹지 말고  땅에 흘린 음식은  버려라.
헌 밥과 새 밥을 섞지 말고  한 식구라도  수저와 그릇을  따로 써라.
밖에 나갔다 오면  손을 씻고  옷을 빨아라.
방에서 먼 곳에  뒷간을 두어라.  
전염병은 귀신의 짓이  아니니  제물을 써 제사치 말며   행사를 삼가고 집에서 근신하여라.
혹시 나갈 일이 생기거든  수건으로 코와 입을 가리고 서로 간 거리를 두어라.
아무 곳에나 침을 뱉지 말고
침을 밟아 옮기지 말아라
조상님 제사상엔 쌀 한 줌과 청수 한 그릇이면 족하다.
무릇  물과 밥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니라.
아이는 작은 어른이니 매질을 하지 말고 말로 타일러야 한다.
약자의 것을 빼앗지 말고  더 보태주어라.
의롭지 못한 것에 대항하라.
방관하는 것도 의롭지 못한 것이다.

산실아.
사람은 존엄하다.
서로 대접하고 존경하여라.
우리 모두 한울님을 모신 귀한 몸이니라.'



열병을 앓고 깨어나니 온 세상엔  침묵만이 넘치고 흘렀으나  그 목소리만은 뚜렷하게 들렸다.

지기금지원위대강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고창에서 열린 회합에  다녀오는 길에  날이 무척 어두어졌다. 수도 없이 걸어 다녔던  길에서  아버지가  발을 헛디뎌 등진골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자 어머니가  산실을 높은 소나무 위에 올려놓고 따라 내려간 뒤 날이 두 번이나 새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나무에서  내려갈 수만 있었다면   부모님을 따라갔을 것이지만.

산실은  연한 가지에 매달려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 어머니를 기다리며  수없이 열세 글자를 반복했다.

한울님께 간절함  닿았던 것일까.  어머니를  닮은 부인, 귀화가 산기도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나무에서 걸린 아이를  내려주었다. 산실은 소나무 나뭇가지에 오방색 댕기를 단단히 묶어두고   나무에서 내려와 산을 떠났다.    지척을  집과  부모를 두고 작별 인사도 하지 못했다.

산에서는  산실이라 불렸으나 산 아래 어머니는  애야라고 불렸다. 뭐라고 하든  듣지 못하는 애야는 상관이 없었다.

어느 날부터   조금씩 들리는 것 같았으나    애써  듣고 싶지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한울님이 일부러 자신을 봉인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언젠가는 해제의 순간이 올 것 같았다.

귀화가 정성을 다해 애야를 돌봤으나 애야는 줄곧 산 근처를 맴돌며  혼자 놀았다. 그러다 연월리 생활에 적응이 되었는지  또래 아이들 근처를 기웃거렸지만 쉽게 섞이지 못하고 흙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계집애들이 노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였다.

학교에서 돌아온 정애가 애야를 깍두기 삼아 놀이에 참여케 했는데  애야는 그동안 관찰을 많이 한 덕분인지 곧잘 따라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공기 잡기를 할 때면  한몫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  애야와   정애는  쪽지 편지를 나누는 동무가 되었다.  애야는  정애에게 시천주와  산속 이야기를 전했고   정애는 애야에게 연월리 밖의 세상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날은  애야가 마을 어귀에서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정애가  학교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짓궂은 사내아이들이 애야를 둘러쌌다.  영덕이가 애야의 댕기를 잡아당기며 말을 걸었다.

"너 진짜 벙어리 아니지? 쩌번 때 너랑 정애랑 말하는 것 정복이가 봤다는디. 니 목소리 들었다는디. 말히 봐. 말히 봐."


애야는  앉은 채로  오른손을 해를 가리고 고개를 들어  아이들을  올려다봤다.   당황하리라 예상했던 애야가  동요를 보이지  않자  영덕이가   눈을 까뒤집고 손톱을 세워 보이며 대놓고 놀려댔다.

"너그 새 어매 무당이지.  안 무섭냐?  무당은 귀신도 보고 막 그런다는디. 히이...."

애야가 어눌한 목소리로 영덕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다.
 
"나뿌더."

그러나  아이 무리는 저희들끼리 배꼽을 잡고 허리를  꺾으며 웃는 시늉을 하였다. 한번 장난기가 발동한 소년들은  저희끼리 빙빙 돌면서 음률을 넣은 돌림 노래를 부른다.


"나뿌더 래요. 나뿌더 래요. 얼래리 꼴래리."

 
애야가    그냥 앉아 있는데 정애가 달려와  애야를  손을 잡고 일으켜 세운 후 등 뒤에 숨겼다.

"왜  이려.  너거들이   한 동네 친구를 괴롭히는 것이 일본이 조선한테 허는 짓이랑 뭐가 다르냐?  애야가 말을 못 허는 것이지 생각도 못 허는 줄 아냐?   너그들이 애야라고 한번 생각히 봐. 안 들린다고 생각히 봐.  그런  생각은 못 허것지.  그게  진짜  병신이여.  나는  말을 못 참는 병신이고.   모지란 사람들끼리  서로 감싸주고 살아야지 놀리믄 되것냐"


마침 그 옆을 지나가는 왕심댁이  한수를 둔다.

"아야!   동무들끼리 그럼 못쓴다.   허고 싶은 말  못 허고  살믄  얼마나 속이 답답허것냐. 부모 떨어져 사느라고 저렇게 애쓰는디.  애야한테 미안하다고 히라."

왕심댁의 훈수를 들은 아이들이 슬금슬금 뒷걸음으로 도망치자 정애가 소리를 쳤다.

"애야는 내 동무여. 너거들이  '정애야.'라고 부르면 나도 부르고 애야도 부르는 것이여. 알것냐?"

그 순간  애야는   귀에  정애의  말이 아니라  산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를  다시 들었다.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 '

산에 계신 한울님이  산 아래로 오신 줄로 알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한울님은 자신 안에  깃든 존재라는 것을  게 되었다.  

'한울님은 이미 우리 안에 계시다.  '

애야가 산에서 내려와 살게 된 해, 정용의 아내 꽃분이가  난산 끝에  아기를 사산하고 오래 앓았다.  꽃분이 죽기 며칠 전에 정용이  귀화에게 아내를 살릴 수 있는  굿을  해달라고 애원했지만   귀화는 광목 베 오십자를 준비하라고  했다.  머지않아  꽃분이는 아기가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가마를 탔다.  

상여 머리 올라탄  귀화가  오십자  광목 베를  풀어내며 상여소리를 했다.

인제가시면 언제오실라우
명년 요때나 다시  오실라우 어허노하 어허네
어노 어노 허노 어허노하 어허네
못 가신다네 못 가신다네 집을 두고는 못 가신다네
어허노하 어허내
산중에 머루 다래 엉크러 졌는데 명인 가신 디는
곡인들만 우노라 오허노아 어허네    
어노허노  어허노하 어허네
북망산천이 멀다더니 전네 안산이 북망이라네
어허노하 어허네

누군가  무당이  상여 머리에  선 것이 흉하다고 했다가   젊은  새댁이   아들을 사산하고  죽은 것보다 더 흉한 일이 뭐가 있겠냐는  소리를 들었다.

그 후로  정용은  수년동안 산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가끔 산에 내려오면 가장 먼저 들르는 곳이 아내의  무덤이었고 두 번째가 귀화의 신당이었다.  귀화는 정용을 볼 때마다 꽃분이는 아기와 잘 있다고 했지만   정용은 그럴 것이라 대꾸하면서도 귀화에게 꼭 그 말을 듣고 싶어 했다.

산에서 내려온 정용이 귀화의 집 마루에 꿩, 산머루, 다래 등을 내려놓으면  달려 나와 베세 웃으며   매달리던 애야가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았다.  귀화에게 행방을 물으니   애야가 하루에도 몇 번씩 산 쪽을 바라보고  오지 않는 누구를 기다리듯이 한숨을 쉰다고 했다.  그리고  정용이  산에서 내려오는 것을  제일 먼저 발견하면 쏜살같이  뒤꼍으로 숨어버린다고도  했다.  귀화가 웃으며  말하는데 정용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기다려도 안올텐디. 오지도 않을 사람들을 아직도 기다린다는 말이요."

"기다리면 올 사람을 기다리는 것 같은디.   오는 사람은 기다리는 것을 모르는 가벼."

이번에 귀화가 한숨을 쉬었다.

그 후에 자연스럽게 결혼 이야기가 오갔고  귀화의 신당 마당에서 조촐한 식을 올렸다. 결혼  생활은  평온하였고  호롱불처럼  은은한 화목이  둘 사이에 깃들었다.  화목이 깃들자 아기가 찾아왔고  아기가 생기자  등잔 아래 어두운  그림자가 너울거렸다.  그것은 애야가 전혀 짐작하지도 못한 위태로움이었다.

애야는 새암에  모여드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자   호롱불의 심지가  흔들리는 것을 감지한다. 그리고 그 아래 그림자가  춤을 추듯 너울진다.   사람들 사이로 보이는  남편의 표정이 제법 심각하다.  애야는  점심을  거르고 밭으로  간다.  자신의 마음에  돋아난 잡초를 솎아 내버리려는 것인지 더듬어 만져보는 것인지  콩밭을 샅샅이 헤쳐가면  맨손으로  풀을 뽑는다.

양력 팔월 십오일의 해가 너울대는  그림자를  밝게 비춘다.  그림자가 빛 속에  몸을 감추자  아침부터  엉덩이가  불편하고  주기적으로 배가 아프다는 것을 알아챈다.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니   남편이 없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서방님  속이 편치 않아.   독바우  친구 집에 가셨겠지.  돌아올 땐 달걀 소쿠리를 들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웃으며  들어오시겠지. 배가 아파.   아이가 곧  나올 테니 물을 길어서 물항아리를 채워야 해."

물을 길으러 마을 새암에 가니  왕심댁과 동경댁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귀머거리를 옆에 두고  귀엣말을 한다.  하루 이틀 사이이면 동네 사람 누구나 다 알게 될 테지만  굳이 속닥거리는 것은   말 못 할 세월을 보낸 이들의 의례적인 절차인 것 같다.

애야는 밥을 하고 물을 끓이고 목욕을 한다.  그러는 동안  진통의 간격이 점점  짧아진다.  앞 집에 사는  원천댁 아주머니를 부르러 갔다가  오랜만에  정애의  얼굴을 본다.   안색이 좀 나아지니   오른쪽 볼의  흉터가 더 도드라져 보이는 것 같아  측은하다.   그리고 여전히 누구에게도  곁을 주지 않는다.

'늘 당당하고 제 할 말을 다하는 정애는  어쩌다 저렇게  어두운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일까.'
  
인사를  할  겨를도 없이 조급한 원천댁에게 밀려 제 집에 돌아온다.  그리고 정애에 대한 생각을 더 하기도 전에 진통이 밀려온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한 순간  산에 계신 어머니가  떠오른다.   나무에  묶어 두고 온  오방색 댕기를  손에 꼭 쥐고 여덟 살에 헤어진  모습 그대로  딸을 바라보며 안절부절못하시는  어머니, 바로 옆에 서계신  아버지.   여전히 산에서  동학을  행하시는 두 분의 얼굴이  눈앞에  있는 듯 선명해진다. 단 한 발자국만  저쪽을   디디면  등진골  절벽 아래로  떨어져  그쪽으로 갈 수도 있다. 두 손을 뻗어  간절하게 부르자 어머니 얼굴이  엄하게 변하며  두 손을 모은다.  

'아! 어머니는  열세 글자를 되뇌시는구나.'

산도를 통과하는 생명은 죽음이 도사리는  좁은 출구를 지나기 위해  다섯 개 머리뼈를 엇갈리게 모으고 작은 몸을 더  작게 웅크린 채   머리를 돌려가며  빛을 향해 나간다.  한번  나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  숨과 밥을 전해주었던 끈은 잘리고.  내 폐로 숨을 쉬고  내 입으로 삼킨 것만이   피와 살이 되어주는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눈물  없이  서러운 울음을  터뜨린다.

애야는 소리 없이  우는 아기의 얼굴을 보자  등 뒤에 업혀 있던 어떤 존재의  손이 스르르 풀어지는 것을 느낀다.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다른 한 손으로  목을 둘러 잡은 채  등딱쟁이처럼 달라붙어 있던  것이   죽어버린 것이다.  이제야 말라 붙어버린  입술을 힘겹게 떼며   크게  숨을  뱉는다. '애야.'

어머니에게  안긴 새 생명이  비로소  까마귀 곡소리를 멈춘다.  어린 어머니가 더 어린 아기를  풀어진 가슴 품에 끌어안는다.   눈을 꼭 감은 아기가  입으로 더듬어  무엇을 찾다가  젖꼭지 입에 넣은 후에  가늘게 눈을 뜨고 세상을 바라본다.   


새벽 녁, 봉창에  푸르스름한  빛이 스며들어오자 귀화가 슬며시 이부자리에서 빠져나와  게걸음으로 방문을  나가는 것이 보인다.  해가 뜨기  전에 법당에  청수를  올리기 위해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에   정애가 들어온다.

애야가 정애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정애가 아랫목에 누워있는 아기 얼굴을  한참 바라본다.

"산실아.  네가 아기를 낳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오지 않을 수가 없었어.  네가 낳은  아기라며 내 아기나 마찬가지니까.  내가 이모가 된 거잖아.  

산실아.  산에서 내려와 니 배가 불어오는 것을 보며 아기옷을 지었어.  나 같은 사람이  아기 옷을 지어도 될까 수없이 생각했어.  내가 지은 옷을 입으면  나처럼 재수 없는 사람이 될까 봐 무서웠어.  

아가.  너에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일본이 망했다고 하니까.

산실아.  산에 있을 때  등진골에 갔었어.  등진골을  위쪽에  있었던   너희  집에도 갔었어.  너한테 사금파리 한 조각이라도 가져다주고 싶어서.  그런데  집 자리만  겨우 알아보게 남아 있었어.  그 산속에서도  손을 많이 탔는지  성한 곳이  하나도 없더라.   나처럼 말이야.   그래도  너에게 뭐라도 하나 가져다주고 싶어서 집터를  뒤졌어.   작은 것이라도 너에겐 소중할 테니까.  아무리 찾아도  흙과 뿐이었어.   떨어진 문짝에 붙은 문풍지 조각 하나라도  떼어다  주고 싶었어.  너희 식구가   풀을 쑤어  붙인 것일 테니까.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어. 손이 닿기가 무섭게  삭아서 부서져버렸어.  

그러다  주춧돌 생각이 났어.  아버지가  그 아래에 뭔가를 보관하셨다고 했잖아.  그래서 풀을  헤집어서  주춧돌을 찾았어.  그리고  네모 반듯한 주춧돌 아래에서  책을 찾아냈어."

정애가 애야에게  보자기에 싼 것을 건넨다.  애야가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보자기를 푼다.  보자기 안에  무명 배냇저고리 벌과    동경대전이  들어있다.    

"산실아. 일본이 망했다지.  나는 곧 연월리를 떠날 거야. 이젠 산골에  숨어 살지 않을래.  이렇게 사는 것이  죽은 것이랑 무슨 차이가 있을까.  봄가을로  누에를  치고  실을 뽑고 뽑은 실로  명주을 짜다가  늙어 죽는다면   지금 죽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리고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한 번은  아니 한 번이라도  세상에 나가고 싶어.  이렇게 죽기엔 너무 억울해.  그 놈들이  저지른 일이  무엇인지  알릴거야.  그 죽일 놈들이 내 나라에서 무슨 짓거리를 했는지 말이야."

사 년 전 읍내 여학교에 다녔던 정애가  일본군에게  끌려갔다가  돌아왔다. 시기와  힐난을 받으며   진학한 상급 학교를 파하고 집에  오는 길에  납치를 당한 것이다.    원천댁이 백방으로 딸을 찾았지만 들려오는 소식은 절망적이었다.   몇 달 후애  낚시를 갔던 정용이 저수지 덤불에서 온몸이 발기발기 찢긴  정애를  발견해  집에 데려 왔다.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렸다고 했을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고  아무도 묻지도 않았다. 무엇을 묻겠는가.  그리고 삼 년간 깊은 산에  숨었다가  집에 온 지  일 년 가까이 되어간다.   그러나  여전히 무덤 같은  잠실에  숨어살며  거미처럼  누에를 길러   실을 뽑고  명주를 짤뿐  어머니, 원천댁 외엔 누구와도  만나지 않고 있었다.  

정애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애야가  정애의 치맛자락을 잡았다. 그리고 손에 든 책을 한번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정애에게  도로 건네주었다.

'정애야.  다시 돌아왔구나. 동경대전을 찾아들고 환생한 것 같아.  난 까마득히 동경대전을 잊었어.  어쩌면 내 안에서 이미 녹아있을지도 모르지. 이젠 네 것이야.  네가 그랬지. '정애야.'하고 부르면 너도 부르고 나도 부는 것이라고. 니가 가지고 있으면 내가 가지고 있는거야.'

정애가 빙그레 한번 웃고  동경대전을  받아 들고 방을 나간다.


'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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