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야에게 주려 들고 갔던 동경대전을 다시 가지고 집에 돌아온 정애는 부엌을 관통하여 뒤란으로 돌아나가 북으로 봉창이 난 뒷방으로 들어간다. 머리에 천장이 닿을 듯한 작은 방안엔 짜다만 명주가 걸쳐진 베틀과 실꾸러미가 담긴 바구니, 벽에 걸린 옷 두어 벌, 이부자리 한채 그리고 등잔뿐이다.
원래 이곳은 당장 찧어 먹을 곡식이나 시렁에 올라가지 않는 큰 그릇들, 시장에서 사 온 마른 생선들과 설 쇠고 남은 산자 등을 보관하는 부엌에 딸린 작은 광이었다. 이 방의 천장은 안방 벽장의 바닥이라 안방에서 벽장문을 열어두면 안방에서 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린 정애는 이곳에서 산자를 먹다가 안방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베틀 소리가 멈추면 탱자나무 울타리에 난 개구멍을 통해 도망을 치곤 하였다.
사 년 전까지는 정애의 방은 마루를 사이에 두고 안방과 마주한 네 짝 미닫이 문이 있는 건넌방이었다. 일 년에 두어 번 친지들이 올 때 문짝을 다 떼어내고 안방, 마루와 연결하며 긴 상을 펼쳐 놓을 때를 제외하면 오직 정애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안채 맞은편, 방 두 칸 자리 사랑채 중 큰 방은 외조부모님, 작은 방은 남동생 셋이 같이 썼던 점과 비교하면 딸에게 다소 호사스러운 대우였다. 그도 그럴 것이 대목장을 대물림하는 정애의 집안은 일찍이 아들들은 솔가 시키고 목수 사위를 들여 가업을 잇게 하였기 때문이다.
정애의 외할아버지는 대흥리 보천교 십일전 건축을 주도할 정도로 근방에서 이름난 대목장이었고 정애의 아버지는 외할아버지 밑에서 일을 하다가 이 집 사위가 되었다. 그 일만 없었다면 정애 또한 아버지가 점지한 목수와 결혼하여 이 집에서 자식을 낳고 기르며 대목장의 아내로 살았을 것이다.
동경대전을 가만히 바닥에 내려놓고 베틀 앞에 앉은 정애가 습관처럼 명주를 짜려다가 한 손으로 목뒤에 훑더니 인상을 찌푸린다. 밤새 베를 짜며 고심한 끝에 애야와 아기를 보고 오니 이제야 자기 몸이 소금에 절어 끈적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날이 더 밝으면 목욕을 하기 힘들 것 같아 방문을 열고 나가 탱자나무 울타리로 가려진 뒷마당에서 옷을 벗는다.
목 아래 벗은 몸에 가시가 가득하다. 수백 번 칼로 찔리고 베인 후 새로 돋아난 살이 몸에서 솟아난 가시처럼 보인다. 유두가 잘려나간 왼쪽 젖가슴의 찌그러진 유륜이 아직도 아프다고 우는 것 같다. 흉터로 가득한 몸에 물을 끼얹은 후 물기를 닦고 새 옷을 입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벗은 옷을 빨려다가 생각이 바뀐 듯 빨래통에 헌 옷을 다시 담으며 애야에게 연월리를 떠나겠다고 다짐했던 말들을 떠올린다.
'죽은 듯 집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죽은 것과 다를 바 없어. 내가 죽어 없어지는 것을 그 놈들이 가장 원하는 거야. 살 거야. 원래 나처럼 살 거야. 웅크리고 사는 것은 나답지 않아. 일단 집 밖으로 나가자. 집을 나갈 수 없으면 연월리도 떠날 수 없어. 우선 새암에서 빨래를 하는 거야. 정애야. 오늘은 빨래만 한번 해보자.'
스스로 용기를 북돋으며 마당을 걸어 나와 사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아무도 없다. 그새 짙은 안개가 산에서 내려와 마을을 덮어 아까보다 더 어두워진 것 같다. 주위를 살피며 우물로 걸어가니 짙은 안갯속에서 뽕나무 잎사귀들의 내는 은밀한 박수 소리만 들리고 온 세상이 조용하다. 누가 볼세라 흐르는 새암 물에 휘적휘적 빨래를 흔든 뒤에 얼른 집에 돌아간다.
다음 날, 더 일찍 눈이 떠진 정애는 몸을 씻고 안개 낀 새암에서 헌 옷을 빤다. 누굴 만날까 싶어 어제처럼 서둘러 빨래를 하는데 누군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하며 얼굴이 달아오른다.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빨래를 주물럭거린다. 그러나 저쪽에서 오는 사람도 뭔가 석연치 않은지 주위를 살피며 살금살금 걷다가 안갯속에서 빨래를 하는 정애를 발견하고 빨래동이를 바닥에 내동댕이 치며 털썩 주저앉는다. 익숙한 남자 목소리다.
"어매매, 시버를 거.."
빨래통에서 쏟아진 아기 똥기저귀와 산모가 사용한 개짐이 바닥에 나뒹구는데도 정용은 자리에서 퍼질러 앉아있다. 정애가 건성으로 빨래 주무르던 손을 멈춘 후 자리에서 일어나 빨랫감을 주워주러 가다가 히죽히죽 웃기 시작한다. 그리고 한번 웃음이 시작되자 걷잡을 수 없게 번진다.
"흐흐흐 풉. 프프프프.. 파파파파.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아재....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아재..... 하하하하.으으으으..."
끝도 없이 웃던 정애는 결국 울음이 터지고 나서야 겨우 웃음을 멈춘다. 그제야 정용도 바닥에 나뒹구는 빨래를 통에 담으며 정애를 향해,
"구신인 줄 알았어. 누가 이 신새벽에 머리를 풀어헤치고 빨래는 허것는가. 얼마나 놀랬는지 알어? 자네는 맨날 나를 놀래키네."
정애는 그제야 머리를 감고 말리기 위해 풀어헤치고 새암에 나왔다는 것을 깨닫고 앞으로 쏠린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긴다.
"아재도. 빨래하러 나왔어요?"
"응, 장모님은 산구완 허시느라 고생하시고 음식은 솜씨가 없어서 못 허고, 빨래는 힘으로 하는 것인 게."
정용은 부끄러운 일을 하다 걸린 것처럼 변명투로 대답한다.
"아재, 빨리 해치워요. 누구 오기 전에."
정애와 정용은 경주처럼 빨래를 하고 쏜살같이 달려 서로를 마주한 대문 앞에 이르자 인사도 없이 각자의 집으로 들어간다. 대문 안에 들어선 정애가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오른쪽 볼의 흉터가 입꼬리에 닿을 듯이 웃는다. 아침을 짓기 위해 안방에 나오던 정애의 어머니, 원천댁이 정애를 바라본다. 몇 년 만에 생기 있게 웃는 정애의 얼굴을 바라보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을 붙인다.
"새복부터 어딜 갔다 오냐?"
"빨래하러 새암에요. "
"이 새복에? "
"아침에 목욕하고 빨래가 나와서요."
"안개가 낀 것을 본 게 날이 좋아서 잘 마르것다."
정애는 마당 빨랫줄에 옷들을 널고 부엌에서 바가지에 보리쌀을 담는 원천댁 곁에 다가간다.
"엄마. 나 이제 내 방으로 다시 갈래요. 뒷방은 너무 어두워요."
"그려."
"그리고 베틀도 내 방으로 옮길 거예요. 그것 좀 도와줘요. 엄마는 내가 베틀 앞에 앉아있는 게 싫겠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어요. 엄마는 내가 책상 앞에 앉아 책을 보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길 바랐겠지만 당분간은 베를 더 짤게요. 지금은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어요. 답답하더라도 조금만 더 지켜봐 줘요."
"내 걱정은 말어. 니가 베 짜는 직녀가 되든가 책 보는 선상이 되든가.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녀. 니 몸에 무슨 흉터가 있어도 다 괜찮혀. 니가 없어졌을 때... 다 죽었을 거라고 힜어. 어떤 사람들은 찾지 말라고 허드라. 못 볼 꼴 볼 거라고. 귀화 성님만 니가 지 발로 돌아올 거라고 허셨어. 꼭 돌아올 것인게 정신줄 잘 잡고 기다리라고 신신당부를 허시드라. 그 말이 어찌나 고맙든가. 그리도 마냥 기다릴 수 있간이. 살림을 작파하고 팔도를 돌아다니믄서 큰 애기 파는 술집을 뒤졌어. 그 놈들한테 끌려간 것을 모르고. 별의별 애들이 다 봤어. 갓 팔려온 애, 오래전에 잡혀온 애, 오늘내일하는디도 남자를 받는 애, 정말 눈뜨고는 못 보겠드라. 그런디 말여. 딸을 찾으러 온 어머니가 있다고 하믄 다들 저를 찾으러 온 줄로 알고 눈이 반짝이며 나를 보는 것이여. 너무 안쓰라서 어머니 기다리냐고 물어본 게 하나같이 저그 어머니는 벌써 죽었다고 허드라. 그거 보믄서 생각힜어. 살아만 있어라. 니가 돌아올 수만 있다면 에미 머리털을 다 뽑아서 신이라도 삼아 주것다. 긍게로. 내 말은 니가 살아만 있으면 된다는 말여. 뭐가 되든지 간에 말여. 너는 내 살점이여. 니가 이렇게 두 눈 뜨고 살아있는디 내가 뭘 더 바라겠냐."
삼년 동안 실이 노이 되도록 한 말들을 오늘 처음으로 쏟아낸 듯 원천댁이 운다. 정애는 우는 어머니 모습을 바라보다가 기어이 그 기억을 또 떠올린다.
분홍색 살점이 마룻바닥에 떨어졌다. 아픈 줄도 몰랐다. 사람이 아니라 푸줏간에 걸린 고기 덩어리였으니까. 주인에게 값을 치르면 누구에게든 팔려야 했다. 누구라도 엉덩이를, 허벅지를, 가슴을, 음부를, 연한 부위를 찾아내 쿡쿡 찔러보고 원하는 만큼 썰어서 먹었다. 그놈이 날이 선 니혼토우를 휘두르자 오른쪽 볼과 왼쪽 가슴이 뜨끔했다. 왼쩍 젖꼭지가 바닥에 떨어졌다. 아픈 줄도 모르고 쇠꼬챙이에 걸린 고기처럼 한참 흔들리다가 저절로 멈춰졌다. 후두두두둑. 오른쪽 볼과 왼쪽 가슴에서 쏟아진 피가 살점 위에 떨어졌다. 아픈 줄도 몰랐다. 자기 몸에 아직도 그렇게 많은 피가 남아있다는 것이 놀라워서 으으으으음 소리를 냈다. 자기 입에서 나온 소리를 듣고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파오기 시작했다. 살아있는 몸을 인식하자 통증이 비명을 지르며 염증을 불러들였다. 몸 위에서 통증과 염증이 쐑쐑 소리를 내며 서로를 강간하고 유린하며 미색의 고름을 쏟아냈다. 죽어도 엄마에게 이 이야기는 하지 못할 것 같았다. 엄마. 보고 싶어.
"엄마. 알겠으니까. 이제 그만해. 엄마가 이러니까 내가 아무 말도 못 하는 거야. 왜 내가 엄마 살점이야? 무섭고 징그러워. 그만해. 엄마가 왜 더 난리야?"
무안해진 원천댁이 눈을 껌벅껌벅하다가 눈물을 닦는다. 딸이 화내는 이유가 짐작되지 않는 어머니는 자기 마음을 몰라주는 딸에게 서운하지만 따져 묻지 않는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다. 알게 된다면 오래도록 불들고 늘어진 마른 탯줄을 놔야 할테니까.
모녀가 마주 앉아 서먹하게 아침밥을 먹은 뒤, 정애는 사 년 동안 방치되어 있는 건넌방 문을 연다. 아버지가 만들어 준 앉은뱅이책상 위엔 책 한 권이 놓여 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읽으려고 펼쳐두고 갔었나 보다. 무슨 책이었는지 궁금해 곁 표지를 보니 안회남의 '불'이다.
'내가 이런 책을 읽었었나?'
무슨 내용인지 읽어보고 싶어 책을 들여다보려는데 마당에서 원천댁이 다급한 목소리로 정애를 부른다.
"정애야. 정애야. 아버지 오셨다."
정애의 아버지, 대수가 세 아들을 앞세우고 토방 위로 올라오고 있다. 대수는 마루에 나와 서있는 큰 딸과 눈이 마주치자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않은 채 정애를 등지고 마루에 앉는다.
"오셨어요. 아버지. "
"응, 그래. 넌 뭔 일로 말캉에 나와 있어?"
"방을 옮기려고요. 원래 제 방으로. "
"어째서?"
'뒷방이 너무 어두워서요."
"건넌방을 다시 쓰겠다는 거여? 그럼 나는 저 방을 써야것다."
한 숨을 쉬며 두 무릎에 손을 짚고 일어나는 남편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원천댁이 퉁명스럽게 묻는다.
"점빵은 어쩌고 오셨소?"
"점빵이라니?"
대수는 십 년 가까이 자신이 일군 목재 상점을 작은 구멍가게로 취급하는 것이라 여겼는지 눈을 치켜뜨고 원천댁을 쏘아보다가 마루에서 내려와 사랑채 큰방으로 들어간다. 대수가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막내아들이 기회를 얻은 듯이 어머니 품으로 파고들며 귀엣말을 한다.
"어머니, 사람들이 와서 가게를 막 때려 부숴당게요. 친일파 놈은 당장 꺼지라고 하면서요. 칫. 다들 외상 좀 달라고 그렇게 알랑댔으면서. 제일 외상을 많이 가져간 아재가 앞장서서 그랬당게요."
"엄매. 그맀냐. 너그들은 괜찮냐? "
원천댁이 막내아들을 품에 안고 다른 두 아들을 바라본다. 두어 달 안 본 사이에 사내 티를 입은 둘째, 셋째 아들이 무심하게 대답한다.
"예, 괜찮아요."
"밥은 먹었냐?'
"아니요. 못 먹었어요."
"그려. 밥 차려 줄텐게 밥 먹어라."
원천댁과 정애가 곧바로 부엌으로 가서 아침 상을 준비한 후 막내아들을 부른다
"양길아. 형들이랑 아버지 불러라."
마당에서 흙장난을 하는 양길이 사랑채로 들어가 누운 형들과 아버지를 부른다.
"아버지, 진지드셔라우. 형, 밥 먹어."
네 남자가 마루로 와서 원천댁이 차린 밥상 앞에 앉아 수저를 든다. 어린 양길은 온 가족이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인 것이 신이 나는지 들깨를 넣어 끓인 호박국을 떠먹으며 조잘거린다.
"어머니 밥이 시상에서 젤루 맛있단게요. 들깨 넣은 호박국은 우리 집 아니믄 어디서 먹것어요. 개성 할머니는 다른 것은 다 잘해주시는데 음식 맛이 좀 이상히가꼬. 맛이 없는 것은 아닌디 뭐가 빠진 것 같고... 쓰읍... 아버지, 아버지도 어머니 밥 맛나지요? 이렇게 다 같이 밥 먹은 게 좋지요?"
대수도 이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바인지 고개를 끄덕거리며 원천댁에 빈 국그릇을 내민다. 원천댁이 부엌에서 국 솥을 가지고 들어와 남편과 아들들의 국그릇에 국을 덜어주며 자식들의 얼굴을 곰곰이 바라본다.
"양길아. 맛있냐. 많이 먹어라. 한참 먹을 땐디 할머니 밥이 입맛에 안 맞아서 어뜨커냐. 북쪽은 우리랑 입맛이 다른게로. 사람 입맛같이 안 변하는 것이 없어야. 마음이 변허지."
"맨날 어머니 밥 먹었으면 좋것다. 작은 어마니는 읍내에서 살라고 허고 우리는 우리끼리 여기서 같이 살믄...."
대수가 입에서 뺀 숟가락을 들어 양길의 머리를 때리려는 시늉을 하자 양길은 어깨를 움츠려 자라목을 하고 입을 다문다.
사남매 중에 막내인 양길은 대수의 첩인 개성댁을 작은 어마니라고 부른다. 다른 형제들이 개성댁을 아주머니라고 칭하며 사무적으로 대하는 것을 볼라치면 양길은 일부러 '작은 어마니이이이이'를 길게 빼고 부르며 달려가 어린양을 부리며 칭얼댄다. 아픈 정애를 돌보느라 양길에게 소홀했던 원천댁의 자리를 대신하여 본처의 막내아들을 보살펴준 은혜와 아이들을 귀하게 여기는 개성댁의 성품 때문이다. 대수보다 네 살 연상인 개성댁은 누리끼리하고 각진 얼굴에 뼈대가 굵고 키가 커서 실제보다 더 늙어보이는 박색이다. 그러나 잔꾀 없이 계산이 빠르고 경우를 잘 따져 처신하여 첩임에도 본처의 신임을 얻었다. 대수 또한 개성댁의 도움으로 인해 솔서 신세를 면하고 목재 상사 사장이 되었다.
개성댁은 이십여 년 전 본남편과 같이 개성에서 보천교 본소가 있는 대흥리로 이사를 왔다. 개성댁의 본남편은 교당에 전 재산을 헌납하고 빈털터리가 되어 보천교에서 운영하는 방직 공장에서 일하다가 고향을 떠난 지 십 년 만에 병을 얻어 죽었다. 원래 험한 일은 해 본 적이 없는 약골인 데다 자식 셋을 같은 병으로 잃은 후라 삶의 의지가 꺾여서였다. 혼자 남은 개성댁이 남편과 자식을 잃고 저승의 문턱을 밝기 직전, 개성에서 달려온 친정어머니가 겨우 살려냈다고 한다.
회생한 개성댁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남편이 십 년 전에 보천교에 낸 돈을 돌려달라는 송사를 걸었다. 송사가 진행되는 도중에 보천교조 차경석이 사망하였고 일제의 유사종교 해산령이 발표되었다. 교주가 죽은 뒤 우왕좌왕하던 차에 일본 법정은 개성댁의 주장을 받아들여 십일전 건물을 해체한 후에 나온 목재를 팔아 피해 보상을 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오랜 기간 독립자금을 몰래 대 왔던 보천교를 눈에 가시로 여겼던 일제에게 원한을 품은 한 여인의 송사는 보천교를 해체할 좋은 명분이 되었던 것이다. 판결에 따라 십일전 건물이 해체된 후 나온 목재는 불교 조계종에 헐값에 팔려 이후 경성 조계사 건물을 짓는 데 사용된다. 개성댁도 이때 백두산에서 공수해 온 최상품 목재를 받았으나 처분할 길이 없어 막막하던 차에 목수였던 대수가 읍내에 목재상 차리는 것을 도왔다. 장인을 도와 십일전 건물을 짓는데 일조한 대수는 장인이 풍을 맞고 자리에 눕자 장인이 올린 최고의 작품을 뜯어 팔아치우는데 앞장선 것이다. 이 일로 인하여 원래 데면데면했던 부부관계는 완전히 갈라졌고 장인이 죽자마자 대수는 목수 데릴사위 역할를 그만두고 보천교를 원수처럼 여기는 개성댁과 동업을 하다 살림까지 차리게 되었다.
이후 사업이 번창하여 오 년 만에 읍내에 큰 집을 장만한 대수는 개성댁의 친정어머니와 대수의 세 아들을 불러들여 가족의 구색을 맞추었다. 이때 원천댁은 잡혀간 정애를 찾으러 전국을 돌아다니느라 사이가 나쁜 남편이 새살림차린 것을 남의 일쯤으로 여겼다. 그러나 개성댁이 먼저 원천댁을 찾아와 정애를 찾는데 필요한 여비를 융통해 주었고 무엇보다 어린 아들들, 특히 다섯 살 된 양길을 친아들처럼 아끼며 길렀다.
대수가 연월리에 온 후부터 짙은 안개가 내려앉은 것 같았던 꿉꿉한 집안 분위기에 냉기가 더해진다. 자신과 아버지를 배신한 남편을 향한 원천댁 눈빛은 늘 경멸에 차 있고 그러한 눈빛에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대수는 하릴없이 술을 진탕 마시고 아무데나 주질러 앉아 술주정을 한다.
"보리쌀 서말만 있으면 처가살이는 안 헌다고 허지만 그놈의 것이 있었어야 말이지. 썩을 놈의 보천교 십일전 건물만 안 지었어도 이렇게는 안 되는 것인디. 내가 백두산에는 왜 갔을까이. 아이고. 어머니. 어찌다 그렇게 돌아가셨소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고 힜는디. 그 새를 못 참고 가셨어라. 이 놈의 집구석에 발을 잘못 들여놔서 마음 놓고 선영 봉사도 못하는 데릴사위가 된 것을 아시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까. 어머니."
원천댁이 남편의 술주정을 견디지 못하게 되었을 무렵, 개성댁이 대수를 찾으러 왔다. 때 묻은 저고리에 몸빼를 입은 채로 말린 굴비를 손에 들고 대문을 빼꼼히 열고 들어온다. 오늘도 집안엔 아침부터 전운이 감돌고 있었으므로 다들 반가운 기색이다. 여자다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외양과는 달리 자기보다 두살 아래인 원천댁에게 아양을 떨며 깍듯하게 안부를 묻는다.
"형님, 잘 지내고 계셨시니까. 정애는 좀 어때요? 어제 장에 갔다 굴비가 좋아서 형님이랑 노놔 먹구 싶어서 사 왔어요. 굴비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그간 별일이 없으셨지요? 읍내에 있다가 여기 오니 바람도 시원하구 좋습니다."
"응, 잘 지냈네. 읍내는 어떤가? 해방이 되어 봉변을 당허지는 않었는가. 친정 어마니가 많이 놀라셨것네."
"읍내에선 해방이 되었다고 어찌나 먼지를 일으키며 난리를 치는지 숨도 못 쉬겠어요. 다들 먹구 살 궁리들은 안하구. 몇 군데서 주문이 들어왔는데 남정네가 없으니까 어디서부터 일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
"음... 얼른 데리고 가게. 꼴도 보기 싫어."
"사장님 모시고 가도 될까요?"
마당에서 개성댁의 목소리 들리자 숙취를 핑계 삼아 방구들을 짊어지고 늘어져있던 대수가 벌떡 일어나 방문을 확 열어젖힌다. 그리고 그간 볼 수 없었던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큰소리를 친다.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허지? 그릏게 가르쳐줬는데도 말여. 여기가 어디라고 왔어. 인자 좀 쉬려는데. 주문이 많이 밀렸나?"
"잘 모르겠어요. 어마니가 주문을 받았는데 정확하게 적어놓지도 않구."
"어허. 주문을 그렇게 받으면 어떡허나. 자네는 뭘 했길래 어마니가 주문을 받아."
"사장님도두... 제가 어마니 부려먹구 놀았을까요. 두 사람이 일하다 혼자 일하려니 죽갓어요. 제가 할 줄 아는 게 있어야지요. 사장님."
"에헤. 이 사람이."
대수가 헐레벌떡 겉옷을 꿰며 방에서 나온다. 그리고 아들들에게 저녁에 집에서 보자는 말을 남기고 피난을 가는 사람처럼 원천댁과 정애에겐 인사도 하지 않고 부리나케 집을 떠난다. 해가 지기 전에 큰 아들과 둘째 아들도 공부를 핑계 삼아 읍내에 나갔지만 양길은 연월리에 남았다. 며칠 후에 개성댁과 대수가 양길을 데리왔지만 그새 아이의 마음은 더욱 굳어지 것 같았다. 읍내 집에선 여섯 식구나 사는데 연월리 집에는 두 식구만 사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 갈 수 없다고 하며 연월리와 가까운 학교로 전학을 시켜달라고 개성댁을 설득했다. 개성댁이 서운한 기색을 내비치자 양길은 '어마니이이이이'라고 부르며 목을 끌어 안았다. 결국 개성댁이 양길의 짐을 직접 옮겨주었다.
여름이 지나고 찬바람이 불자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인사들이 속속 귀국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더니 상해 임시 정부 주석 김구가 귀국하여 보천교에 대한 언급을 한다.
"임시정부가 정읍 보천교에 큰 빚을 졌다.'
김구의 한마디는 지하로 뻗어있던 보천교가 다시 활동을 시작하는데 큰 힘이 되었으나 금세 신교와 구교로 갈라져 대립한다. 교단이 해체된 후에도 대흥리에 눌러살며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개벽 사상을 지켜온 양심 있는 신자들이 두 패로 나뉜 것이다. 개성댁과 대수는 해방 후에 보천교가 부활하여 교세가 회복되면 복수를 당할까 전전긍긍하다가 저희들끼리 반목하여 완전히 갈라서는 것을 보며 새로운 세상이 온 것처럼 기뻐한다. 누군가의 불화는 누군가에겐 개벽이었던 것이다.
정애는 해가 바뀌기 전에 경성 방직 공장에 취직이 되어 연월리를 떠난다. 얼굴의 흉터 때문에 사람 만나는 일을 피했지만 대흥리에서 방직 공장을 운영하는 보천교 신자의 주선으로 작은 방직 공장 여공으로 취직이 된 것이다.
눈이 가득 쌓인 천원역 승강장에 정애와 원천댁이 서있다. 기차가 기까이 올 때까지 잡은 손을 놓지 못하고 얼굴을 바라보다 원천댁이 먼저 작별 인사를 건넨다.
'정애야. 니가 떠난 게 내 살점이 떨어져... ... 아니여. 내가 괜한 소리를 힜다. 잘 갔다 와. 힘들면 언제든지 돌아오고."
"응. 엄마. 경성 가서 편지할게. 그리고 고마워. 엄마 아니었으면 난 벌써 죽었을 거야. 그날도 기차에서 뛰어내릴 때도 집에 걸어올 때도 엄마 생각만 했어. 엄마 얼굴 딱 한 번만 보자. 죽더라도 딱 한번만. 그러면서. 고마워, 엄마. 다녀올게."
살기 위해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렸던 정애는 새 삶을 위해 정지한 열차에 오른다. 철컹철컹 기차가 출발하자 눈에 덮인 고향 산천이 보인다. 그러나 지금까지 봐왔던 곳과 달라 보여서 눈을 떼지 못한다. 북쪽에서 내려온 차가운 눈구름이 방장산을 넘지 못하고 무거운 등짐을 와르르 내려놓는 곳. 이른 아침에 눈을 뜨면 아버지는 싸리비로 변소 가는 앞마당을 큰 갈지자로 쓸고 어머니는 수수비로 장독대 가는 뒷마당을 작은 갈지자로 쓸어, 미리 길을 내두셨던 곳. 정애의 요람이자 무덤이었던 곳. 이곳과 화합하지 못한 정애는 젖꼭지가 없는 왼쪽 가슴에 명주 보자기에 싼 동경대전을 품고 연월리를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