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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0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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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령 Oct 16. 2024

짙어지는 전쟁의 윤곽

1950년  오월 볕 아래,   대여섯 살 된 여자 아이가  팔짱을 끼고  토방에  앉아   반도(蟠桃) 같은  볼을  잔뜩  부풀렸다가  뿌우뿌우  소리를 내며  오므린 입술로 바람을 뺀다.   귀화가 사립문을 열고 들어오며 다정하게 손녀  이름을 부르니 보란 듯이  휙 돌아앉으며  견고하게  팔짱을 고쳐 낀다.  귀화가  되려  팔월의  심통 마중을 해야 할 판이다. 


"팔월아. 할머니 왔다.  우리 갱아지 얼굴이 왜 이럴까?"


"흥. 몰라."


"뭐 땜시? 왜 그려?"


"모른당게요."


"아이.  왜 그려. 나한테 말히 봐." 


"어머니  미워요."


"이잉? 어머니가 밉다고?"


"잉! 아까 새암에서 빨래 허다가 나도 어머니처럼 빨래를 허고 싶어서. 칫!  어머니는  허지 말라고 허고.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하잖아요. 나는  심심헌디. 흥! 업어달라고 헌 게  업어주지도 않고  빨래만 허고. 피!  어머니 미워.   글다가  독에서 미끄러져가꼬 물에 빠짔어.  어머니가 성을  내면서 나를  집에  데리다 놓고 어머니는 또 빨래 가지러 갔당게. 우씨!"


"시상에나. 어이구. 그맀어? 어디 다친 데는 없냐?" 


팔월은 그제야 귀화와 눈을 맞추며  소매를 걷어 올려  오른쪽 팔꿈치를  보여준다. 귀화는 웃음을 참으며  흠 하나 없이  오글조글한  팔꿈치를  입으로 호호 불어준다. 


"아펐것다. 시상이나. 우짜쓰까." 


팔월은  그제야 함지박같이 웃으며  귀화가 오는 길에 꺾어온 토끼풀꽃에 시선을 준다. 


 "어어. 토깽이풀. 할머니. 나 줄라고 갖고 왔어요.".


"암만. 이쁜 손지 반지도 만들어주고 목걸이도 만들어줄라고."


"잉. 나도 그거 할 수 있는디.  쩌번에  정애 이모가 만드는 거 봤어. "


"그려. 그럼 팔월이가  만들어 봐." 


팔월은  단풍잎 같은 손으로  토끼풀 꽃을 만지작 거리고 귀화는 팔월의 헝클어진 머리를  풀어 손빗질을 하여  쫑쫑  땋으며   말한다. 


"딸 하나는 과허고  반푼이면 모지란다고 히도 우리 팔월이는  딱 맞게  이쁜 새끼여.  팔월이는 동생 안 보고 잡냐?  할미는 인자 팔월이  닮은 동생이 보고 싶은디.   팔월이가  터팔었잖어.   할머니 한번 보고 돌아 앉아봐. "


팔월이 토끼풀을 만지작거리느라 귀화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다.


"오린 쪽 돌아 앉으면  아들이고 외약쪽으로  보믄 딸이라고 힜든가?  나도 모르것다.  뭐가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팔월이처럼 고운 아가가 나오것지.  박달나무 가지에서 박달나무 나고  싸리나무 가지에서 싸리나무 난단디.   팔월이는 누굴 탁해서  이리 고울까.  어디 보자.  울퉁불퉁한 애비도 안탁허고  히미한  애미도 안탁은 것 같고.  갓 피어난 민들레같이  쬐깐한 것이   비애를 내는 것도 기여 춥고.   꽃만 아쁠까잉.  꽃이 지고 나문   연등 같은 씨앗들이  올래졸래   둥지를 지었다가  봄바람을  만나믄  멀리멀리 시집을 가고. 아주 멀리멀리 시집을 가부리고......  아주 멀리멀리......"


귀화는  사랑스러운 손녀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맥없이 지껄인 말들이  마치 누군가 들려주는 말인 듯 제 목소리가 낯설다.  정수리부터  내려온 서늘한 기운에 오드득오드득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육감이  한 올 한 올 바늘처럼 선다. 그러나 나오는 말들을  차마 더 이어 붙일 수가 없다.   신이 내려온 순간의 자신은  자신이 아니다.  이 세상과  맞닿은 저 세상과 연결하는 중개인으로,  어떤  존재의 대리자로서의 일을 수행하다 보면  다른 이의 운명을 슬쩍 엿보게 되고  부지불식간  말로 흘러나온다.  그러나  하필   어린 손녀의 팔자라면,  아이 앞길에 놓인  바위 같은 슬픔과  무인도 같은 외로움을 보게 된다면  입이 다물어질 수밖에. 


"할머니. 나는 아버지한테 시집갈 거여.  히히!  아버지는 시상에서 나를 젤로 이뻐 허구.  나도 아버지가 시상에서 제일 좋당게요. 귀여워.  흐읏!   그리고 아버지는 힘이 씨서   맨날 나를 업어주잖아.  원천댁 할머니도  숭보고  동무들도  아직도  애기라고 얼레리꼴레리 허지만 나는 아버지 등에 업히는 것이 제일 좋당게요. 헤헤!  나는 아버지한테 시집갈거여."


"잉? 그려,  팔월이는 그런 아버지가  계셔서 좋겠다.   너희 아버지가 말여. 너 태어나고 지저구 띨 때까지 이른  새벽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이 니 지저구를 빠는 것이었어.  먹는 것은 에미 품에서 먹어도 싸는 것은 애비가 빤 지저구에 싸야 된다고 하믄서.   니가 젖을  다 먹고 나믄  가슴에 안고 토닥토닥,  좀 더 큰 게 등에 업고  과수원에  가고  걸을 수 있게 된 게   손을 잡고  투전 판까지 가드라.  시상에 그런 아버지가 있을까이. 아가. 잊지 말어라잉. 잊지 말어.  우리 아버지도 나를 이뻐하셨지만 그렇게까지는 못하셨어. 허긴 옛날이라."


"아핫. 아버지 따라 투전판 가고 싶다. 심심해."


"뭐라고야."


"할머니, 할머니도  아버지 있어요? "


"그럼  기싰지.  옛날에  돌아가셨지만."


"할머니. 그럼 지금이 옛날 되면 우리 아버지도 돌아가시는 거예요?"


팔월이 고개를 갸우뚱하고 곰곰이 생각을 하다  얼굴 표정이  울상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손가락에 둘둘 말았다가 풀기를 반복했던 토끼풀 꽃의  줄기가 똑 끊어지며 바닥에 떨어진다.  그 순간  식물이  끊어진 것이  거역할 수 없는 어떤 이의 명령인 것처럼   팔월은 대항하듯  운다. 


"앙! 내 반지  끊어졌잖여.   싫어. 싫다고. 죽지 마.  죽는 거 싫어."


죽음의 끝점보다 탄생의 시작점에  가까운  아이는 제 손가락에  끼워져 있다가   끊어져서  땅에 떨어지는  토끼풀 꽃반지에서 죽음을 느낀다.  그 끝점을 어렵게 통과하고 시작점을 지나 겨우  여기 있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는 듯이 그 기억을 떠올리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다. 어려서 개에 물린 기억이 사라져도   개를 무서워하는 어른이 되고 마는 것처럼  각인된 느낌은  사라지지 않고 순간순간 알 수 없는 두려움을 일으키니까.

 

때마침  애야가 빨래동이를 이고  사립문으로 들어온다.     토방에  앉아있는 어머니와 딸을 보고 싱긋 웃다가  악을 쓰며 우는  딸을 보고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다.  귀화는 손녀를 달래다 말고  벌떡 일어나  배가 불러오는 애야가  머리에 인 빨래동이를  내리는 것을 돕는다.  외할머니의 관심에서 멀어진 손녀는 금세 울음을 멈추고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하는 냥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아이고. 이 무거운 것을.  쪼깨씩 들고 다녀.   배도 불러오는디. 이러다 복판 빠지겠다." 


애야는   빨래동이를 내려놓자마자  팔월의  엉덩이에 묻은  흙부터  털어주고  어머니를 보고 웃으며  단정해진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팔월은  언제 울었냐는 듯이 방긋방긋 웃으며 애야에게  말한다. 


"어머니. 할머니가 머리 땋아줬어요. 이쁘지요. 히히."


애야는 고개를 끄덕이고 팔월의 머리를 살포시 누르며 할머니에게 감사 인사를 하게 한다.


"할머니, 고맙뜹니다."


세 여인이 봄 햇살을 받으며   빨랫줄에 빨래를 넌다.  실속 없이  질기기만  지푸라기가  제 새끼를 내어주고 속이 텅텅 빈 채로 저희끼리  울며 끌어안아  만든 새끼줄을   깨끗한 옷, 깨끗한 수건, 깨끗한 양말, 깨끗한  속옷으로 다시 태어나려는 빨래들이 눈물을 흘리며 안아준다.  그 옆에서 멀거니 서있던  대나무  바지랑대가  무거워진 빨랫줄을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올려준다.  축축한  빨래들이  바람에 눈물을 날리며 지전춤을 추기 시작한다.


파란 하늘 아래에서 팔다리를 흔드는 빨래를 바라보는  애야의 마음은 영 개운치 못하다.    애야가  좀 전에 물에 빠진  팔월을  안아 집에 데려와  새 옷으로  갈아입히고  새암에 두고 온  빨랫감을 가져오기 위해  새암에 가서   헌 옷을 빨고 있을 때   개성댁과 대흥댁, 왕심댁이 빨랫감을 들고 왔다.   개성댁이   왕심댁에게 묻는다. 


"형님,  소문 들었어요?"


"뭔 소문?"


"요즘도   38선 근처에서  맨날  총싸움을 한다는 소문이요."


"들었지.  걱정이여.  왜정 때는  그저 일본 놈들만  물러가면  개벽이 될 줄로만 알았는디 인자는 조선 사람들끼리  총쌈을 허다니. 참말로 뭔 일인가 모르것네." 


"어떡해요. 하필 개성 근처 38선이래요.  작년 요맘때  송악산에서 전투를  해가지구  이쪽 저쪽 할 것 없이 군인들이 많이 죽었대요.  이러다 정말 전쟁이라도 나면 어떡하죠."


"그르게 말여. "


"우리 어마니를  개성에서 일루 다시  모셔와야 할까 싶어요."


"어휴, 걱정이것구만. 어머니  모셔와야지.  그나저나 이 만큼이나 살게 된 지 얼마나 됐다고 왜 그러나 모르것네."


개성댁에 한숨을 길게 쉬고 나서 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작은 목소리를 속삭인다. 


"얼마 전에  정애가 왔다 갔어요.  공산주의가 뭔가 한다면서  민족 해방이 어떻구 인민이 어떻구 하면서 다 같이 잘 사는 세상을 만들려면   혁명을 해야 한대요.  글쎄.  그러려면 일본 놈들한테 부역한 친일파들을  먼저 처단해야 한다면서 제 눈을 똑바로 쳐다봤어요.  일본 놈들한테 목재 좀 얻어 판 것 가지고 친일이라니. 원래 누구돈이었는데.   지 어머니가 그 돈으로 저를 찾으러 전국팔도를  돌아다닌 것은 생각도 못하나.  약값은 어떻구요. 서울물을  먹더니 눈빛이  독살스러워졌어요. 어우. 무서워.  형님이  그런 소리하지 말라고 소리를 빽 지르면서  시집이나 가라고 했더니  자기는  인민과  이미 결혼한 몸이래요.  동무는  저렇게 시집을 가서  아기도 낳고  살림 늘려가며 사는데 말이에요.  먹구 살 생각은 안 하구. " 


셋이 동시에 애야를 바라보지만 애야는  갈아입힌  팔월의  옷을   다 빨고  아까 두고 갔던 빨래동이를  챙겨서 꾸벅 인사를 하고 제 집으로 돌아가려는 참이다.


"쯧쯧. 불쌍한 것.  그럴 만도 하지.   일본 놈들한테 끌려갔다 와서  공부 때도 놓쳐 불고. 얼굴도 상해 불고. 그러다 본 게 성격까지 삐뚤어져 버린 것이지. 갸가  어려서부터 얼매나 똑똑한 애기였는지 아는가.  아그들이 애야를  쪼깨라도 놀리면 질로  앞장서서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는디 힘 좀 씨다고 말 못 하는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일본 놈이나 매한가지라고  지보다 큰  사내아이들한테도 호통을 치는 여장부였네.  나는 가가  크믄   유관순 열사처럼  될 줄 알았고만.  어찌다가 그렇게 되었는가.  쯧쯧. 가엽기 그지없당게.  여기 있을 때도  얼굴이 물짜서   구신처럼 밤에만 돌아댕기다가  새복에 와서 여기 와서 그릏게 빨래를 허드만.  그 불쌍한 것이  경성서 취직하고 사람 꼴이 되었지만   인자는  나이까지  먹어서  시집가긴  힘들지.  갸 성질을  감당할 남자도 없겠지만  정애도  그대로   죽었음 죽었지  자기 고집 꺾어가며 예예 허기는 힘든 성질인 게."


개성댁과 왕심댁의 말을 듣던 대흥댁이 조심스럽게 끼어든다.


"저어...... 종도사님 꿈에  상제님이 현몽하셔서  곧  나라의 척추가 부러질 것인 게 단단히 대비 허라고 하셨다는데. 진짜 난리가 날랑가." 


이에  개성댁이  코웃음 치며 정면으로 대흥댁의 말을 반박한다.


"아이구.  형님. 허리가 부러질 것 같으면  송장같이 그냥 집에  누워있어야지  무슨  대비를 해요?   떡목걸이라도 만들어 목에 걸구 방에만 자빠져 있으라는 말인가요.  다 지네발에 짚신 꿰는 소리예요.   이 보릿고개에  한 끼 한 끼가  천벌 같은데 허리가 부러지면  어떻게 살라구요.   조심하라는 것도 아니고 대비를  하라니.  그런 말로 사람들을 홀려서   교당에  나오게 하려고 하는 소리겠죠.   어떻게 해서든  굴비  엮듯이  한 명이라도 더 엮어  좌판에  줄래미 세워서  저희들 교세 자랑하구  재물도  걷구요.  뭐 그런 거 아니겠어요. 그리고 보천교 갈라져서  망한 것이 언젠데  여태 붙잡고 있는 거예요? 죽은 아들 불알 만지듯이."


"상제님의 뜻을 그르케 곡해를 헌가.  교당 안 나와도  되고  교당 나와도  재물  내라고 안혀.   난리가 나믄  한 목심이라도 더 살라고 그러는 거 어니것어. 한 목심 한 목심이 다 중허니까."


"목숨이 중하다고요? 살라구요?  형님. 보천교 따르다 죽은 사람이 많을까요.  산 사람이 많을까요.  끌려가 죽고  병 걸려 죽고  횟병 걸려 죽고.  그리고  보천교가 독립운동해서 광복이 됐나요?   미국이 원자 폭탄 떨어뜨려서  일본이 항복을 한 것이지.  순진한 사람들 꼬셔서 개벽 바람인가.  개뼉다구  바람인가를 넣어가지구.  저를 보세요. 제가 증인이에요.   개성서 아들 낳고 딸 낳고  잘 살다가  서방님  개벽 바람에   재산을 다 팔아 교단에 바쳤더니  자식들 다 죽고. 서방님 죽고.  어휴."


개성댁이  한참 목에 핏대를 세우다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분풀이  방망이질을 하더니  빨랫감을 챙겨서 집으로 간다.   물기를 짜지 않은  빨래가 무거워  빨래동이를 연신  고쳐 잡으며 운다. 


개성댁이  원천댁 집에  얹혀 산지 일 년가량 되었다.   개성댁과 대수가  목재 사업를 하여 번 돈으로 큰 집을 사고 자식들까지 불러모아  살림을 합치는 것을 본 개성댁의 친정어머니는 딸이 후실로나마  자리를 잡은 후에  고향, 개성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개성댁의 친정어머니가 개성에 돌아가자마자 대수는  어린 과부를 임신시켜 첩으로  들였다. 


"너는 아주 개놈이야. 아무 여자나 집에 들이니."


"허허. 이 사람이...  아무 여자가 아니여.  내 애를 뱄어. 그리고 황진이 고향에서 온 사람이 그런 말을 허면 못쓰지."


"미쳤어. 황진이는 송도삼절이야.   어디에  황진일 붙이는 거니?"


"그리서  자기는  절개의 고향, 송도 출신이라는 거여. 근디  자네는 첩 아닌가?   양길이 엄마가 이런다믄 몰라도 자네가 그런 말 허는 것은 좀 거시기허네.  젊고 능력 있는  남자가  열 여자 마다하것는가."


"뭐?  첩이라고?  내가 첩이니?  그래 첩이라 치자.  당신 아들들 내가 길러냈어.  형님이 정애 찾으려고 살림살이고 자식이고 다 팽개치고 전국을  헤집고 돌아다닐 때부터  고아가 된 아이들을  먹이고 입혀서 키웠다고.  그러니까 양길이가 날더러  작은 어마니라고 부르는 거야.  그리고 누구 밑천으로 장사를 시작했고 이 살림살이는  어떻게  불렸니?   형님도 그러니까 나를   한식구로 인정하는 거고."


"그러면 그 사람들이랑  같이 살면 되것네. 한 식구끼리 말여   형님 동생. 작은 어머니 불러가면서.  자네한테 나가라고 안 해.  나는 인자 한 식구 아니어도 좋은 게  어리고 이쁜 여자랑 살고 싶어. 가가 애를 가졌다니까.  자네는 할 수 있어?  늙은 여자들은  말여.  아무리 분을 발라도 마른 뽕잎 냄새가 나.  쉰 낸가?  눈먼 누에도 안 먹을 걸." 


"......"




개성댁은 눈물을 닦으며   혼잣말을 한다. 


'내 신세가 첩첩산중인데 누굴 걱정하는 거야.  전쟁이 나든가 말든가.  전쟁 난다고 우리  늙은  어마니를 어떻게 하겠어. 하이 참.  고것이 아이만 안 가졌어도 어떻게든 버텼을 텐데.  내 자식 하나만 있었어도 이런 대우는 안 받을 텐데.    남의 자식이 무슨 소용이람 애써  기르고 가르쳐놨더니  다들 자기 어머니밖에 모르잖아. 내 새끼 하나만 있었어도  영감 불알은 뺐겼도 안방은 순순히 안내줬지. '


그때 교복을 입고 학생모를 쓴  양길이  개성댁을 부르며 뒤에서 뛰어온다.  개성댁이 눈물을  얼른 닦으며  뒤돌아 양길을 바라본다. 


"어마니." 


"오냐.  우리 막내아들.  이제 오는구나. 학교 잘 다녀왔니?"


"네. 어마니."


개성댁이  읍내 집에서  연월리로 피난을  온 후터  양길은  작은 어마니를 그냥 '어마니'라고  부른다. 원천댁과  개성댁,  어머니와 어마니, 처와 첩이  한 집에서 사는 것은  그야말로 언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는 전장에서 사는 것차럼 아슬아슬한 일이다.  한 남자에게 버림받은 어머니와 어마니는  둘 만이 아는  애참한 사정을 서로에 향한  적객심으로 드러냈다.  피차 갈 데 없는 처지임에도  시간이 갈수록  험악한 말로 할퀴고  총탄같은 눈빛을 쏘아대는  날이 늘어가고 있었다. 양길은 두 어머니의 비위를 맞추느라 전전긍긍하면서도 별로 심각하게 여기진  않았다.  뭐 어쩌겠느냐. 힘들어도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렇게 사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없지 않느냐라는 태도였다.


"어마니. 우셨어라? 어머니 때문에 우셨어라?"


"아니야. 울긴 왜 울어?"


"눈이 빨간대요. 왜요? 그럼 아버지 때문에 우셨어라?"


"아니야. 아니야. 개성에 계신 할머니 때문이야. 38선에서 총싸움이 그치질 않잖니?" 


양길이  교복 옷소매를 당겨 개성댁의 눈물 자국을 닦아주며  푹 꺼진 양볼을 두 손으로  살포시 감싼다.  열다섯의  남자가  쉰 살이 되어가는  여자의 얼굴을  갓 피어난 목화꽃처럼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어마니. 잘 들으셔라. 어마니는 누가 뭐래도  양길이 어마니여라.  어머니, 아버지가 뭐라 하든 간에  저한테는 그냥 어마니여라."


"알겠어. 양길아. 어마니도 명심할게."


"어마니. 방학하면 기차 타고 개성 할머니 집에 갈까요?   아버지한테 말씀드려서 여비를 많이 타가고 올텐게요. 아마  아버지도 어마니가 개성 가신다고 허면 좋아하실 걸요.  허허.  우리 같이  손잡고  선죽교도 가고 만월대도 가고 송악산에도 오르고요.  어마니 고향을 한 번도 못 가본 아들이 시상에 어디 있것어요."


"그러자꾸나. 같이 가자."


"어마니. 빨래 주세요. 제가 들고 갈게요."


"아니야. 옷 버려. 어마니 괜찮아. 안 무거워.'


어느새 개성댁보다  키가 커버린 양길이  빨래동이를 옆구리에 낀다.   아들에게 빨래동이를 넘겨준 개성댁이 무척 홀가분하다는 듯  두 팔을 위로 쭉 펴고 크게 기지개를 켠다.




더 있다 가라고  청하는 딸과 손녀를   물리치고  애야의 집에서 나온 귀화는 언덕 위 신당으로 향한 꼬부랑길을 오른다.  환갑이 된  귀화의 머리엔  토끼풀 화관을 쓴 듯이  뿌리부터 오롯이 흰머리가 자라나고 있다.    길고 가는 눈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맑고 아련하며 나이가 들어가며 성녀와 같은 고귀함이  깃들어가고 있다.  그 두 눈으로 얼마나 많은 이의 눈물을 대신하여 흘렸던가.   슬픔이 넘쳐흐른  골짜기 같은  서너 갈래의 눈가 주름이 거의 귀에 닿을 듯 깊고 까마득하다.    뒤를 돌아 언덕 아래 연월리를 바라본다.  그리고 이십여 가호 남짓한 집 중에서 딸의 집 지붕을 찾아  응시한다.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니  식구들의  밥을 짓는 딸과,  딸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트집거리를  찾고 있을  손녀의 모습이 떠올라 뭉클하다. 


신당에  들어간 귀화는  두 눈을 부릅뜨고 죽은 자의 삶이 낱낱이 기록된  일생부를 보며  심판하는  염라대왕이 그려진   탱화와 갓 태어난 아기를 안고 있는 삼신할머니 탱화를 번갈아 바라본다.  그리고  탱화 앞에 놓인  청수잔에 담긴 물을 차례차례 퇴주그릇에 부어버리고 새로 길어온  청수를  정성스럽게 올린다. 


'염라대왕님. 삼신할머니.  저는 인자 두 분을  원망허지 않습니다. 육십갑자를 돌아 이 자리에 와서 서 본 게   흘려보낸 눈물이  산 아래에서  꾼  꿈같이 느껴집니다.   왜  사람들을  세상에 보내놓고  다시 데려가냐고  원망허고  그것을 막지 못한 나를 책망 허느라  보낸 세월이 대부분인 어리석은 꿈이었지만요.   정신없이  왼쪽으로 기울어졌다가 반대로  고꾸라졌다 다시 오른쪽으로 일어나  서본 게  이제야  사람 사는 것이 돌고 도는 것인가 보다 헙니다.  핏줄도  이웃도  그리운 사람도  그렇게  돌다가  본 게  바퀴가 지면에  닿는 것처럼   잠깐  만났다가  다시  헤어져하는  것인디  그것을  모르고  어르신들을  원망만 한  철없는  제자를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흐음.  이런 읍소가 그냥 나오는 것을 본 게 저도 북망산 갈 날이 얼마 안 남았는가요.  부디 제가 올리는 청수를 받으시고 저를 만나시거든 너그럽게  저의  죄를  심판해  주십시오.  주시는 것도 거둬가시는 것도 어르신들의 몫이니  부디 뜻대로 하십시오. '




어둑어둑한 밤이 되어서야 과수원에서 돌아온 정용이  신발에  묻은  흙을 털며 토방에 오른다.   아버지가 일터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다   화가 나버린  팔월은 무표정으로 마루에 오도카니 서있다.  토방 위에 아카시아 잎사귀들이 우수수 떨어져 있는 것을 보니 늦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꽤나 애를 태운 기색이다.  정용이 검게 그을린 큰 얼굴을  팔월의  얼굴에  가까이  갖다 대며  묻는다. 


"딸, 아버지보고  인사 안 할 거여?"


"아버지  왜 이렇게 늦게 왔는데?  막걸리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영팔 아재 집에서 막걸리 먹고 오느라 늦게 온 거지?"


"아니여.   여태 일 했어.  일손이 딸린 게. 다들 자기네 집 보리 타작하고  못자리  허느라  바쁜데 누가  품삯 조금 받고  넘의 과수원에서 품팔이를 허것냐.  그리서 아버지가 일을 많이 했지.  그리야 우리 팔월이 신도 사고  팔월이 동생 옷도 사고  어머니 미역도 살 거 아녀.   배가 고파서 집에 오는 길에  남은 막걸리 털어 넣고 온 거여. 하아."


정용이  친구집에서 막걸리를 먹지 않았음을 증명하듯 팔월에게  하아 입김을 내뿜자   팔월은  아버지의 변명이 마음에 들었는지  변명하는 아버지가  마음에 들었는지  엉덩이를  들이밀며  새초롬하게 안긴다.   부엌 문간에서 서서 미소를 띤 채 부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애야가 바싹마른 깨끗한 수건과  속옷을  건네주자   정용은  그것들을 건네받으며 애야의 엉덩이를 툭 치고 뒤뜰로 간다. 뒤뜰에서  목욕을 마치고   늦은 저녁을 먹는 동안  팔월은 옆에 앉아  새암 빨래터  물에 빠진 이야기, 할머니가 머리를 땋아준 이야기를  쉴 새 없이 조잘댄다.  밥을 먹으며  딸의 수다에  건성으로라도  맞장구를  치려면  코로 밥을 먹어야 할  정신없는 상황에서  정용은  졸고 있다.  팔월이 아버지가 그대로  누우면 머리가 닿을 곳에  베개를  놓자   딸을 얼싸안으며  밥상 옆에 쓰러진다.  눈이 말똥말똥한 아이는 코를 고는  아버지의 코를  잡았다놓고   수염이 자란 거슬거슬한 턱을 문지르다  아버지의 겨드랑이 아래서  눈을 감고 잠을 청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애야는 조용히 일어나 먹은 저녁상을  부엌으로 내간다.  깜깜한  밤이다.  등잔을 밝히고  먹은 그릇을   닦으며 낮에 새암에서 빨래를 하는  여인들이 나눴던 이야기들을  떠올린다.    그것은 분명히 전쟁과 난리였다.  며칠 전에  다녀간 정애도 같은 말을 했다.  삼 년이나  잘 다니던 방직 공장을 그만두고  힘이  배는 더 들어가는 벽돌 공장에  취직한 후부는 정애는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얼굴의 흉터를 완장처럼  당당하게 드러내놓는 것으로 시작하여  동경대전을 펼치고 손으로 한글자 한글자를 짚어가며  개벽이 가까이 오고 있다고 취한 듯이 말했다.  우리 선조들은 개벽 세상을  이룩하는 것에 실패하여 나라를  빼앗겼지만  넓은 세계엔  우리가 꿈꾸었던  세상을   혁명으로  이룬 나라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나라가 우리를 돕고 있으니  우리도  곧 해방이   될 것이라고 했다.  당분간  전쟁과 혼란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인민을 위한 국가를  세우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며  낡은 동경대전을 애야에게 돌려주고  경성의 새 이름, 서울로 돌아갔다. 


애야에게 전쟁이란,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전쟁 뒤에 어떤 대단한 세상이 생겨날지 모르지만  딸과 남편 그리고 어머니가 죽을 수도 있다면 새로운 세상이 온다 해도 무슨 소용인가.  애야는 광에서  보리를  꺼내  큰 솥에  넣고 볶은 후에  아침에 일어나 식은 보리를 갈아 가루를 만든다.  

전란을  피해  산 중에서  산사를 옮기기 전에   애야의 어머니는  집안의  곡식을 모두 볶은 뒤 맷돌로 갈아 가루를 만들었다.  그리고  몇 날며칠  그 가루만을  한 움큼씩 입에 털어 넣으며  걷고 또 걸어  위험이  적은 곳을  찾았다.  애야도 그렇게 할 것이다.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혹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산속  어머니처럼  가족들의 입에 곡식 가루를 넣어주며  깊은 산속, 안전한 곳을 찾을 것이다.  애야가 아는 깊고 높은 은밀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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