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마를 타고 목적지로 가는 중입니다.

by 은령

오래전, 저는 꿈을 한 번 이룬 적이 있습니다. 어릴 적부터 바라던 항공기 객실 승무원이 되었으니까요. 비행기에 몸을 실은 지 어느덧 이십육 년. 오늘도 승객들을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모셔다 드렸지만, 저는 아직 비행기에서 내리지 못했습니다. 아마 나의 목적지에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실현된 꿈은 삭아가기 시작합니다. 옷장 속 샤넬처럼 시나브로 곰팡이가 피어갑니다. 하지만 곰팡이 핀 샤넬도 여전히 샤넬입니다. 함부로 내다 버릴 수 있을까요. 다행히 에르메스는 괜찮습니다. 온습도 관리가 철저한 매장에서 잘 보관하고 있을 테니까요. 언제든 돈만 내면 데려올 수 있습니다.

샤넬에만 곰팡이가 핀 건 아니었습니다. 오랫동안 살림하고 일하느라 돌보지 못한 제 안은 이미 해져 있었습니다. 바스러질 것 같은 수면과 불면의 틈에서 매일 꿈을 꾸었습니다. 어느 늦은 밤, 취면을 위해 펼친 책에 ‘꿈은 내면의 내가 보내는 목소리, 글로 남겨야 한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전화 메시지를 받아 적듯이 녹음한 꿈을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전화기를 잃어버려 당황스러웠던 꿈이, 전화를 받는 꿈으로 바뀌었습니다. 신기하게도 제 자신과 통화가 시작된 것이지요.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평소에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약속 시간 지각과 대화 중 딴짓이 그 원인이라도 생각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그 사람 의견에 피드백을 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저는 그 기회를 이용해 '넌 미성숙하다. 책임감이 부족하다'라는 취지의 잔인한 피드백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후련함도 잠시, 아주 찜찜한 기분으로 잠이 들었는데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집인데 분명 내 집이다. 거실 한가운데 놓인 테이블이 검은 천에 덮여 있다. 검은 천을 들춘다. 테이블 위에는 삼각자, 직선자, 곡선자, 각도기 등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내 보물 같다. 이 따위 것이 보물이라니. 화가 난다.”

녹음한 것을 받아 적으며 소름이 돋았습니다. 제가 제 나름의 잣대(Ruler)를 가지고 그것을 보물처럼 여긴다는 사실을, 꿈이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잣대로 무엇을 했을까요. 사람을 재단하고, 인생의 치수를 쟀을 것입니다. 이후 그 사람에게 진심으로 사과했지만, 지금도 미안하고 부끄럽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 혹시 인상 깊거나 반복되는 꿈이 있다면 꼭 글로 써보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나쁜 꿈은 없습니다. 당장 몇 개 정도만 적어도 심상치 않다는 느낌이 들고, 계속 쓰다 보면 꿈이 먼저 말을 걸어옵니다. 기억 창고의 유물이 되기 전, 글로 정리하면 보물로 됩니다.

꿈과의 대화, 저는 그것을 ‘꿈내림’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이후부터 글을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여러 이미지들이 꿈으로 파고들어 제 안에 음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연재 중인 소설 『산』도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높은 산, 저수지, 작은 마을, 공동 우물, 아름드리 뽕나무 그리고 어머니.

필력이 부족해 썼다 지우고, 고치고 또 지우는 푸닥거리를 반복하다가 작년엔 마침내 브런치에 깃발을 꽂고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첫 권은 다 썼고, 두 번째 권은 꿈이 보관 중입니다. 노력을 들여 꺼내 쓰기만 하면 됩니다. 작법을 배운 바 없어 저만의 방식으로 쓰고 있지만, 요즘은 시 공부와 소설 쓰기 사이에서 작은 날갯짓을 하고 있습니다. 시차가 있어 필력은 천천히 도착할 예정입니다.


며칠 전 ‘브런치를 통해 이루고 싶은 작가의 꿈’이라는 이벤트 광고를 보고 고민에 빠졌습니다.

1. 내게 브런치는 무엇인가?

2. 무엇을 이루고 싶은가?

3. 작가의 꿈은 무엇인가?

그리고 겨우 오늘에서야 답을 할 수 있었습니다.

1. 브런치는 비행기입니다. 세속의 욕망을 태운 소중한 애마입니다.

2. 저의 이야기가 독자에게 가닿기를 꿈꿉니다. 어딘지는 가봐야 알겠지만, 목적지로 가는 중입니다.

3. '꿈을 쓰는 섹시한 애마 부인 '이 되는 것이 작가의 꿈입니다. 그리고 브런치는 에르메스를 현실로 만들어 줄 드림라이너가 될 것입니다


어디에 착륙할지 모르지만 언제나 꿈과 함께하려 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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