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샘에서 물을 길어 환한 데 쏟아붓는 두레박
슬픔이여, 안녕 / 201211 / 黒川温泉
아소산이 품어내는 유황냄새가 천지에 가득하고 온천에서 솟아오르는 증기가 차가운 공기 속에서 망령처럼 너울대는 이곳, 초겨울 구마모토는 내가 상상하던 세상의 끝의 풍경이었습니다. 구로카와 온천을 따라 흐르는 강 상류에 위치하고 있는 료칸 호잔테이에 들어서 창을 열고 내려다본 검은 물결은 오랜 침묵처럼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살아가면서 종종 끝이 없어 보이는 밤, 불확실성의 그림자가 크게 드리워져 있어 지금 겪고 있는 도전의 무게가 도저히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밤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 어둠 속에서 막막하여 감히 손을 뻗어 더듬어 볼 용기조차 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차라리 홀로이 맞는 깊은 슬픔이 다정한 친구처럼 말을 걸어올 때가 있습니다. 부드럽게 반짝이는 슬픔이라 이름 지워준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만나게 됩니다. 말갛게 씻겨진 얼굴로 조용히 눈을 감습니다. "슬픔이여... 안녕!"
"Bonjour Tristesse"는 프랑수아즈 사강(Françoise Sagan)의 데뷔 소설입니다. 사강은 18세의 어린 나이에 1954년에 출판된 "Bonjour Tristesse"를 썼는데, 소설 제목은 영어로 "Hello, Sadness"로 번역되고, 국내에서는 『슬픔이여, 안녕』으로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그녀는 이 작품으로 '사강신드롬'을 일으키며 국제적인 호평을 받았습니다.
이 소설은 아버지와 그의 연인과 함께 프랑스 리비에라에서 여름을 보내는 세실이라는 17세 소녀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이야기는 주인공 세실의 내면세계를 통해 실존주의적 주제를 반영하며, 삶의 의미와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품고 있던 전후 젊은 세대가 직면한 실존적 위기를 서정적인 산문, 생생한 인물 묘사, 그리고 그것이 제기하는 철학적 질문으로 이끌어 들이고 있습니다. 복잡한 감정과 관계를 포함한 세실의 성장 경험이 서사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이 작품은 젊은 세대 사이에서 전후 프랑스의 실존주의적이고 쾌락주의적인 정서를 담고 있으며, 전후 시대의 젊음, 사랑, 실존주의, 도덕적 모호함 등의 주제를 탐구한 점에서 프랑스 현대 문학의 고전으로 평가됩니다.
『슬픔이여, 안녕』은 인간의 정신을 깊이 파고드는 문학적 걸작으로, 존재에 대한 우리 자신의 투쟁과 자기 이해 추구를 반영합니다. 이 소설은 독자, 특히 젊은 세대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신선하고 솔직한 서술 스타일을 선보였기에 그 당시 문단에 꽤나 신선한 작품이었고, 내면에 대한 탐구와 젊은 시절의 반란에 대한 묘사는 후속 문학에 영향을 미쳐 문학적 정경에서 중요한 작품이 되었습니다. 이후 이 소설은 오토 프레밍거 Otto Preminger 감독에 의해 미국에서 1958년 동명의 영화로 성공적으로 각색되기도 했습니다. 영화는 사강의 이야기와 주제를 더욱 대중화하여 문화적 영향력을 확고히 했습니다.
미로 같은 삶의 여정에서 종종 끝이 없어 보이는 밤의 어둠 속에서 비틀거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직면한 도전의 무게가 극복할 수 없다고 느끼는 순간, 불확실한 강물에서 표류할 때, 우리는 독특한 동반자인 슬픔을 만납니다. 잊힌 친구처럼 이 슬픔은 초대받지 않은 채 찾아오지만, 지친 영혼을 달래주는 묘한 위안과 친숙함을 가져다줍니다.
“나를 줄곧 떠나지 않는 갑갑함과 아릿함,
이 낯선 감정에 나는 망설이다가
슬픔이라는 아름답고도 묵직한 이름을 붙인다.”
세실처럼 우리 역시 내면의 이 수수께끼 같은 동반자를 마주하게 됩니다. 어둠이 압도적으로 느껴질 때에도 감히 자신의 감정의 깊이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성찰의 여정 동안입니다. 그 고독한 순간, 우리는 '슬픔'이라 부를 수 있는 또 다른 모습의 우리 자신을 만납니다. 사강의 세실처럼 우리 역시 성찰의 순간에 자신만의 슬픔의 눈동자를 들여다봅니다. 그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영혼의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슬픔은 우리가 흔히 두려워하는 억압적이고 무거운 마음의 우울이 아닙니다. 대신, 그것은 우리를 감싸고 가장 깊은 생각과 감정을 비추는 거울을 제공하는 부드러운 존재입니다. 거울 표면 너머 깊이를 들여다볼 때, 무언의 영혼을 이해하는 듯한 고요한 시선이 우리를 맞이합니다. 그리고 "슬픔... 안녕하세요!" 마치 손을 내밀어 인사하듯 속삭입니다.
바로 실존적 질문을 직면하는 순간입니다. 이 순간, 우리는 존재의 본질, 투쟁의 목적, 연민과 감정의 중요성에 대해 숙고하게 됩니다. 슬픔은 내면의 오디세이에 대한 안내자가 되어 자신의 생각과 감정의 미로를 통해 인도합니다. 그것은 인간성의 복잡성에 직면하고 자기 내면에 있는 그림자를 인정하도록 격려합니다. 슬픔은 부드럽고 조용한 방식으로 우리의 가장 깊은 내면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 내면세계를 더 깊이 파고들면서 슬픔은 우리의 적이 아니라 삶의 풍요로운 태피스트리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는 우리가 심오한 감정적 깊이를 가질 수 있고, 우리의 나약함은 인간성에 대한 증거라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슬픔은 우리에게 이러한 복잡성을 받아들이고, 가장 깊은 자아와 친구가 되고, 자기 발견의 과정에서 위안을 찾도록 가르칩니다.
빛나는 슬픔과의 만남은 절망의 나락으로 빠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수용을 향한 여정으로 이끕니다. 가장 어두운 순간에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희미한 빛이 있고, 더 커다란 이해의 불꽃이 존재하며, 커다란 존재와의 심오한 연결이 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이 빛나는 슬픔의 사랑스러운 포옹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서 우리는 가장 심오한 실존적 질문과 우리 영혼의 맑음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끝이 없어 보이는 밤, 외로운 투쟁이 극복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일 때, 마음속 깊은 곳까지 시험을 받습니다. 이때는 피할 수 없는 두려움, 의심, 한계에 직면하게 됩니다. 밤이 아무리 길어도 태양은 떠오를 것입니다. 가장 순수한 형태의 희망은 가장 어두운 시간 너머에는 깨어지기를 기다리는 새벽이 있다는 믿음입니다. 밤이 아무리 깊어도 해는 다시 뜨고 새로운 날이 시작될 것이라는, 우주의 모든 것은 순환 속에 존재하며 이에는 한치의 어긋남에 없으리라는 믿음 말입니다.
인생은 밤과 새벽, 어둠과 빛으로 가득 찬 여행입니다. 가끔 어둠을 뚫고 나가는 벼락이 되겠습니다. 또 길을 밝히는 온화한 달빛이 되기를 바랍니다. 달도 태양도 모두 허용하는 하늘에 가 닿기를 기도하겠습니다. 밤을 지나 새벽이 오기까지, 붉은 석양이 지고 캄캄한 밤이 되고 총총히 별이 뜨기까지 그 모든 시간을 지켜보겠습니다. 어둠도 빛도 모두 허용되는 삶이기를 바랍니다. 기쁨만이 아니라 슬픔과도 기꺼이 만나 인사하고 가슴 열어 다정히 안아보겠습니다. 역경과 순경이 함께 엮어내는 우주의 아름다운 춤사위를 바라보겠습니다. 역경은 가장 심오한 통찰력을 끌어내는 어두운 샘입니다. 어두운 밤의 가장자리에 서서 그 깊은 곳을 바라보며, 그곳에서 길어낼 시원한 샘물을 만나, 비로소 나 자신이 세상의 두레박이었다는 빛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어떤 밤은 새벽까지 깨어 있다, 때로
달이 해 뜨기까지 떠 있듯이
어두운 샘에서 물을 길어
환한 데 쏟아붓는, 두레박이 되어라
لالالدین محمد رومی 잘랄루딘 루미 (1207 ~ 12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