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세상은 공식, 특히 함수와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정해진 값을 넣으면 어떤 결과 값이 나오는 것. 원인이 있다면 결과가 있는 것. 그것이 세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원인을 잘 조정하면 원하는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단지 내 시야가 좁아서 함수의 여러 독립변수와 그 변수가 함수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내지 못한다 생각했다. 그래서 세상을 조금 더 알고, 변수 값을 넣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게 원하는 결과를 가져다주길 바랬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 생각이 줄어들었다. 원인과 결과에 대한 생각은 예전 뉴턴 역학 때나 통하던 이야기랬나 ? 양자역학적 세계는 확률적인 세계여서 모든 일은 확정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확률이라고 한다. 어차피 내가 이뤄내는 성과가 확률이라면, 변수를 보는 노력도 변수를 증가시키려는 노력도 의미 없는 것이 아닐까. 세상은 어차피 확률인데. 운이 더 중요한데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며칠 전 고등학교 진로 강의를 갔었다. 사실 진로 강의는 이전에도 많이 했었지만, 회의를 느끼고 이번이 마지막이란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진로 강의를 듣는 학생들은 생각보다 진로에 관심이 없었고, 나 역시도 우리 직업이 흥미 있는 직업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여기에 보통의 진로 수업은 정규 수업 외의 시간에 배치되어, 학생들에게 추가 부담이라는 짐을 안길 뿐이었다. 그래서 이전까지의 강의는 학생의 삼분의 일 정도는 잠을 자곤 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강의를 하는 나도 이번이 마지막이라 생각해서, 내 직업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닌 내가 학생들 나이라면 나와 같은 나이의 사람에게 무엇을 가장 듣고 싶을까 생각해서, 다른 이야기를 즉석에서 생각나는 대로 했다. 남자로서 인생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연봉은 중요하고 그 연봉을 사회에서 대충 얼마 정도 받을 것인지, 집이 비싼데 이 부담이 아직까지는 남자에게 있다던지, 대학교를 좋은 데 나왔더니 인생에서 이런 게 도움이 되었다던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들을 이야기했다. 사실 나의 직업과는 크게 관련이 없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 명도 잠을 자지 않았다. 오히려 수업이 끝나고 더 물어보기까지 하였다. 기분이 좋았다 이렇게 끝나는 강의도 있다니. 그리고 집을 오며 생각해 봤는데, 이건 컨텐츠의 차이가 가져온 효과라고 생각했다. 확실히 학생에게 더 선호가 되는 주제가 있었다. 주제의 선택 이렇게 결과를 많이 바꾼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상은 아직 원인이 바뀌면 결과가 바뀌는 곳인가 보다.
이걸 깨달은 후 생각이 많아졌다. 어느 정도는 될 대로 되라는 식의 나의 사는 방식은 지금 이 삶에 기여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삶에 조금 더 좋은 원인을 주면 결과가 바뀔 것이란 생각에 지난날에 대한 후회와 앞으로는 더 잘 살고 싶다는 다짐을 하였다.
요즘 나오는 흑백요리사에는 파인다이닝 셰프가 많이 나온다. 파인다이닝은 아주 작은 디테일까지도 신경을 써 요리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요리에 있어 재료의 굵기가 일정하고 얇다는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차이를 내고 그 차이로 인정을 받고 그 차이로 대가를 더 받는다. 나는 삶이 대충대충 돌아가는 것에 비해 파인 하게 돌아가는 것이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였었지만, 사실은 그런 픽셀 하나하나를 고쳐 나가는 것이 원인이 되어 결과 차이를 만들고, 그것이 삶이 주는 대가를 달리 하는 것이 아닐까.
세상엔 아직 원인에 의해 결과가 지배당하는 부분이 존재하는 것 같다. 좀 더 파인한 원인을 위해 이젠 좀 더 신경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