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 휑한 눈빛과 마주쳤다. 그 옆에 목발 두 개가 놓여 있었다. 하늘공원 갈대밭에 앉아 있는 그 청년을 바라보니 문득 아픈 시간을 견뎌냈던 내 젊은 시절이 생각나서 혼란스러웠다. 남편이 입대 후 사고를 당해 부산통합병원에 입원하고 치료를 받는 동안 희망을 잃었던 눈빛을 그 청년에게서 보았다.
20대 중반 나는 보랏빛 환상 속에 빠져 있었다. 친구들처럼 달콤한 신혼생활을 상상하였지만 반대로 흘러갔다. 논산훈련소에서 부대로 배치된다는 편지가 왔다. 이등병으로 휴가 나와서 “충성!” 하며 손 경례를 붙일 씩씩한 남편의 모습을 꿈꾸었다. 하지만 하늘이 무너지는 캄캄한 상황이 앞을 가로막았다. 행복한 미래를 꿈꾸었는데 현실은 굴절된 모래성처럼 흘러내렸다. 부모와 형제, 처자의 집으로 돌아온 온 남편은 절망의 늪에서 땅이 꺼리라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동네에서도 소문날 정도로 건강한 몸이 재산이었는데 육신의 상처를 앓는 동안 정신적으로도 무력해졌다. 틈만 나면 나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당신이라도 새 출발 해서 좋은 사람 만나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진심이냐고 다그쳐 물으면 대답도 못하면서 담배 연기만 휴, 밖으로 뿜어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처지에 놓인 나는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웠다.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고 생때같던 남편을 잡았다는 무성한 소문 때문에 문 밖 출입도 못 했다.
공원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 지나간 시간을 되새겨 보았다. 끝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터널 속을 걸으며 용케도 여기까지 왔다. 내가 살아온 지난한 삶을 남편이나 자식들은 속속들이 알지 못한다. 얼굴에 덮어쓴 주름은 밭이랑처럼 골골이 파였다. 이런 마음을 달래려는 듯 산들바람이 부드럽게 볼을 스치고 지나간다. 가을바람에 몸을 실고 갈대들이 춤을 춘다. 알 수 없는 측은지심으로 맞은편에 앉아 있는 청년에게 자꾸만 마음이 쓰인다.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도 비슷한 사람을 보면 환영처럼 그날이 스멀거린다. 남편과 함께 입원했던 부상병들이 팔, 다리가 잘렸지만 삶에 대한 애절한 눈빛이 너무나도 처절해 보여 지금까지 잊을 수 없다.
잔디밭에 간식을 꺼내놓고 청년에게 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는 못 본 척 먼 산을 보고 있다. 내가 옆으로 오라고 손짓하니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간식 봉지를 풀어놓고 그에게 다가가 물병을 건네주니 두 손으로 받아 마신다. 그의 얼굴에 가을 햇살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겨우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빵을 나누어 먹는 동안 서로 편해진 사이로 발전한 것일까. 그는 손으로 의자를 톡톡 두드리며 눈빛으로 말을 걸어왔다. 내가 몇 마디 물어보았다. 청년은 쑥스러운 듯하며 대답을 했다.
“서른다섯 살이고요. 결혼을 앞두고 교통사고로 목과 허리를 다쳤어요.”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세월이 흐르면 잊히는 줄 알았는데 그 기막힌 순간이 훅 밀려든다. 남편이 이병 제대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순간이 떠올라 청년에게 용기를 내라며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이런 내 마음과 이심전심으로 소통이 되었을까. 그는 엄마가 차로 여기 데려다 놓고 출근을 했는데 퇴근하면 올 거라며 먼 산을 바라보았다. 어떤 이야기도 약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지만, 살다 보면 누구나 어려운 일을 당할 수 있다며 남편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리고 용기를 내라고 했다. 그의 마음속으로 밝은 빛이 스며들었는지 가슴에 숨겨두었던 이야기도 꺼냈다.
청년은 몇 달 전만 해도 희망에 부풀었고, 여자 친구와 신혼살림을 함께 장만하고 아담한 방도 구해놓았다고 했다. 이제 회복할 수 없는 전신마비가 와서 여자 친구를 자유롭게 보내주고 싶다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까움이 가득 찬 눈빛이다. 어쩌면 내 남편처럼 여자 친구를 간절히 붙잡고 싶어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 듯했다. 친구한테도 털어놓지 못한 이야기를 처음 보는 나한테 왜 했을까. 다행히 그를 짓눌렀던 슬픔이나 상실감도 해소되었는지 붉게 물든 가을 산을 눈빛으로 읽어 내려갔다.
그때였다. 중년 여인이 숨을 헉헉거리며 달려왔다. 초조한 눈빛으로 청년의 표정을 살폈다. 젖먹이처럼 불안해 보였는데 환한 얼굴을 보니 내 마음도 밝아졌다.
몇 시간 동안 눈빛으로 마음이 통하는 소통의 강을 건널 수 있었다. 남편도 나를 붙잡고 싶어서 떠나라고 했을까. 일면식도 없던 사람끼리 눈빛 하나로 수천 마디의 말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떠나는 청년에게 희망을 놓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세 사람은 눈빛으로 서로의 마음을 전하고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