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 소나무
눈 만 뜨면 앞산 뒷산에 소나무 군락지가 있었다. 파란바늘 같은 잎과 나무의 몸피는 붉은색을 띠고 하늘을 향해 솟아올랐다. 창경궁을 산책하다 본 소나무는 특이했다. 이 소나무들은 고목으로 자라는 동안 일제강점기 36년, 한국전쟁과 화재까지 나라의 파란만장했던 현장을 고스란히 지켜보았을 것이다. 총알이 관통한 상흔처럼 상처가 있고 가지가 위로 성장하지 못하고 옆으로 뻗어나갔다.
창경궁은 1484년에 성종이 어머니와 할머니를 곁에 모시고 싶어, 자신이 머물던 창덕궁 옆에 세웠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동·식물원인 창경원으로 격하된 민족의 아픈 역사가 숨어 있는 곳이다. 얼마 전, 일제총독부가 끊어놓은 율곡로를 서울시에서 다시 복원하기 위해 왕복 6차선으로 도로를 넓혔다. 터널을 만들고 위를 흙으로 덮어 지형을 복원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런데도 상처 난 소나무들을 보니 얼룩진 우리의 역사에 마음이 아프다. 또한 그 시절 소나무에 얽힌 사연들이 서명하게 떠오른다.
어릴 적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마을에 살았다. 기름이 떨어지면 아버지가 산에서 관솔을 잘라 왔다. 도끼로 잘게 토막토막 썰어서 안방과 마당에 불을 붙여두면 집안이 환했다. 청솔가지는 밥을 짓거나 소죽을 끓일 때 불이 잘 붙지 않아 연기로 눈물을 흘렸다. 일 년에 한 번씩 친척들이 벌목하면 상처가 난 부분에서 하얀 송진이 방울방울 떨어진다. 그것을 옹기그릇에 받아두었다가 등불을 켜곤 했다. 솔잎은 바늘 모양으로 짧은 가지 끝에 2개씩 붙어 있다가 이 년 후에 떨어진다. 솔가리를 갈기로 그러모아 몇 동씩 쌓아두었다가 솔방울과 함께 불쏘시개로 썼다. 추운 겨울 군불 땐 구들장이 펄펄 끓으면 어머니는 항아리 뚜껑에 물을 담아 솔방울을 띄워 방 윗목에 두었다. 붉고 굵은 적송은 집 지을 때 대들보로 사용하고 옹이 박힌 가지는 장식용이나 아이들 장난감으로 깎아주었다.
봄이면 엄마가 파릇파릇한 쑥 개떡을 쪄주었다. 5월에 피는 노란 송홧가루로 떡이나 경단을 만들어 먹었고, 파란 솔방울로는 술이나, 효소를 닮곤 했다. 삼 년 동안 흉년이 들면 우리 가족이나 동네 사람들은 대부분 끼니를 굶어서 얼굴에 누런 부항이 생겼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낫으로 굵은 소나무 껍질을 벗겨 왔다. 물에 푹 불렸다가 방망이로 두들겨 껍질이 부드러워지면 면사무소에서 주는 밀가루를 섞어 떡을 해 먹었다. 이튿날 배 속에 송진이 뭉쳐 뒷간에 가면 변을 누지 못해 항문이 찢어져 피가 흐르기도 했다. 산에 갔을 때 갈증이 나면 여린 나뭇가지를 꺾어 물을 빨아 먹으면 해갈이 되었다. 부모님 살아생전에 흰쌀밥과 따뜻한 갈비탕 한 그릇을 못 사드렸다. 그런 회한이 남아서 오늘 소나무 숲길을 걷다가 목이 메여 숨을 쉴 수가 없다.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소나무의 종류는 많다. 귀한 대접을 받는 적송 나무와, 왕 솔, 침엽, 육송, 잣나무 등 소나무 속과 식물을 통틀어 하는 말이라고 한다. 눈비, 찬 서리 속에서도 독야청청(獨也靑靑)한 소나무를 옛 선조들은 지조가 있다며 그림을 그리곤 했다. 농촌에서는 초등학생들이 공부해야 할 시간에 송충이를 잡으려고 산에 올라갔다. 깡통과 나무젓가락을 들고 솔잎에 붙은 누에같이 생인 놈을 아이들은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쳤지만 많이 잡아야 학교에서 공책이나 연필을 탈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슬픈 역사를 간직한 왕실의 뜨락을 걸었다. 마치 왕비가 된 듯 우쭐거리다가 안타까운 마음이 겹쳤다. 문득 솔향이 코끝을 스친다. ‘산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동요를 흥얼거려본다. 어린 시절 우리 동네는 솔숲이 병풍처럼 포근하게 감싸주었다. 동네의 젖줄인 강물은 들판을 가로질러 이웃 동네로 이어진다. 여름날 쪽마루에 누우면 가슴을 적시는 솔바람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그런 날들을 뒤로하고 결혼을 하고 도회지에 살다 보니 현실에 발목이 묶여 사물에 대한 관심이 무디어졌을까. 창경궁 뜰에서 내가 사랑하는 소나무와 재회를 하니 아이처럼 설렌다.
거친 세월의 흔적이 새겨진 소나무를 손으로 어루만져본다. 수난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못 다한 이야기가 너무 많은 것 같아 발길 돌리기가 쉽지 않다.
가을볕에 곱게 물든 창경궁을 한 바퀴 돌았다. 유년기에는 소나무처럼 아낌없이 주는 삶을 꿈꾼 적도 있었다. 인생의 가을을 맞이하고 보니, 창경궁의 저 소나무 한 그루만큼이라도 삶을 사랑하고 살았느냐고 묻고 싶다. 이제라도 솔가리를 긁어모아 불쏘시개로 사용했던 순수한 그 시절처럼 묵묵히 내 자리에서 못다 한 삶을 사랑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