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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날 부침개

by 최점순

장대비가 주룩주룩 쏟아진다.


한 달이 넘도록 비가 와서 외출도 못 했다. 하루 중 세끼를 해 먹으니 갑갑했다. 거실에서 시원한 빗방울 소리를 듣던 남편이 부침개가 먹고 싶다고 한다. 빗길이지만 못 들은 척 뭉갤 수도 없다. 시장이 가까우니 재료들을 금방 사올 수 있다. 모처럼 만에 부침개 부치려니 가까운 이웃들의 얼굴도 떠올랐다.


빗속을 가르며 재래시장으로 갔다. 우중인데도 시장에는 사람들이 많이 나와서 생선가게 앞에 웅성거린다. 북적거리는 골목으로 들어가서 오징어 두 마리를 사고, 야채가게에서 당근, 부추, 애호박, 파랑 빨강 고추를 샀다. 급하게 돌아오다가 구정물 세례를 받았다. 내 옆으로 바짝 붙어 지나가던 자동차가 빗물이 고인 웅덩이로 사정없이 속력을 냈다. 금방 갈아입고 간 옷인데 흙탕물을 뒤집어썼으니 속이 많이 상했다. 에그 재수 없는 날, 차 꽁무니에 한 마디 하려다가 참고 오는데 엄마표 부침개가 생각났다. 재료를 손질하는데 벌써 군침이 넘어간다. 남편이 좋아하는 오징어는 껍데기를 벗겨내고 칼집을 내고 야채들도 손질을 했다. 남편이 맛있게 먹을 생각을 하니 손이 빨라졌다. 매콤한 고추, 아들딸을 닮은 양파와 부추를 골고루 석으니 빛깔이 먹음직스럽다. 가스 불을 켜고 기름을 듬뿍 둘렀다. 후란이 펜에 넣은 기름이 끓으면서 지글지글 소리와 향긋한 부침개 냄새가 온 집으로 퍼진다. 맛있게 먹을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한 국자씩 넣고 부쳤다. 두툼하고 네모난 전과, 타원형전을 주걱으로 뒤적였다. 서서히 맛있는 야채해물부침개가 한 장 두 장 쌓인다.


남편이 잠자다가 벌떡 일어났다. 눈, 코 입으로 부침개 맛을 느낀 듯 야, 끝내준다며 식탁에 앉았다. 한 장씩 접시에 놓기가 무섭게 둘둘 말아 입으로 삼킨다. 한 손으로 뒤집기를 하며 냉장고에 잠자던 막걸리 한 병을 꺼냈다. 여보당신 한잔, 쭉 들려 마셔보라고 권했다. 모처럼 마누라가 주는 술잔을 계속 받더니 얼굴이 울긋불긋하다. 알딸딸한 술기운을 빌려 내가 잔소리처럼 해묵은 시절의 이야기를 해도 남편은 부드럽게 넘어간다. 젊은 시절 서로 옳다고 아웅다웅했지만 부부싸움은 칼로 물배기로 끝났다. 돌아보니 남편은 오랜 세월 내 옆에서 알뜰살뜰 챙겨주던 지원군이었다.


아,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예쁜 접시에 부침개를 두 장씩 담고 은박지를 씌웠다. 남편은 우산을 들어주고 나는 쟁반을 들었다. 먼저 경비실할아버지께 한 접시를 드렸다. 아래윗집과 옆집에도 초인종을 눌렀다. “비가 오니 옛날 생각이 나서 부침개를 부쳤는데 맛이라도 좀 보시라고 가지고 왔어요.”라고 말했다. 이웃 주민들이 약속이나 한 듯 하나같이 현관문을 열어놓고 잠시만, 기다려요 했다. 앞집은 토마토, 옆집은 오이, 위층은 상추를 쟁반에 담아주었다. 겨우 부침개 두 장을 드렸는데, 덤으로 사랑을 얹은 찬거리를 듬뿍 담아주었다. 내 마음이 부자 같았다. 비오는 날은 야채

부쳐주던 엄마의 사랑을 잊지 못한다.



산골에서 태어나서 성장했다. 동생과 두 살 터울이라 나는 젖배를 곯았다. 나는 어려운 우리형편에 아무것이나 잘 먹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가끔 돌개바람이 불때마다 내 몸이 바랑개비처럼 흔들렸다. 요즘 같으면 영양실조로 병원에 실려 갔을 지도 모른다. 동네에는 작은 약방이 한 군데 있었다. 보리쌀 한 됫박 퍼 가면 구수한 원기소와 바꿔 먹을 수 있었다. 그래도 영양 섭취가 부족했는지 허약한 체질로 변해갔다. 엄마는 이른 봄에 담벼락 밑에 구덩이를 파서 호박씨 두 알씩 묻었다. 싹이 내밀면 넝쿨을 담장으로 타고 오르를 수 있도록 새끼줄을 연결해 놓았다. 여린 줄기가 위로 올라가면서 마디마다 동글동글한 애호박이 매달렸다. 장마철에 갱죽 끓일 때, 밀가루 수제비에 호박을 넣어 끓여먹었다. 비가 오면 자식들의 입이 심심하다며 김치전이나, 쪽파와 호박을 썰어 넣은 두툼한 야채부침개는 엄마표 사랑이었다.


아직도 굵은 빗방울이 쏟아진다. 부침개를 배부르게 먹고 남편과 어깨를 나란히 기대고 창밖을 내다본다. 화단의 벚나무 잎사귀 위로 물방울이 데굴데굴 굴러 내린다. 서로 참아준 남편과 아내가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하다가 주사의 힘을 빌려 속을 풀어냈다. 남편과 아내로 만나 평생 살아오느라 옥신각신 거렸다. 서로 자존심이 강해서 밀당하느라 세월만 낭비했다는 후회가 든다. 약속도 하지 않았는데 어느새 듀엣이 되었는지.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 검정 우산, 빨강 우산, 찢어진 우산 셋이 걸어갑니다.’이웃들에게 부침개 두 장을 드렸는데, 그분들은 마음이 담긴 사랑을 가득히 담아 되돌려 주었다. 이런 소소한 일로 서로 마음의 공간이 넓어지는 기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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