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길에 오르니 눈이 내린다. 삼 년을 코로나거리두기로 집에서 생활하니 답답했다. 추운 날씨에 산과 들판에 펼쳐진 나뭇가지에 눈이 목화솜처럼 쌓인다. 혼자 한적한 곳에서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양손에 움켜쥔 것을 비워보려고 시간을 내었다. 터미널에 내려 노을 빛 쉼터를 향해 걷는다. 하얀 발자국이 뽀드득 뽀드득 따라온다.
상주계림성당은 천주교, 개신교, 불교신자들이 협력해서 나눔의 집, 무료급식소를 운영한다고 했다. 농촌의 낙후된 지역사회에 활력을 불어 넣고 가난한 이웃들에게 사랑을 실천한다. 12월 24일 신부님이 성탄전야미사봉헌이 드린다. 아기예수님의 구유 예절을 마치고 신부님은 강론으로 권정생의 『강아지똥』 이야기를 읽어주셨다.
“돌이네 흰둥이가 똥을 눴어요. 참새가 강아지 똥 곁에 내려 똥 중에서도 제일 더러운 개똥이라고 하며 웃었지요. 이른 봄날 민들레 싹은 아름다운 꽃을 피웠어요. 방긋방긋 웃는 꽃속엔 강아지 똥의 눈물겨운 사랑이 가득히 어려 있다는...”
머리를 얻어맞는 듯 정신이 멍했다. 오래 전 영세를 받고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온다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강아지똥’은 자신을 온전히 녹여서 민들레가 꽃을 피울 수 있도록 거름이 되었다. 세월이 겹쳐 흐르는 동안 나는 가족이나 이웃에게 나를 녹여가며 사랑하였는지 스스로에게 반문하니 너무 부족했다는 생각이 든다. 신부님의 성탄메시지는 낮은 곳으로 임하시는 아기예수님의 사랑을 본받고, 코로나와 경제위기에 내몰린 가난한 이웃들에게 자신을 녹여 예쁜 꽃을 피우라고 당부한다.
신앙생활을 건성으로 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매일 미사 때 일용할 양식으로 들었든 복음의 씨앗이 세상의 가시넝쿨 속에서 숨이 막혔을까. 인생의 태풍이 한바탕 씩 휘몰아치면 삶의 터전이 흔들거리다가 뿌리 채 뽑혀나가지 않으려고 흙과 자갈을 움켜쥐고 견디어냈다. 잎을 모두 떨어뜨린 겨울나무처럼 바르르 떨었던 날들이 자꾸만 일렁거린다. 옆에 있는 가족에게 든든한 버팀목 못되어주고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에게도 넓은 품을 내어주지 못했다. 세상에 대한 달콤한 유혹 앞에서 과감하게 뿌리치지 못하고 흔들릴 적마다 내면에서 경고음이 울리면 눈과, 귀를 막지 않았나. 입으로만 사랑하고 실천에 옮기지 못한 자책으로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며칠 여행을 떠나겠다는 마누라의 성화에 백번 양보해준 남편이지 않는가.
성탄전야 2부다. 성당마당에는 나눔의 집, 운영기금 마련을 위해 신자들이 합심해서 김밥 떡 복기 장사를 하고 있다. 산타할아버지들이 선물을 한 아름씩 안고 성당으로 들어왔다. 제대 앞에 가득 쌓인 상품들은 기증받은 물품들이다. 먼저 유치원생의 앙증맞은 춤사위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띄웠다. 착한 목자인 신부의 휘하에서 오래 동안 준비했던 복사 단, 성가대, 사진촬영 팀, 음악담당들이 혼신의 힘을 다했다. 모처럼 만에 양떼들은 어깨를 들썩 거리며 흥겨운 웃음꽃이 만발했다. 그동안 대면미사를 드리지 못하고 영적인 갈증과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어두움을 몰아내고 영혼의 허기도 달래주는 잔치였다. 초대교회사도들이 오순절성령강림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이나 부자가 차별 없는 하느님의 나라를 실현시킨 장면이 연상되었다.
경품권추천이 시작되었다. 나는 표를 한 장을 샀는데, 다른 분들은 5장 10장씩 들고 가족단위로 기대와 설렘의 눈빛을 주고받는다. 산타크로스 할아버지가 함속의 번호표를 골고루 섞어서 한 장씩 꺼냈다. 77번 이불당첨, 담요, 전기밥솥, 밥그릇 등. 번호를 부르면 신자들이 달려 나간다. 미사를 드리면서 부질없는 욕심을 비워냈다고 생각했는데 견물생심이라고 했던가. 자전거 목에 걸린 ‘축, 성탄선물’이라고 쓴 리본이 웃었다. 순간 다섯 살 어린이가 되고 말았다.
“아기예수님, 성탄선물로 자전거를 주십시오.”
나의 간절한 기도가 통했는지 429번, 내 번호가 당첨되었다. 와, 신자들의 시선이 쏠리고 박수가 터져 나왔다. 홍당무가 된 얼굴로 밖으로 나왔다. 그때 하늘에서 별빛이 머리 위로 차르르 쏟아졌다. 단축키 1번을 눌렀다. “여보, 성탄 선물로 자전거 탔어요.” ‘행운의 주인공’이라며 축하해주었다. 평생 온몸에 찬비를 맞으며 살았는데, 오늘은 봄비 맞은 나무처럼 생기가 솟는다. 창공을 훨훨 날아 남편에게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고 싶다. 사랑의 온기를 가득히 채우고 사람들에게 스며들어 꽃을 피워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