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황급히 찾아왔다. 일주일 전에 분양받은 강아지인데 시부모님이 중환자실에 입원했다며 팔에 안겨주고 갔다. 흰색몰티즈는 낯가림을 하는 듯 바르르 떨었다. 낯선 환경인데도 앙증맞은 모습으로 재롱을 부린다. 무료한 일상에서 삶의 활력을 찾아주는 녀석에게 이름을 막둥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가족이 되었다.
내가 열살 무렵이었다. 엄마가 시장에서 털이 하얀 강아지를 사와서 흰둥이라고 불렀다. 일 년 동안 산으로 들로 뛰어 다니며 좋은 친구가 되어 주었다. 이웃집 숯 개를 따라다니다가 돌아온 후 하루하루 배가 불러왔다. 추운 겨울 날 두꺼운 담요를 깔아주었다. 새벽을 깨우는 강아지울음소리에 개집으로 가보니 흰둥이가 강아지10마리를 낳았다. 공부하다가 달려와서 몽실몽실한 놈들을 한 마리씩 차례로 안아주었다. 짐승이라도 고생했다며 엄마는 매일 등겨와 명태대가리를 섞은 죽을 끓여먹이곤 했다. 새끼들이 젖 떨어지면 팔아서 운동화를 샀던 시절이 나이가 들어도 새록새록 떠오른다.
산중 절간이 따로 없다. 귀여운 몰티즈재롱 덕분에 대화모드로 분위기로 반전되었다. 업둥이처럼 둘이서 애정을 쏟으며 돌봐 주다보니 웃음소리가 울 밖으로 넘어간다. 잠바 주머니에 넣고 산책길을 걷다보니 팔딱팔딱 심장이 뛰고 따스한 체온이 아기처럼 느껴진다. 잔디밭에서 뒷다리를 번쩍 쳐들고 영역 표시를 하거나 배변을 한다. 사료를 먹일 때도 있지만 참치에 밥을 비벼주면 맛있게 먹이고 목욕을 시켜 준다. 소파에서 누여 놓으면 아기의 숨소리처럼 들린다. 주인이 언제 데려갈지 몰라도 매일 정성껏 돌보아 주고 이별할 마음의 준비도 한다. 하지만 일주일 동안 맡긴다고 해놓고 감감 무소식이다. 사람이나 짐승에게 정들면 헤어지기 어려운데 시간은 자꾸 흐른다.
한 달 넘어서 친구가 몰티즈를 데리려 왔다. 초인종소리에 귀를 쫑긋 세운다. 오랜 만에 나타난 주인을 보고 황급히 안방으로 달아난다. 시아버지의 초상을 치르느라 늦게 왔다며 슬픔이 가시지 않는 듯 보였다. 홀로 계시는 어머님을 모시려면 어쩔 수 없이 이사를 하게 되었다며 긴 한숨을 내쉰다.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말문이 막힌다. 옆에 살면 자주 들락거리며 재롱을 볼 수 있을 텐데 다시 볼 수 없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불편했다. 남편과 막둥이처럼 정성껏 돌보아 주는 동안 정이 들었다. 어린 시절 흰둥이를 좋은 친구가 되어 동네 한 바퀴를 돌았던 생각나서 도저히 보낼 수 없었다. 며칠만이라도 함께 지내다가 보내려고 친구에게 허락을 받았다.
흰둥이는 호휘(湖輝)무사였다. 우리가족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기억하고 있었다. 장날 늦게 돌아오는 아버지의 발자국소리를 듣고 총알같이 달려 나갔다. 내가 혼자 소꼴 베로 들로 가면 꼬리를 흔들며 앞장을 섰다. 호랑이가 자주 출몰한다는 높은 산에 올라도 든든했다. 산에서 길을 잃으면 지름길로 안내해 주던 흰둥이를 어른이 되어서도 항상 옆에 있는 듯 느껴졌다.
반면 말티즈가 가족으로 받아 드린 후 남편의 껌 딱지가 되었다. 외출했다 돌아오니 집안이 난장판이 되어 있다. 치아가 날 무렵이면 식탁이나 침대를 물어뜯는 것도 문제이지만 낯선 사람을 물어서 더 큰일이다. 공원에서 돌아오면 눈물자국이 털에 붉게 물들어 목욕을 시켜 주면 무척 좋아한다. 말티즈의 무는 습관을 고치려면 교육을 시켜야 하는데 주인이 아니라 함부로 야단을 칠 수도 없다. 사람들이 자기 전에 무언가를 꼭 해야 하는 습관이 있듯이 우리 가족이 된 막둥이도 태어나서부터 해 오던 잠자리정리 습관이 있는 것 같다. 최근에 빅뉴스가 된 일은 말티즈가 남편과 나의 동, 선을 아기처럼 아장아장 따라다니며 친자식처럼 정이 들어가는 일일 것이다.
흰둥이가 한 배에 새끼를 열 마리씩 낳았다. 학교에서 타온 강냉이 가루와 우유 덩어리로 죽을 끓여 먹였다. 엄마가 강아지 새끼 몇 마리씩 광주리에 담아서 팔아서 동생과 내 운동화를 살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하굣길에 꼬리를 흔들며 반겨주는 귀염둥이를 새 운동화로 바꿀 수 없었다. 장날 광주리에 담아 두면 도움을 요청 하듯 깨갱깨갱, 울음 신호를 보냈다. 전에는 강아지 판돈으로 신발을 샀지만, 내 손으로 사랑을 쏟아 키운 흰둥이 새끼들을 이번만큼은 밥도 안 먹고 법석을 떨어서인지 팔지 않고 동네 사람들에게 분양을 해주고 자주 만날 수 있었다.
몇 년이 흘렀다. 흰둥이가 늙었는지 학교에서 돌아오니 죽고 말았다.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고 찾아갔던 날들이 잊을 수가 없었다. 소고기 국물에 밥을 비벼서 주니 맛있게 먹는 것을 보니 사람들의 생각을 눈치 채지 못한 것 같다. 마지막이 될 것 같아 자주 다녔던 공원 산책길로 한 바퀴 돌고 와서 목욕을 시키고 이별할 준비를 묵묵히 받아드렸다. 어디에 살든지 건강하기를 바라며 간식도 챙겼다. 어린 시절 흰둥이처럼 막둥이와의 이별이 영영, 잊지 못할 그리움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