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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점순 May 01. 2023

신앙의 거미열차

‘제7회 신앙체험수기 공모’ 장려상) 2020년 2,28 평화신문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대대로 찬미와 영광을 올립니다.’

인생의 향기를 가득 실은 기차가 칙칙폭폭 달려간다. 들녘엔 벚꽃이 휘날린다. 내일은 김 도마 시아버님의 기일, 칠 남매 형제들이 모이는 날이다. 문경은 선조들이 천주교 박해를 피해 숨어들어 옹기를 구워 팔아 생활했던 곳이다. 시아버지께서는 윗대 어른들로부터 신앙을 물려받아 자식들과 함께 사셨다. 가족은 오래 전에 본당신부님이 선물로 주신 손바닥만 한 구리 십자가를 벽에 걸어 놓고 기도드렸다. 문경 가은이 우리나라 3대 탄광이라 땅속의 무연탄을 개발하였다. 덕분에 사람들은 등 따시게 살았었고 외국 수출도 일등 공신이었다. 시골 가는 기차에서 그날의 기억으로 걸어 들어갔다.

“형님, 저, 기차 탔어요.”

큰동서는 내가 온다는 문자를 받고 유모차를 끌고 역전으로 나왔다. 도회지로 흩어졌던 형제들도 모두 도착했다. 장성한 조카와 손녀들이 넙죽넙죽 절을 하였다. 고희를 넘긴 자매 같은 다섯 동서가 반가운 재회를 했다. 점심은 팔도 산해진미로 솜씨 발휘를 하였다. 큰형님이 가꾸어 놓은 텃밭에서 냉이와 달래를 캐어 된장국도 끓였다. 대가족이 대청마루에 둘러앉아 모처럼 한솥밥을 맛있게 먹고 성당으로 산책을 나갔다. 옛날에는 성당으로 가는 길이 구불구불한 논둑길이었지만, 지금은 고속도로처럼 뚫려 차들이 씽씽 달린다. 성당 마당에는 성모님 상과 제대 위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셔놓았다. 수녀님이 낯선 손님들 방문에 깜짝 놀라며 반가워하셨다. 예수님이 잃어버렸던 양을 찾아 어깨에 메고 환하게 웃으시는 성화에서 시아버지의 얼굴이 겹쳤다. 시아버지께서는 멀고도 가까운 이웃들을 평생 형제자매로 섬기며 사셨다. 고향 산천의 풍경들과 향수가 서려 있는 기차역, 기와집들, 단골 미용실이 말을 걸어왔다.


그 옛날 칠 남매 형제들이 번성하여 후손들이 4, 50명은 족히 넘을 것 같다. 당시에 시아버지께서는 일요일이 되면 하던 일손을 멈추었다. 온 가족이 주일 교중미사를 드리기 위해 성당으로 향했다. 그분은 증조할머님을 지게에 짊어지고 앞장을 섰다. 뒤를 따라 아들, 며느리, 딸, 사위, 손자들로 줄이 이어졌다. 비가 오면 진흙이 검정 고무신에 달라붙어서 걸음을 뗄 수가 없었고 풀숲에 숨어 있던 독사에게 물려 아픈 기억들이 아른거렸다. 제일 앞자리에 담요를 깔고 증조할머님을 앉혀드렸다. 혹시 자식들 중 빠진 사람이 있나 일일이 인원 파악을 하셨다. 이런 집안 분위기를 동네 사람들은 무척 부러워했다. 대가족이 화목하게 사는 비법이 있는지 물으면 천주님 덕분이라고 하셨다. 탄광촌에 취직하러 온 뜨내기 사람들을 따뜻하게 받아들여 대부도 서 주고 영세를 시켰다. 젊은 부부들이 너도나도 아기를 안고 업고 몰려드니 성당 안은 콩나물시루가 되었다. 미사 중에 꾸벅꾸벅 졸면 누군가 옷자락을 살짝 당겼다. 돌아보면 시아버님이 빙그레 웃으셔서 얼굴이 홍당무가 되기도 했다. 시댁 가족들은 위계질서를 존중하며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화목하게 살았다. 겸손한 자세로 성실하게 사는 일상이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길이라고 배웠다. 덕분에 불교 신자인 친정 부모님 밑에서 성장한 내가 천주교에 대해 좋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내 마음은 스펀지에 물이 스미듯이 시나브로 젖어 들었다.


남편은 군 특수 작전 수행 중에 돌이킬 수 없는 큰 사고를 당했다. 긴 터널을 향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부모님에 아들은 가슴 위에 다듬잇돌을 올려놓은 것처럼 무겁고 아픈 손가락이 되었다. 이십 대에 국가 대표 사이클 선수였던 남편의 성취감과 자존감도 무너져 내렸다. 매일 아픈 다리와 씨름하는 날들이 힘겨워하였다. 보다 못한 시부모님과 형제들은 환경을 좀 바꿔보라고 권유를 했다. 마침 막내 시동생이 중장비 회사에 다녔기에 도움을 받아 서울로 이사할 계획을 세웠다.


   80대 서울로 이사를 했다. 딸은 다섯 살, 작은 아기는 10개월 때였다. 시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서울로 이사 간다는 말을 듣고 불안해서 괴나리봇짐을 걸머지고 버스에 그대로 올라타셨다. 다음 날 제일 먼저 경로당에 가서 성당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 오셨다. 그리고 당부하셨다.

“새아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라. 저기, 산꼭대기에 성당이 하나 있다고 한다. 아기들 데리고 꼭 찾아가거라. 주님께서 반드시 너희들 앞날에 축복을 주실 것이다. 내 말 잘 알아들었지?”

긴 겨울이 꼬리를 감추고 봄바람이 훈훈하게 불었다. 레지오 단원 자매님의 안내를 받아 아이들 업고 손잡고 산꼭대기에서 찾은 성당에는 무덤들이 즐비했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언덕 밑에 70위 무덤의 묘비가 영어로 출생지, 나이, 이름, 사망한 날짜가 적혀 있었다. 풍선에 구멍이 나듯이 부푼 내 기대는 허망하게 무너졌다.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니 낡은 성당 천장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한참 후 신자들에게 들은 이야기는 한국 천주교회의 초석을 놓은 프랑스 선교사들의 묘지였다. 평생 한국인들의 영혼 구령을 위해 살다가 돌아가신 후 이곳에 묻혔다고 했다. 그때부터 나는 선교사들의 일생을 곰곰이 마음속에 되새김질하였다. 만약에, 어디엔가 천국이 있다면 이곳이 아닐까 싶었다.


  시골 출신이라 서울 생활에 익숙하지 않았다. 이웃들을 내 마음처럼 믿어주고 받아주었지만 그들은 오히려 순진한 나를 이용만 했다. 어디에도 끼지 못하는 이방인처럼 30대 기댈 언덕도 없이 아득하기만 하였다. ‘자식들의 앞날을 위해 어떻게 살 것인가? 인생에 무엇이 제일 중요한가? 돈을 많이 벌어 부귀영화를 꿈꾸어 볼까? 아니면, 가난하게 살아도 자식들에게 올바른 가치관으로 신앙을 물려줄 것인가?’ 장고 끝에 내 발걸음은 선교사들의 무덤으로 향했다. 이국땅에서 평생을 헌신한 삶을 봉헌 드린 후 안식을 누리고 있었다. 무덤 잔디 사이에 잡풀을 뽑아주었다. 눈만 뜨면 세속적인 욕망으로 고장 난 돛단배처럼 파도에 흔들리며 갈피를 잡지 못했던 분심을 털어버리고 이곳에 닫을 내렸다. 무덤에 묻힌 선교사들이 언 듯 언 듯 말해 주듯이 인간은 소멸해가는 존재라는 것을 깨우쳐주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우선순위는 자식들을 장내를 위해 초, 중,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이사를 하지 않기로 하였다. 다음으로 아파트 평수를 늘리기 위해 부평초처럼 떠돌지 않기로 결심을 굳혔다. 그 당시에 본당에서 성서 창세기 공부하는 중이었다. 아브라함의 주인의 뜻을 받들어  이삭의 신부를 데려오는 과정을 통해 하느님을 신뢰하는 절대적인 믿음에 감명을 받았다. 내 가족의 꿈을 실현해 주실 주님을 믿고 그곳을 바라보며 달동네에 눌러살았다.


  서울에는 박해하던 친정엄마도 없었고, 남편도 서서히 건강이 회복되어갔다. 직장에서 자주 이직을 하였으나 들어오는 수입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토요일은 아이들과 손을 잡고 어린이 특전 미사를 드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결혼할 때 관면 혼배를 했지만 신앙에 대한 교리는 잘 몰랐다. 딸은 시골에서 유아 영세를 시켰고, 작은 아이는 내가 교리를 받고 영세할 때에 나란히 유아 영세를 받았다. 이런 기쁜 날을 섭리하신 하느님께 감사드렸다.     세월을 빠르게 흘렀다. 주님의 돌보심으로 성가정 안에 하루하루가 축복이었다. 건강하게 성장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니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고 온 세상을 다 얻은 듯했다. 하루에도 수백 번 감사 노래를 불렀다. 세상의 잣대로 바라보면 보잘 것 없지만 내 믿음은 봄볕을 받은 새싹처럼 파릇파릇 자라고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찼다. 매일 새벽 미사를 드리며 성체를 모실 수 있는 것이 가장 축복이라 받아드리고 복음 말씀도 가슴에 새겼다. 남들 보기에 우리 사는 형편이 기쁘거나 즐거울 조건을 하나도 갖추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어느새 현실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아버지의 품은 항상 따사롭고 든든했다.


내가 선천적으로 단순, 순박해서 주님께서 지혜와 용기를 주셨다고 생각했다. 달동네에 말뚝을 깊게 박고 어린아이처럼 현실적인 문제를 모두 주님께 의탁을 드렸다. 이런 선택이 내 인생에 황금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하늘과 가까운 판자촌에는 놀이터가 없었지만 우리 아이들에게는 넓은 성당 마당이 있었고 주일학교 친구도 많이 생겼다. 아이들 두 명은 무럭무럭 자라서 3, 4학년에 올라갔다.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주일학교 자모회 봉사활동, 구역장, 군종 지회장, 레지오 마리아에 입단하고 성령 세미나를 몇 번 받은 후에는 변화되었다. 특히 지인의 추천으로 성 프란치스코 회개하는 삶의 영성적인 면에 감동받았다. 성인의 발자취를 따라 재속 삼회에 입회를 하였다. 양성교육을 받고 일 년 후에 유기서약을 하게 되니 수도자가 된 기분이었다. 세속에 살면서 ‘복음에서 삶으로, 삶에서 복음으로’ 여정으로 매일 성무일도를 바치고 프란치스칸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었다.


  골목길에 꼬마들의 노래 소리가 정겹게 들렸다. 이웃 사람들은 누구 집 밥그릇 숟가락이 몇 개인지 훤하게 알았다. 대문을 열어놓아도 도둑이 들어오는 법도 없었다. 주님, 당신은 제가 가족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가족을 사랑하시고, 제가 현실적인 형편을 아는 것보다 더 잘 알고 계시지요? 아이들이 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십시오. 한 가지 청원만 드렸다. 많이 배우지도 못해도 소박한 마음을 주셨고, 부자가 못되어도 남에게 돈 꾸러 가지 않으면 만족하였다.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건강한 몸이 큰 재산이었다. 주님, 제 노동력을 봉헌합니다. 받아 주십시오. 매일 제대 청소와 제의 방 성물들을 닦고 주일 학교 교사들에게 밥을 해주었다. 엄마가 성당에서 일하는 동안 아이들은 넓은 마당에 풀어놓았다. 또래 친구들과 성직자 묘지 봉분 사이로 숨바꼭질을 하며 놀았다. 간식이란 말은 모르기 때문에 배가 고프면 밥 달라고 달려왔다. 이곳이 하느님의 품안처럼 아늑하게 느껴져서 행복했다.

 

 고향 방문 기념으로 조카가 ‘문경석탄박물관’ 입장표를 사 주었다. 거미열차 앞에 가족들이 모였다.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폐광을 개발해 거미열차를 운영하며 탄광 굴 속을 안내하는 곳이다. 표를 받아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추억문을 열었다. 45년 전에 시아버지는 약혼한 나를 성당으로 데리고 갔다. 대부, 대모를 세우고 남편과 관면혼배를 시키셨다. 주례 신부님이 신랑·신부에게 혼인 서약과 사랑의 증표로 반지를 교환하게 하고 혼배미사를 올렸다. 일 년 후에 딸이 태어났고 삼 년 후에 작은 아이가 태어났다. 내게는 천주교 미사 전례가 낯설었다. 시집살이하는 동안 주일날은 가족들을 따라 성당에 다녔다.


  어릴 적 친정엄마에게 예수 믿는다고 혹독한 박해를 받았던 기억이 옹이처럼 박혀 있었다. 신앙이란 무엇일까? 신비롭게 지난 역사가 말해준다. 박해를 받을수록 신자들은 목숨을 바쳐 순교의 꽃을 피우며 신앙을 물려주었다. 내 인생에도 신앙의 꽃이 피는 것일까.

  어릴 적 친정 동네 언덕배기에 예배당이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개신교 신자들이었다. 성탄절에 또래 친구들을 따라가면 돌 사탕과 라면땅을 주었다. 그 시절이 어린 마음에 신앙에 대한 잊을 수 없는 즐거운 추억을 쌓는 시간이 되었다. 그런데 큰오빠가 결혼을 한 후 집안 분위기는 살벌하게 바뀌었다. 도회지에서 선생님을 하던 올케는 열렬한 개신교 신자였다. 부모님이 물려주신 문전옥답을 한 뙈기식 팔아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내야 한다면서 탄탄했던 살림살이가 거덜이 났다. 그 후에 올케는 큰오빠와 대구로 이사를 한 후에 시부모님의 집에는 오지도 않고 소식을 끊었다. 그때부터 친정엄마는 가족 중에 누구라도 예수를 믿는다는 말만 들어도 입에 거품을 물고 경기를 했다.


  친정엄마가 가혹한 박해자였다. 어린 순수한 마음에 예수님을 믿으면 평화가 온다는 것을 가슴으로 조금씩 느껴졌다. 서슬 시퍼렇게 다그쳐도 나는 예수님을 믿겠다는 말을 했다. 딸이라도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다. 다음 날 성경책과 찬송가를 소죽 끓이는 아궁이에 불살라 버렸다. 엄마의 오랜 박해는 시간이 갈수록 모질어졌다. 신앙으로 인해 모녀의 갈등의 골은 나날이 깊어졌다. 우연히 지인의 소개로 구교 집안의 남편을 알게 되어 사귀다가 결혼하는데 성공하였다. 오랜 신앙의 박해를 벗어나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거미열차는 벌집같이 구멍이 숭숭 뚫린 내 마음을 끌고 캄캄한 터널로 향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굴 속을 들락거리며 관광객들을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지점으로 데려다주었다. 그 시절 광부들의 생활상을 재현해 놓은 얼굴에 탄가루를 분칠한 모습이 펼쳐졌다. 갱 바닥에 앉아 양은 도시락으로 허기를 달래며 석탄을 캐내는 과정은 코끝이 쨍했다. 비좁은 양쪽 벽에 모형 왕거미들이 까만 눈알을 빤짝거리며 꼼지락꼼지락, 투둑투둑, 소름이 확 돋았다. 광부들의 대해 해설하는 방송은 흐릿하게 들리고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이 현실처럼 느껴졌다. 어린 시절 엄마의 박해가 악몽처럼 되살아났다. 굴곡진 내 인생을 반영하듯이  공포가 엄습했다. ‘주님, 살려주세요.’ 발버둥 칠수록 깊은 수렁으로 빨려들었다. 순간, 어디선가 빛의 속도로 내 몸을 포근하게 감싸주었다.


  외벌이로는 네 식구 먹고살기도 빠듯했다. 학원을 보내는 일은 꿈도 꾸지 못했다. 엄마 마음은 아이들이 성장하는 데 좋은 환경을 제공하는 안내자 역할을 하였다. 인격 형성에 도움이 될 신앙 교육을 골고루 접할 기회를 주었다. 주보에 나오는 어린이 피정 프로그램을 잘 활용해서 여름방학, 겨울방학에 몇 군데 신청하였다. 그 결과 비용은 적게 들면서도 교육의 효과는 최고로 얻을 수 있었다. 우리 아이들의 인성교육은 본당 신부님과 교리 선생님들, 피정을 지도하시는 학사님들 덕분이었다. 그분들의 따뜻한 관심과 사랑에 힘입어 구김살 없이 정서적으로 잘 자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주님의 선하신 은총으로 우리가족은 물설고 낯선 도시환경에 서서히 적응해 나갔다. 하지만 남편의 상처가 수시로 덧나서 한 회사에 오랫동안 근무를 못 했다. 자주 이직을 하게 되어 안정적인 생활은 힘들었다.


  집에서 할 수 있는 부업, 인형 눈알 붙이기, 전자 부품 끼우기, 시장에 물건 나르기 등 일거리를 찾아서 밤낮으로 부지런히 했다. 사람이 욕심을 내려놓고 열심히 살다보니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쨍하고 해 뜨는 날이 찾아왔다. 80년대 성령 세미나가 유행처럼 번졌다. 지인의 권유로 남편과 나는 OO대학 마리아홀에서 아이린 조지 여사의 세미나에 참석했다. 미사 중에 신자들의 뜨거운 환성이 터져 나왔다. 남편도 온몸에 신비로운 뜨거운 체험을 통해 변화가 느껴진다고 했다. 그날 성령의 은혜로 영적, 육적 치유를 받았다. 군대에서 사고 당할 때 무너졌던 정신적인 상실감이 깨끗하게 사라지고 새로 태어났다. 회사에도 신바람이 나게 다니고 콧노래를 불렀다. 옆에 있던 나도 이제는 되었다. 하느님께 감사드릴 일만 남았다. 세상을 다 얻은 듯 매일 눈만 뜨면 성가와 영가를 불렀다. 알뜰하게 살면 금방 살림살이도 윤택하게 될 수 있다는 기대는 사람의 욕심일 뿐 두 마리 토끼는 잡을 수 없는 것일까.


 그날 이후로 남편의 말과 행동이 백팔십도로 돌변했다. 불같은 열정으로 성당에 봉사를 했다. 남들보다 일찍 출근해서 회사에 갔다. 동서남북으로 뛰어다니며 직장 동료, 친척들, 지인들 아기 돌잔치까지 뛰어다니며 챙기는 일에 정성을 다했다. 어려운 직원들이 부모님 상을 당하면 소식을 들으면 달려갔다. 월급봉투를 통째로 불우이웃 돕기라며 기부를 하였다. 남편은 새 생명을 다시 얻었는데 무엇이 아까울까 싶은지 감사함에 물불을 가리지 않고 솔선수범해서 봉사하였다. 월급이 천 원이면 지출은 삼천 원을 쓰고도 모자랐다. 과도한 씀씀이 때문에 가계에 주름이 생기면서 부부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오늘 걱정은 오늘만 하고, 내일 걱정은 내일 하라는 복음말씀을 읽어보지 못했느냐?” 성경책을 내 얼굴에 들이밀며 말했다. 나는 가슴이 답답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형편에 맞게 정도껏 해야지.”라며 가슴을 쳤다. 그이는 내 말을 귓전으로 흘리고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퍼주고 쏟아주며 수십 년을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아들로 살기를 원했다. 못 말리는 그의 열정을 받아 드렸다.


 어느 해인가. 친정엄마가 85세가 되었을 때 치매로 서울에서 치료를 받게 되었다. 평생 불교 신자였던 엄마가 천주교 교리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수십 년 동안 바친 내 기도에 응답하셨다는 확신이 섰다. 이 기회를 놓치면 영혼 구령을 못하고 후회할 것 같았다. 서울로 모시고 온 다음 날부터 엄마의 체중 90kg을 껴안고 모녀는 예비자 교리를 받기 위해 일 년 동안 행복한 동행을 하게 되었다. 영세 받기 일주일 앞두고 주모경, 영광송, 세례명 ‘마리아’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외워도 소귀에 경 읽기였다. 본당 보좌 신부님이 아무리 가르쳐드려도 진전이 없었다. 어머님께 신앙 교리를 잘 알려드리라는 말씀을 하시고 영세를 주셨다.


천지개벽이 일어났다. 매일 밤, 나의 잠꼬대는 ‘제 엄마를 영혼을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남편도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머리에 꽃을 꽂은 여자처럼 벽에 걸린 십자가만 보아도 기뻐서 눈물이 쏟아졌다. 나를 그토록 박해했던 엄마가 영세를 받으시고 예수님의 성체를 모시다니. ‘주님, 당신은 정말 사랑이시고 자비로우십니다.’ 모녀의 50년간 쌓인 앙금을 털어내고 회개하니 가슴에 박혔던 응어리도 쏙 빠졌다. 이제 주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엄마와 마주 앉아 옛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가슴이 먹먹했다. 첫영성체를 입에 받아 모시고 엄마가 처음 한마디 했다.

“예수님이, 부처님보다 힘이 더 센 것 같다.”


몇 년 후 ‘마리아’ 세례명을 달고 편안한 모습으로 영원한 안식에 들었다. 지난 수십 년을 돌이켜보니 나를 힘들게 했던 시간들은 모두가 축복의 징검다리가 되었다. 혹독한 신앙의 박해를 통해 바친 기도는 예수님께 한 발씩 가까이 갈 수 있었다. 엄마와 남편의 영혼 구원을 위해 바친 40년간의 기도와 미사, 성사, 성체조배는 나를 영성적으로 성장시켰다. 그 시간들이 밑거름이 되어 주님과 사랑의 거리를 한 뼘 간격으로 좁힐 수 있었다. 돈이 많은 것이 행복의 조건은 아닌 것 같다. 나의 주님과 인생의 순례에 동행하는 삶이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 싶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다는 말처럼, 내 딸이 엄마의 반대에도 불교 신자인 사위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다. 옛날에 엄마가 자주 말했다. 이담에 너도 시집가서 꼭, 너 같은 딸을 낳아 봐야 부모 심정을 알게 된다고 했다. 그 말뜻을 그때는 몰랐는데 물레처럼 돌고 돌아 금방 내 앞에 차례가 왔다. 그제야 자식에게 고스란히 되돌려 받는 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느님의 뜻깊은 자비로 좋은 사람이 아들처럼 나타났다. 사위는 가정적이라서 아이들의 자상한 아빠가 되어주었고, 훌륭한 딸의 남편이 되어주었다. 내가 결혼을 반대했던 마음이 무색할 정도로 정감이 가고 어디다 내놓아도 부족함이 없는 속이 꽉 찬 사람이었다. 그리고 연년생 외손자 손녀 삼 남매가 태어났다. 나는 맞벌이하는 딸을 대신해서 사랑스러운 손자 한 명과 손녀 두 명을 키웠다. 그 옛날 시어머니가 손자들을 유아 영세시키는 모습이 떠올랐다. 손자들에게 유아 영세와 첫영성체를 시키는 일은 내 몫이었다. 불교 신자인 사돈댁의 구원을 위해 몇 년 동안 기도로 마음의 준비를 했다. 사돈 내외분을 찾아뵙고 손자들에게 유아 영세를 시킬 수 있도록 동의를 구했다. 그분들은 쾌히 승낙을 해 주셨다. 그 자리에서 큰절을 드리고 손자 손녀 3명을 한꺼번에 유아 영세를 시켰던 벅찬 감동은 세월이 흘러도 잊을 수 없다.


몇 년 동안 손자, 손녀들을 데리고 토요특전미사를 드렸다. 큰손녀딸이 3학년에 올라가서 첫영성체를 한 후에 복사를 섰다. 복사 옷을 입고 머리 꽁지를 망으로 씌우니 앙증맞았다. 신부님 뒤를 따라 제대 위에 올라갔다. 미사 중에 야무지게 종을 ‘땡땡’ 치는 모습을 보고 눈물이 글썽거렸다. 어쩌면 그리도 사랑스럽고 마음이 뿌듯했다. 손주 세 명을 차에 태우고 폭설이 내린 여의도 다리를 지나갔다. 입에서는 기도를 하늘로 화살처럼 쏟아 부으며 어둠을 뚫고 달리는 도로 빙판은 차바퀴가 찌직, 헛돌았다. ‘손녀가 복사 시간에 맞추어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브레이크와 액셀을 번갈아 밟으며 힘차게 달려갔다.


거미열차는 탄광 지하 수백 킬로미터를 돌아 나왔다. 시아버지가 손수 지으신 고택에는 서까래가 나팔을 불고 뒤란에는 파란 이끼가 영토를 넓혔다. 사랑채 방문을 여니 어두침침한 방에 흑백 사진이 벽에 걸려 있다. 추억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장독대와 텃밭에는 봄볕을 받아 싱싱한 채소들이 파릇파릇 올라왔다. 마당 한쪽 우물을 덮은 뚜껑 위에는 두레박이 주인처럼 덩그러니 입을 벌리고 있다. 목을 쭉 빼고 우물 속을 들여다보니 파란 하늘이 통째로 들어앉았다. 시아버지의 휘하에 다섯 동서가 손톱이 빠지도록 밭에 돌을 골라낸 아린 기억들이 찰랑찰랑 속삭였다.


신앙의 거미열차는 객실을 수없이 늘리며 먼 길을 달려왔다. 주님의 섭리 안에 증조할아버지부터, 시아버지와 칠 남매의 자식들, 아들 손자들까지 다섯 세대를 이어왔다. 김 도마 시아버지께서 신앙의 뿌리를 튼튼하게 심어 주지 않았다면, 감사와 영광을 드릴 수 있는 일이 어찌 있었을까? 대대로 물려주신 녹이 슨 구리 십자가는 하느님이 동행을 해 주셨다는 증거가 되었다. 바통을 물려받은 자식들도 미래를 향해 칙칙폭폭 힘차게 달릴 것이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만세 대대로 찬미와 영광 올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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