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가을에 동생이 부쳐준 도라지를 화분에 심어 놓았다. 베란다에 빨래를 널기 위해 들락거리면 눈에 띈다. 봄이 되니 연한 몽우리가 맺혔다가 며칠 후 보라색 꽃이 활짝 피었다.
지난가을 고향의 햇볕과 흙에 버무려진 도라지가 솔잎 향을 묻혀 택배로 왔다. 쌉쌀하고 상큼한 향기가 폐부 깊숙이 파고들었다. 동생은 부모님이 부치던 땅을 물려받아 농사를 짓고 있다. 누나에게 자식처럼 키운 농산물을 몇 박스씩 부쳐주니 고마웠다. 전쟁을 치른 군인처럼 표면이 괭이에 찍혀 상처가 많았다. 오이와 초고추장에 버무리니 새콤달콤 엄마의 손맛이 떠올라 군침이 돌았다. 삼복중 닭백숙에 말린 인삼 대용으로 넣었던 추억에 울렁거렸다.
“도라지~도라지, 백도라지. 심심산천에 백도라지….”
향기에 흠뻑 취해 어릴 적 고향으로 달렸다. 엄마의 무명치마 주름에는 큰아들이 한국전쟁 중에 행방불명되어 소식이 없으니 아린 상처로 얼룩이 졌다. 화전을 일구며 비가 내리도록 하늘만 쳐다보았다. 몇 년씩 겹치는 흉년에 먼지가 펄펄 날렸다. 먹고살기 위해 산도라지라도 재배해보기로 했다. 도라지와 내가 인연이 된 것은 초등학생 때 엄마 따라 산나물을 뜯으면서부터였다. 나는 <산토끼> 노래를 부르며 뛰어다녔다.
“이것아, 밥 먹은 배로 도라지 여문 대궁이라도 따오거라.”
치마 앞에 가득 안고 헉헉거리면 엄마는 물오른 찔레 대궁을 꺾어주었다.
봉지에 싼 도라지를 엄마처럼 나누어 주기 위해 집을 나섰다. 동서네, 이웃집, 기침하는 지인에게도…. 전철을 타고 달리는 동안 빛바랜 줄기를 잡아당겼다. 나는 들에서 잠자리를 잡고 놀다가 소낙비가 내리면 원두막에 앉아 참외 서리를 해 먹었다.
베란다 구석으로 눈이 쏠렸다. 어떻게 질기고 질기게 살아남아 많은 열매를 맺고 사람들을 먹이며 이어왔을까? 이것도 생명인데 빈 화분에 흙과 모래를 섞어 촘촘히 꽂아 놓았다. 겨우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보라색 꽃잎 사이로 흰나비가 날아가 밭에 엎드린 엄마 머리에 앉았다. 나는 살금살금 걸어갔지만 손끝이 닿기도 전에 훨훨 날아갔다. 겨울이면 동네에 집집마다 영아들에게 홍역이 번져 좁쌀처럼 열꽃이 온몸에 돋고 기침을 했다. 선견지명이 있었는지 엄마는 도라지가 민간요법으로 쓰이던 것을 생각했다. 가족들이 감기로 기침할 때 배를 넣고 달여 먹으면 사포닌이 기관지 점액을 촉진시켜 기침이 멎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우리 밭에 지천인 도라지를 캤다. 동네에 홍역에 걸려 고열과 기침을 앓는 영아들 집집마다 나누어 주었다. 그 덕분인지 죽을 고비를 넘긴 아기들이 봄이 되어 노란 병아리처럼 아장아장 걸어 나왔다. 산비탈 밭마다 푸른 물결이 일렁이며 초여름에 꽃이 활짝 피었다. 몇 년 묵힌 약도라지를 약탕기에 달여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즙을 마시면 기침이 뚝 멎었다. 엄마는 씨를 받아 사람들에게 한 종지씩 나누어 주었다. 뒷집 할매, 순자 엄마…. “강남 갔던 제비도 돌아왔으니 묵밭에 이 작은 씨앗을 뿌려보세요. 후회하지 않을 거요.” 농경사회를 이루던 몇몇 성씨의 집성촌 텃세가 심했다. 외지에서 들어 온 사람들은 발을 붙이기도 힘들었다.
그 이후 마을 인심은 부드러워지고 이웃사촌이 되었다. 자식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기 위해 도라지와 얽히어 5남매를 먹이고 입혀 키우며 지난하게 살았다. 아직도 친정에 가면 이웃들과 더불어 정을 나누며 돈독했던 엄마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진다. 우리 동네는 척박한 산골이라 너나없이 화전을 일구었다. 자갈밭에 씨를 뿌리고 몇 년 동안 뿌리가 굵도록 인내로 기다렸다. 인생살이도 도라지 농사와 흡사하게 자식을 낳아 키우며 뒷바라지가 필요했다. 밭에 앉아 풀을 뜯으며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일을 하고 또 했다. 그 수확물로 목돈을 만들어 자식들의 중, 고등학교 등록금과 생계에 보탰다. 엄마의 고달픈 인생은 한 세상을 떠나서도 줄기를 멀리멀리 뻗어 우리들을 먹여 주었다.
서울로 이사를 왔다. 엄마한테 농번기를 피해 한번 다녀가시라고 했다. 어떻게 살고 있을까, 상상하며 달려왔으나, 하늘과 맞닿는 부엌 없는 문간방에 네 식구가 간신히 비를 피하고 있었다. 엄마까지 왔으니 다리도 못 뻗는다. 모녀는 방 한쪽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쌓인 앙금을 녹이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도시 생활에 지친 딸에게 용기를 주고 거친 손을 꼭 잡았다.
이튿날 새벽 차표를 예매했다. 엄마를 태운 기차가 철로에 미끄러지듯 떠나자 내 눈에는 도라지꽃이 바람에 흔들거렸다. 엄마의 인생도 도라지의 생애라서 척박한 돌밭환경에 살아내기 위해 만신창이 되었다. 거름기가 없으면 뿌리는 굵지 않고 잔발만 텁수룩하듯, 나의 인생도 비빌 언덕이 없으니 살아갈수록 첩첩산중이었다. 도시의 자갈밭에서 발버둥 칠수록 깊은 수렁으로 손끝에 피멍이 들었다. 엄마의 고달픔을 풀어주는 십팔번의 <도라지> 노래가 나의 노래가 되었다. 어느새 인생의 수레바퀴는 돌고 돌아 내 자식들이 성장해서 손자녀들과 함께 부른다.
“도라지~도라지 백~도라지. 심심산천에~백도라지….”
딸이 출장을 간 사이 돌봐 주던 손자들이 할머니가 흥얼거리는 노래를 듣고 신명이 났다. 연년생 외손 자녀들이 앙증맞은 아카펠라 삼중창을 불렀다. 노랑나비 한 마리가 나풀나풀 도라지 꽃잎에 앉았다. 혹시, 엄마가 아닐까? 나도 가을에는 씨를 받아 이웃집에도 골고루 나누어주리. 시집간 딸네 화분에도 뿌려주어야지. 엄마가 못다 한 사랑의 씨앗을 받아서 나의 꽃밭에 뿌리고 꽃을 피우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