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앞두고 영주가 전화를 했다. 그녀는 양평에서 35년 동안 유기농 농작물을 경작하고 있다. 그 수확의 열매를 친척들과 자식들에게 나누어 주는 재미로 낙을 삼았다. 참깨 농사 첫 수확물을 떨어 참기름을 짰다고 하였다. 땡볕에 튼실하게 영글어 참기름이 고소해서 제일 먼저 내 생각이 났다고. 추석에 송편과 나물에 쓰라는 다정한 목소리에 울컥거렸다.
전화를 끊고 마음은 한걸음에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영주야! 땀 흘려 수확한 것을 자식들에게 나누어 줘. 네 고마운 마음만 받을게.” 내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말을 잘랐다. “오랜만에 얼굴 보고 밥 한 끼 먹자고.”
서로 바쁜 관계로 늘 전화상으로 소통을 하였다. 공연히 나한테까지 마음을 쓰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그녀가 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에 그리움이 몰려왔다. 다음 날, 나는 모든 일정을 접고 양평 가는 전철을 탔다. 창밖으로 휙휙 지나가는 들녘에 곡식들이 알알이 영글어갔다. 내 마음은 설렘을 안고 전철보다 먼저 달렸다. 계절의 순환이 뒷걸음 치듯, 더 뜨거운 땡볕이 지구를 달구었다.
양평역에 내려 근처 마트에 들어갔다. 영주네 가족들에게 줄 약간의 선물을 준비해 등산 가방에 둘러맸다. 마을버스를 환승하니 느림보 거북이처럼 세월아 네월아 달린다. 간이 정거장마다 손님을 태우고 내리니 할머니 아저씨들이 보따리를 손에 들고, 머리에 이고, 오르락내리락하는 풍경에 친정엄마 생각이 났다. 우리 엄마도 살아 계시면 지금쯤 농사 지은 것을 보따리 보따리 싸서 손에 들려 보냈을 텐데…. 이제는 꿈속에서나 만날 수 있다.
도시에서 수십 년 동안 빨리빨리가 길들어졌다. 시골 버스의 속도에 갑갑증이 났다. “기사님, 차가 이렇게 천천히 달리니 종점에는 언제 도착합니까?” 뒤로 고개를 돌리고 나를 아래위로 쳐다보다가 투박하게 한마디 날렸다. “아직도 몇 정거장 남았습니다.” 갑자기 얼굴이 뜨거워졌다. “죄송합니다. 기사님, 천천히 가셔도 됩니다.” 내가 공손하게 말하니 “예.” 하며 허허 웃었다.
가을이 문턱에 왔다. 조금 후면 저 들녘이 옷을 갈아입을 것이다. 화가의 손에 들린 큰 붓으로 오색 물감을 쿡 찍어 이리저리 채색하면 울긋불긋 곱게 물든다. 벼가 알알이 익어가며 바람에 실려 고개를 살며시 숙인다. 농부들이 피땀으로 일군 풍성한 수확의 기쁨을 안겨 줄 때가 되었다. 사람이 서로를 배려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더불어 사는 세상에 나만 생각하지 말고 타인의 이익과 존중하는 자세가 먼저라는 것을 알면서도 무디게 살았다. 오로지 ‘조금 더, 많이’라는 말과 행동으로 어두운 터널을 지나왔다. 마음의 여유가 없으니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한 박자 느렸다. 내 주위를 먼저 챙기고 살았으면 지금보다 마음이 넉넉해졌지 않을까 싶었다.
시골길을 버스가 달렸다. 파란 하늘에 두둥실 뜬 흰구름 사이로 초승달이 내 뒤를 따라왔다. 탁 트인 들녘에는 초록 물결이 넘실거렸다. 얼마 만에 여유롭게 바라보는 풍경들인가. 자연의 질서 앞에 초라한 내 모습도 숙연해졌다. 잠시 마음의 공간이 넓어지고 잔잔한 즐거움이 차올랐다. ‘그래, 맞아. 오늘이 선물이야. 행복은 지금뿐이야. 친구처럼 사랑을 그때그때 표현하고 나누며 살아보자. 어차피 덤으로 받은 인생인데 웃고 즐겁게 살아야지.’ 졸음이 쏟아졌다. 덜커덩, 끼이익, 버스가 섰다. 종점이다. 친구가 맨발로 달려와 기쁘게 반겨주었다. 농장 밭둑을 손잡고 걸었다. 밭 주위에 심어 놓은 온갖 과일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쳐 길을 안내해 주었다.
원두막으로 올라갔다. 한바탕 환영 인사를 치렀다. 들뜬 마음을 지긋하게 눌렀다. 친구는 더위에 밭일하느라 새까맣게 탔다. 한참 동안 밀린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머리 위에서 바람이 흔들흔들 불 때마다 뽕나무에서 농익은 오디가 후드득 원두막에 쏟아졌다. 처음 먹어 보는 사람처럼 게걸스럽게 한 움큼씩 입을 벌리고 털어 넣었다. 입안에 가득 고인 오디의 육즙이 달콤했다. “아, 맛있다.” 영주가 보랏빛에 물든 내 입술과 얼굴을 보고 배꼽을 잡았다. “이야, 오디가 엄청 달다.” 한바탕 배부르게 먹었다. 그제서야 친구의 그을린 얼굴이 창백해 보였다.
“더운 날씨에 밭일하느라 많이 힘들었지?”
그녀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직은 괜찮아, 할 만해. 남편과 둘이서 큰 농장을 경작하다 보니 더위를 먹었나 봐.”
농사란 풀과의 전쟁이라 나이 탓도 있고 힘에 부쳐 자식들이 하지 말라고 성화를 해도 수확의 기쁨을 이웃과 나누는 정에 일을 손 놓을 수 없다고 했다.
“너는 그 많은 단골손님 관리를 어떻게 하니? ”
그녀는 조금 손해 보는 것이 본전이라며 미소를 짓는다. 그 말에 도시 생활에 찌든 가슴을 훈훈하게 해주었다. 친구 덕분에 마음의 여백이 생겼다.
점심은 맛깔난 유기농 반찬이 가득했다. 호박 무침, 가지 볶음, 미나리 무침, 부추 전, 고추찜, 상추쌈, 특히 어제 잡은 다슬깃국의 얼큰 시원한 맛이 일품이었다. 개울가에서 물소리가 졸졸, 풀숲에서 뻐꾹새가 뻐꾹뻐꾹 노래를 불렀다. 어릴 적 오빠 생각이 나서 나도 노래를 불렀다.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제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면 비단 구두 사 가지고 오신다더니….”
오랜만에 동심으로 돌아갔다. 혼탁했던 마음이 말갛게 씻어졌다. 가슴에서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새소리와 개울물 소리 덕분에 정서적으로 소박한 만찬을 즐길 수 있었다. 소화를 시키려고 물도랑으로 내려갔다. 어머머, 어제 친구 손에서 운 좋게 살아남은 다슬기들이 돌에 다닥다닥 붙었다. 옛 시절로 돌아갔다. 모든 생명체는 자연의 일부인데, 다슬기 입장은 생각하지도 않고 물속으로 들어가서 금방 한 바가지를 잡았다. 그동안 친구가 친정어머니처럼 바리바리 싸서 챙겨 주었다. 등산 가방에 참기름 두 병과 빨갛게 익은 고추와 상추, 부추까지 가득 찼다.
돌아오는 전철에서 나를 돌아봤다. 만약에 나 같으면 아픈 몸으로 그녀를 위해 마음을 써 줄 수 있었을까. 아마 그 정도로 인심 후하게 바리바리 챙겨주지는 못했을 것 같다. 친구의 넉넉한 마음 씀씀이가 존경스러웠다. 집에 도착해서 골뱅이는 해감시켜 놓았다. 솜씨 발휘를 해서 삶은 나물에 참기름을 듬뿍 넣고, 조물조물 무쳐 뚝딱 반찬 몇 가지를 만들었다. 남편과 저녁을 먹으며 친구 자랑을 했다. 차가운 먼지가 쌓인 내 마음에도 훈풍이 불었다. 그녀가 준 고소한 참기름 향기가 내 가슴에 가득히 고였다. 나의 남은 인생도 친구의 고소한 참기름 향기를 이웃들과 나누며 마음의 부자로 살아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