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박눈이 펑펑 내린다. 저녁 어스름이다. 반가운 마음에 창문을 활짝 열었다. 눈이 오는 풍경은 언제 보아도 마음이 순수해진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사뿐사뿐 내려앉았다. 이런 날에는 집 밖으로 싸돌아다니며 아무도 걷지 않은 눈 위에 내 발자국을 찍어놓고 싶었다. 눈이 신발 바닥에 눌려 걸을 때마다 뽀드득뽀드득 소리가 났다. 푹신한 융단 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찬바람에 실려 온 군고구마 향기가 코를 자극했다. 젊은 부부가 아기 손 잡고 군고구마 한 봉지를 사 들고 지나갔다. 달콤한 향기에 실려 그날의 동심으로 끌려갔다.
고구마 농사를 짓느라 친정아버지는 여름내 고구마밭에서 땀을 흘렸다. 긴긴 겨울 자식들의 군것질로 고구마 한 가마니를 저장해 놓았다. 동지섣달 눈이 내리면 소죽 끓이고 남은 잿불에 고구마를 푹 묻어두었다. 밤늦도록 친구들과 놀다 보면 배가 출출했다. 까맣게 탄 껍질을 한 꺼풀씩 벗겨내면 황금빛깔에 달달한 고구마는 등가죽에 붙은 배를 채워주었다. 여러 명이 둘러앉아 후후 불면서 친구가 한입 덥석 베어 물면 ‘앗, 뜨거워,’ 둘이 먹다가 다 죽어도 모를 맛이었다. 찬바람이 휘몰아칠 때마다 그때의 고구마 향기를 잊을 수 없었다.
두근두근 설렌다. 두툼한 파카가 제철을 만났다. 발을 옮길 때마다 경쾌한 발소리가 따라왔다. 하얀 눈밭에 내 삶의 흔적을 남기며 사뿐사뿐 걸었다. 이맘때면 전철역 밖의 좁은 통로에는 할아버지가 기름통을 개조해서 군고구마를 구워 팔았다. 사람들은 종종걸음을 멈추고 군고구마 통 앞에 줄이 길게 늘어섰다. 달콤한 향기가 바람을 타고 멀리멀리 날아갔다. 퇴근하는 사람들을 이곳으로 불러들였다. 낮에는 구청 직원들의 단속에 쫓겨 다녔던 할아버지는 숨어 있다가 공무원들이 퇴근하고 나면 밤에 나타났다.
추위에 발을 동동 굴렀다. 달콤한 고구마 향기에 마음이 따라갔다. 할아버지의 옷차림새에 눈이 쏠렸다. 허름한 외투에 찬바람이 숭숭 들어가는 헐렁한 바지를 입었다. 얼굴에 좁쌀 같은 소름이 돋아 추워 보였다. 산지 고구맛값이 오르고 경제 사정이 안 좋아서…. 혼자만이 아는 말로 구시렁거렸다. 듬성듬성한 치아 사이로 발음이 흘러내렸다. 눈이 내리는 밤이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너도나도 군고구마를 한 봉지씩 사 갔다. 갑자기 할아버지의 얼굴이 환하게 빛나고 입은 귀에 걸렸다. 히죽히죽 웃으니 이마에 파인 밭고랑 같은 주름이 쫙 펴졌다. 청년들도 창업이라며 길거리에서 군고구마를 팔더니 모두 수지 타산이 맞지 않았는지 없어졌다. 어릴 적 흉년이 들면 고구마를 가마솥에 푹 쪄서 동치미와 함께 끼니를 때웠다.
“군고구마 얼마예요?”
“세 개 오천원”
“한 봉지 주세요.”
지갑에서 오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 드렸다. 추위에 꽁꽁 언 손가락이 덜덜 떨렸다. 신문지를 붙여 만든 봉지에 정성껏 담아 주었다. 인심 좋게 떨이로 한 알 더 넣었다며 웃었다. 덤까지 얻은 따끈한 봉지를 끌어안고 집으로 향했다. 군고구마가 부적처럼 느껴졌다. 새해에는 일이 술술 풀릴 것만 같았다. 그새 내린 눈에 발목까지 푹푹 빠졌다. 남편이 외출할 때 늦게 온다고 했는데, 대문을 여는 순간, “당신 눈구덩이에 어디 쏘다니는 거야.” 했다.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며 말을 하였다. “그 옛날 친구가 생각나서 거리를 헤매다가 왔네요.” 남편이 내 말끝에 되물었다. “누굴 만나고 왔다고?” “신경 끄세요. 됐거든요. 자, 추억의 군고구마를 사 왔어요.” 남편은 코를 킁킁거리며 개구쟁이처럼 얼굴이 변해갔다.
하얀 눈이 솜이불처럼 세상을 덮었다. 오늘은 왠지 기분이 좋았다. 눈 내리는 풍경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보면 볼수록 정겹다. 한 시간 동안 내린 폭설은 도로를 마비시켰다. TV 저녁 뉴스에는 차들이 눈밭에서 비틀거리다가 좌충우돌 사고가 났다. 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빙판길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걸음을 재촉했다. 멀리서 눈 위를 걸어가는 회사원들의 발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젊은이들은 취업난에 내몰렸다. 알바 천국에 살고 있다. 이 시대의 우리들의 희망은 어디에 있을까. 직장이 없으니 결혼은 못하고 혼밥이 유행처럼 번졌다. 명예퇴직으로 어둠이 내려앉은 가장들의 얼굴에도 새하얀 희망으로 채색되길 빌었다.
금방 내린 눈에 나뭇가지도 하얀 솜사탕을 물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비 오는 날보다 눈 내리는 날이 더 좋았다. 눈을 한 주먹 뭉쳐 둥글둥글 굴렸다. 눈사람이 완성되면 동네 어귀에 장승처럼 세워놓았다. 우리 마을에 평화를 빌어준다는 말을 그대로 믿었는데 살아 보니 사람들의 소망일 뿐 꼭 맞지는 않았다. 창문을 열었다. 아파트 마당에는 주인과 함께 나온 강아지가 눈밭을 신나게 뛰어다닌다. 각박한 인생살이에 어둠이 내려앉은 근심·걱정도 다 묻혔다.
방학이라 외갓집에 찾아온 손주들에게 군고구마를 한 알씩 주었다. 아버지가 아궁이에서 금방 꺼낸 준 그 맛이었다. 고구마 밭을 통째로 당겨와 줄기들이 가족의 마음까지 뻗어 들어왔다. 여름날 삼베옷이 땀으로 흠뻑 젖도록 아버지는 밭고랑에 엎드려 있었다. 주름진 이마의 골짜기마다 땀방울이 데굴데굴 굴러 내렸다. 군고구마 할아버지의 모습에서 친정아버지가 겹쳤다. 오늘 밤에는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에 잠들지 못할 것 같다.
겨울 맛이 났다. 할아버지의 군고구마는 현재와 과거를 이어주었다. 춥고 배고픈 시절 자식들의 배를 채워 주었던 간식이었다.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따뜻한 군고구마 한 알에 이렇게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하다. 인생의 무게는 마음먹기에 따라 무겁게도, 가볍게도 느껴진다. 모든 사람이 따뜻한 겨울을 보냈으면 좋겠다.